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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죽음으로 이끄는 약
조회수 | 2,451
작성일 | 06.01.26
오늘 복음(마르 1,21ㄴ-28) 역시 이전 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위로 더러운 악령들을 제압하면서 그것이 바로 예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여주어야 할 모습임을 깨우쳐 주신다.

“이런 권위에 찬 예수님의 모습을,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 속에서 동창 신부들과 이틀 동안 동해안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런데 바닷바람을 쐐서 그런지 감기가 단단히 걸렸다. 항생제가 들어간 약을 먹었지만 잘 낫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의사는 요즘 감기는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잘 낫지 않는다고 했다. 항생제 오·남용이 병원균에 약제 내성을 일으켜 항생제 자신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슈퍼박테리아’(항생제에도 죽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붙은 별명)의 출현과 그로 인한 병원 내 감염까지 불러온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감기에 걸기게 되면 기실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몸의 세포가 나쁜 균과 싸우느라고 몸에 열도 나고 목도 아프고 콧물도 나온단다. 물 많이 마시고 푹 쉬면 낫는 병이 바로 감기다. 그리고 이런 병치레를 하면 더 건강해 지고 아이들은 더 잘 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조바심과 눈에 빨리 보이는 효과를 찾아 나서는 마음이 어쩌면 더 큰 병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르   겠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건강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삶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과 고통, 그로 말미암은 유혹에 우리는 사로잡혀있고 이런 유혹의 속박을 우리 자신이 제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통과 어려움에 맞서 평화와 안정을 찾고자 우리는 내·외적으로 투쟁을 한다. 아마도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 등, 우리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어려움을 잊기 위해 우리는 세상이 주는 처방전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본다. 돈, 명예, 찰나의 쾌락, 인간적인 의지와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이 모든 것들이 지금 당장은 달콤하고 행복하지만, 오·남용되는 항생제처럼 우리의 병을 낫게 해 주는 약이 아니라, 오히려 병을 더 키워서 나중에는 그 어떤 약도 소용없는 자기파멸의 약이 될 수도 있다. 고통은 죄와 악이 아니다. ‘병’은 고통과 어려움이 아니라 이것들을 해결하려고 우리가 뻗은 손에 들려있는 그 모든 세속적인 약이다. 그러나 고통과 어려움은 그런 약을 취하지 않고도 우리를 구원과 해방으로 이끌어 준다. 감기에 걸렸다고 무조건 항생제를 오·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해서 악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바로 우리의 세포 속에 있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내 안에 있는 그분의 영을 믿자. 느긋한 마음으로 그분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과 희망으로 내 앞에 펼쳐진 고통의 걸림돌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고통과 어려움을 맞아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분께서 싸우신다. 제발 자신의 삶에 여유와 휴식을 가졌으면 좋겠다.

황규현(보니파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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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

오늘의 말씀의 주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안식일 날 가파르나움의 한 회당에서 일어난 짤막한 사건이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 나갔을 만큼 파급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즉 당시의 청중들의 반응만 놀랐다고 나타난다. 여기에서 비교가 되는 사람들은 당시의 신학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바리사이파에 속해있던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랍비 학교에서 양성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전통적이고도 형식화된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성서의 내용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란 것은 그가 그 당시의 랍비 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도 권위 있게 말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로 이루어지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의 말이 즉시 새로운 환경과 사실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드러내며, 또한 사탄의 세력을 없애 버리시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 주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악의 세력과 격렬하게 맞서신 사건의 내용이다. 여기서 악의 세력은 자신의 존재를 폭로하여 불안케 하는 예수님께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가 명백해진다. 그분의 권위는 말씀을 통해 드러나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위격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사탄은 즉시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고 고백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론적 의미가 담긴 칭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탄의 고백을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고 하면서도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장벽을 쌓아 가기 때문이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24절). 사탄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왕국을 파괴하러 오는 ‘적’으로 느낄 뿐이지 결코 사랑으로 자신을 기쁘게 복종시켜야 할 ‘주님’으로 느끼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에게 물러가라고 권위 있게 명령을 내리신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25-26절). 예수께서는 또 한번 권위 있게 말씀하심으로써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완성시키신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게 된다. 즉 사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분열시켰던 것이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놀라움과 공포에 싸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들이 보고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과 말씀에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27절). 이제부터 예수께 대한 관심은 더욱 증폭되기에 이른다: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28절). 이 청중들의 모습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그분의 권위 앞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이며 선포자의 역할을 지상과제로 삼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권위가 있게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 그 권위는 많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가운데 참된 봉사를 통하여 나오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말씀과 업적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즉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본받도록 하고 그러한 도우심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조욱현 신부
  |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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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제복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당시에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아도 복장에서부터 풍기는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특별한 옷차림을 하거나 제복을 입게 되면 상황에 맞는 ‘권위’를 풍깁니다. 병원에서 보이는 흰 가운이나, 경찰의 제복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복장을 하지도 않으셨는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학자들보다 더 놀라운 권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시다.

제가 교우들을 만나고, 봉성체나 집 축복을 나가면 많은 이들이 제가 사제임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사제복을 갖추지 않고 교우들이 모인 곳이 아닌 곳을 간다면 제가 사제임을 알아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교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조배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 간다면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적어도 내가 드러내기 전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율법학자들과 달리 행동에서 드러나는 권위로 더러운 영까지 복종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에서 온 것이며, 그 권위는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기에 더욱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특별히 다른 제복을 입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리고 성당에서 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기에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권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실천하는 한 주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정훈 요셉 신부
  |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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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제가 가장 힘이 솟고 팔팔할 때는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라면 이 때 누구와 싸워도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저도 싸움은 하지 않았지만 운동은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도 싸움 잘하는 아이들의 패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저의 친구에게 이것저것 시키더니 결국엔 발로 등을 찼습니다. 저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아이 중간에 막아섰습니다. 그런데 그 때리던 아이는 놀랐는지 뒤로 자빠졌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 내가 자기를 때렸다고 하며 마구 흥분하였습니다. 저는 싸울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제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마치 솜으로 맞은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회심의 일타를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 저를 보더니 움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교실 뒤로 가더니 마대자루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말려서 결국 원치 않았던 싸움은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무기를 든 이유는 맨 손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아이가 싸움에서 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아이들은 떼거리로 다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있는 편을 택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국회에 계시는 어른들까지 서로 더 자기가 세다고 난리법석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높아지고자 하는 권력의 욕구는 정치판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서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뛰어난 것을 권력을 위해 사용할 때 그 모든 것들은 ‘폭력’이 됩니다. 전 세계 역사에서 권력을 쥐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힘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무엇을 이용해서라도 다른 사람 위에 있기를 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폭력이 됩니다.

얼마 전엔 어떤 자매님이 딸이 결혼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딸을 실내화를 벗어서 때리다가 결국 눈이 붓고 충혈 되어 겁을 잔뜩 집어먹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복종시키고 싶은데 그래서 결국 사용하는 것이 폭력인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뭐라 해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이 침묵의 행위는 어쩌면 말대꾸 안 하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을지라도 결국 부모의 화를 더욱 돋우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높아지려고 할 때 서로간의 사랑이 깨지고 있음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남편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아내가 사랑스러울 사람이 누가 있으며 대드는 자녀들이 사랑스러울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폭력으로 얻은 권력은 오히려 그 사람의 참다운 권위를 떨어뜨립니다. 아이들이 당장 때리는 부모의 말을 듣기는 하겠지만 커서 독립하면 그래서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다 성장한 자녀들이 부모의 그런 폭력성을 기억하며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 것입니다.

로마의 위대한 시저도 온 세상을 정복했지만 결국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세기의 정복자 나폴레옹도 쓸쓸한 유배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런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허무한 권력을 위해서 세상엔 얼마나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단순한 예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자주 서로 주먹질과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면 알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뿌리는 바로 이 권력욕, 성욕, 재물욕인데 그 중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권력욕이라합니다. 그래서 재벌들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이고 이태리만 보아도 최고 거부인 사람이 오랜 시간 수상을 몇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본성을 거슬러 새로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었지만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계셨다고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박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도 안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영을 한 마디로 내쫓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맞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헤로데도 로마의 황제도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에게 조정당할 수도 있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러운 영까지도 한 마디로 누를 수 있는 권위를 지니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이런 권위를 지닌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독립시키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매 맞고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더러운 영까지도 제압하고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던 그 힘은 어디로 가고 실제로는 양처럼 온순하게 도살장에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그분의 힘과 권위를 보게 됩니다. 죽었던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이 세상의 권위와는 전혀 다름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폭력으로 힘을 얻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순종과 비폭력으로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참다운 권위와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있는 권위들조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위와 힘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도 계속 누가 서로 높은지에 대해 다투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세상의 권위에만 눈이 멀어 있는 제자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 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낮아지는 사람만이 그 안에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참다운 권위를 지니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성모님의 경우 사도 중에 들지 않았어도 그 겸손하심으로 성령님으로 충만하셨고 그래서 참다운 권위로 따지자면 성모님이 사도들 위에 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사도들의 모후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겸손해진 사도들도 급기야 성령강림으로 참다운 권위를 입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베드로는 그 날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에게 세례를 줍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기로 자청합니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닌 굶어 죽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에도 가족이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죽는 편이 낫다고 간수를 설득합니다. 세상 어떤 권력가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도 이기는 위대한 권력가들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이 세상 참다운 권위와 힘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전삼용 신부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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