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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조회수 | 122
작성일 | 18.10.02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흔히들 “결혼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자유는 끝이다.”라고 합니다. 새신랑을 앉혀 놓고 이런 말들을 충고라고 하는 이들에게는 결혼은 서로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이란 당연히 새가 새장에 갇혀 있다가 벗어나 자유로운 세계로 훨훨 날아가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묻습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아내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주고 아내를 소박하여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신명 24,1)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남긴 것은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욕심을 충족시키려고 아내를 버릴 궁리만하는 남자들의 이기심을 질책하십니다. 자기 마음대로 아내에게 이혼장만 써주면 언제든지 아내를 버릴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애틋한 정이 깊어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아내가 아이들을 키우고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한눈을 파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신뢰가 깨지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성적인 불만때문에 배신하고, 여자들은 주로 무심한 남편에게서 얻지 못하는 사랑과 감정의 결핍을 보상받기 위해 배신한다고 합니다. 또한 여자들은 진실한 사랑을 중요시하는 반면,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와 관계가 안정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한눈을 팔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치를 갖고 살아갑니다. 부부간에 이루어지는 흔한 오해는 상대방이 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무감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잣대로 배우자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오류입니다. 또 살아가면서 한 순간의 실수로 고통과 위기가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부부 사이에 신뢰가 흔들리고 금이 갈 때 똑같은 방법으로 앙갚음하려 하거나 애정적으로 복수하려 들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해야 합니다.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가능하고, 고통과 위기를 극복해 나감으로써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대화로써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상대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거나 버려서,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싸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엄청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래야만 둘의 관계가 원만해지고 가정의 평화,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대화조차 거부한다면 우리는 신앙인이므로 하느님과의 대화, 곧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혼은 단순히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제정된 제도가 아니며, 두 인격이 만나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것이 결혼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육체적인 결합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희생한 것과 같이 남편도 아내를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거룩한 가정이라는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항상 자녀들을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부부간의 신의를 지켜나가고 사랑을 성숙시켜가기를 기도합니다.

▦ 의정부교구 조주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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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서로 의지하고 믿고 감사하는 가정은 하느님나라의 향기가...

한가위를 지내면서 느끼는 것은 ‘감사’입니다. 땅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이 땅을 물려주시고 하느님을 도와 생명을 이어준 선조들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이 우리 고유한 축제인 한가위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축제가 지난 오늘, 우리는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는 독서와 복음을 듣습니다.

먼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였음을 가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경우는 아내가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혼의 사유에 남성의 경우는 언급이 없습니다. 여기서 ‘아내의 추한 것’은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단정치 못하게 노출하는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혼 풍습을 넘어서 창조주 이신 하느님께서 부부를 맺어주셨기에 이혼이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부부의 사명은 창조 때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이 둘이 함께 어울려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지속하는 것임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사실 매년 사회에서 말하는 이혼이 늘어나서 함께 교회법원에 올라오는 혼인무효소송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거와 달리 여성도 많이 배우고, 사회에서도 자기역할을 하여 여성의 의식이나 지위가 올라간 것에 비해서 남성들은 아직도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다가 산업화로 인해 핵가족화가 되고, 또한 바쁜 일상으로 인해 가정이 자주 모일 기회가 적어졌다는 것이 이혼이 증가된 요소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정을 살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에 있습니다. 어린이는 부모를 믿고 의지하며 순수한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아이들의 ‘까르르’하는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에 모든 힘겨움이 사라진다는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나라를 느끼게 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들이라는 가정의 구성은 상하의 구분이 아니라 서로의 위치와 역할 구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서로가 동반자이며 협력자로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린이처럼 서로가 믿고 의지하며 감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화가 가득한 가정에서 나오는 소리는 ‘네 탓이야’와 ‘못 살겠다’입니다. 그러나 화목한 가정에서 나오는 소리는 ‘미안해요’와 ‘고마워요’입니다. 화목한 가정에는 벌써 하느님 나라의 향기가 솔솔 피어납니다. 여러분 가정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감사하여 하느님 나라의 향기가 피어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의정부교구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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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아무렇지 않게 버려서는 안 된다”

인적이 드물고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외진 곳에 살고 있다. 밤이 되면 더욱 잠잠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도로변에는 남모르게 버려진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음식물이 담긴 봉지는 좀 더 고약하다. 얼마 전에는 누군가가 거대한 소파까지 버려 놓고 갔다. 대단한 정성이다. 어두워 보이지 않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으면 차창 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내버린다.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 버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가끔은 무섭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는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어떤 답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아내를 버려선 안 된다’였을까? 아니면 ‘아내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였을까? 솔직히 그들에게 예수님의 답변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지적하신다.

사실 예수님 시대의 남편들은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을 때뿐만 아니라 음식을 태워도 아내를 버릴 수 있었고, 자신의 아내보다 예쁜 부인을 발견해도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남편은 아내를 아무렇지 않게 버릴 수 있었다. 그런 시대였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질문 속에는, 우리가 쉽게 놓쳐 버리고 있는, 차별과 폭력이 숨어 있다. 똑같은 형식이지만 완전히 다른 내용의 질문을 그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내가 남편을 버려도 됩니까?” 아내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남편은 오직 버리는 주체일 뿐이지 버려지는 객체는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던 이 차별과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 말씀은 아무 힘도 없는 아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버리는 물건처럼 아내를 취급했던 남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버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워주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버리는 것에 익숙해진 문화는 이제 ‘사람’에게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돈으로 사고 물건처럼 넘기고 기계처럼 부려먹는 문화 속에서 사람을 버리는 것 역시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수백 명의 목숨이 물속에 잠겨도 아무렇지 않고, 수백 일을 크레인과 굴뚝 위에 올라 호소해도 아무렇지 않으며, 수천 명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수십 명이 목숨을 끊어도 아무렇지 않다면, 나는 어느새 버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느님께서 손수 꽁꽁 묶어주신 그 끈을 냉정하게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나하나 맺어주셨다. 그 매듭을 외면해선 안 된다. 아무렇지 않게 버려선 안 된다.

▦ 의정부교구 김효준 레오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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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혼인과 이혼

북경에서 생활하다 보면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 특히 교통체계가 많이 낯설었습니다. 신호체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심각한 부분은 그 신호조차도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임에도 한 가지 놀랐던 부분은 교통사고 발생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이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운전시에나 보행 시에 주변을 살피고 천천히 가도록 만든 결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모두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실제로 며칠 전 출근시간에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갑자기 꺼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차들이 뒤엉켜 앞으로도 옆으로도 못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결국 저는 이 사건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체계는, 비록 그것이 불완전한 것일지라도,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하느냐,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율법과 현실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고질적인 딜레마였기 때문에 해결과정에서 자칫 한쪽을 심하게 훼손하거나 파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지도,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 지혜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들고 온 문제도모세 때부터 논란이 되어왔던 문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번 사례에서 만큼은 율법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판결을 하십니다. 그러나 곰곰이 더 생각해보면 이는 율법을 위해 현실의 삶을 외면한 판결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선악과의 경우처럼, 욕망이 초래하는 비극을 차단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주기 위한예수님의 결단이었습니다.

사실 이혼이나 동거는 혼인의 결점에 대한 보완책이 될수 없습니다. 이혼 후나 동거의 삶이 혼인의 삶보다 더 많은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교통신호가 불완전하다하여 신호등을 모두 없애거나 수신호등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비록 혼인이 두 남녀의 행복한 삶을 완전하게 보장해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혼인 안에서 해결책을 찾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혼인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인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의 배우자가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인가에 대한 확신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 곧 내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현실이지만 동시에 신비이기도 하다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배우자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혼인생활을 통해 하느님 신비를 체험하는 행복한 삶을 이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장세훈 시몬 신부 : 2018년 10월 7일
  |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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