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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 다스림의 위력
조회수 | 2,023
작성일 | 06.02.01
1. 가파르나움 일지(21-39절)
  
마르코 복음 1장21-39절은 마르코가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 하루 동안 가파르나움에서 하신 일을 일지 형식으로 엮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오전에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21-28절). 점심 때가 되어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29-31절). 안식일이 끝나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32-34절). 어두운 새벽,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후, 제자들이 찾아오자 그들과 함께 갈릴래아의 회당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35-39절). 오늘 복음(마르 1,21-28)은 가파르나움 일지 중 회당에서 미친 사람을 고치신 구마이적 사화(驅魔異蹟 史話)입니다.

2. 구마이적 사화(21-28절)
  
복음서에 나오는 구마이적 사화는 5편인데 그 가운데 4편이 마르코 복음서에 실려 있습니다(1,21-28 ; 5,1-20 ; 7,24-30 ; 9,14-29). 마르코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과 사탄이 싸움을 벌이는 양 구마이적을 서술합니다. 구마이적 사화 서술 양식은 구마자(驅魔者)와 부마자(付魔者)의 상봉(23절), 부마자의 방어사(24절), 구마자의 추방령(25절), 귀신추방(26절) 그리고 목격자들의 반응(27절)으로 짜여졌습니다.

3. 우리의 이해
  
예수님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구마행위는 '하느님의 다스림'(하느님의 나라)이 사탄을 물리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드러낸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뿐 아니라 구마행위로써 하느님 다스림의 위력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는다고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주위에는 예외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또 이를 악용하여 금품을 착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처신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더러운 귀신에 들린 사람들이 전보다 분명히 많이 줄었습니다만, 재물·권력·명예라는 또 다른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하고 치유하는 것이 오늘의 구마행위입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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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는 법 - 겸손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회당에서 악령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악의 세력들이 맴돌고 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만 정의로운 것처럼 정의를 외칩니다.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사랑을 외치며 교회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을 비난합니다. 자신들이 정의롭지 못한 것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못한 것만을 침소봉대합니다.

‘교황님이 다녀가셨는데 왜 한국 교회는 바뀌지 않느냐?’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정도로 교회가 바뀔 것 같으면, 우리 교회는 수도 없이 탈바꿈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난 받고 죽음을 겪으셨는데도 세상은 그렇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바뀌지 않고, 다른 사람더러 바꾸라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키려면 자신부터 사랑을 실천해야만 사랑의 교회가 됩니다. 자신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더러만 요구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자세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때로는 악령이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어느 사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자처하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였습니다. 어느 수녀가 자신의 영적 체험을 영성의 대가이신 십자가의 성 요한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끈질기게 요청하는 바람에 요한 신부님은 수녀님의 체험을 글로 적어 보내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읽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 어떻게 겸손하지 않느냐? 이것은 영의 체험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거나 신비를 체험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신비를 체험한 후 저술 작업을 중단하였습니다.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신비에 비하면 자신이 언급한 하느님에 관한 모든 진술은 ‘지푸라기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신비체험의 영적 식별의 가장 기초적인 기준입니다.

자신이 먼저 합시다. 그리고 겸손 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악령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대교구 조규만 주교>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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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수님의 가르침

마르코 1,21ㄴ-28

오늘 마르코 복음은 제자들을 뽑으신 후 처음으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악령을 쫓아내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던 내용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은 모두 놀랍니다.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더러운 영의 반응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있습니까?”는 질문은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 줍니다. 더 나아가 그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는 말은 마치 신앙 고백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첫 활동에서 악령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또 그분이 어떤 분인지 밝히고 있는 셈입니다. 마르코 복음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제자들의 몰이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늘 복음의 내용은 더욱 중요해 보입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이야기는 다시 주위 사람들 반응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며 경탄합니다. 마치 악령을 쫓아낸 행동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가르침처럼 생각됩니다. 처음과 마지막에 사람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권위 있는 가르침’ 사이에 악령 들린 사람의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고백을 강조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은 신명기에 표현되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생각하게 합니다.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는 하느님 말씀은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모세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려준 인물이고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던 인물이며, 무엇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인물로 여겨집니다. 해방이라는 점에서 모세와 예수님은 비교될 수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의 종살이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악령의 입을 통한 고백과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려줍니다. 마르코 복음은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며,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복음을 읽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세상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혼인을 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지, 주님의 일만을 걱정하라고 권고합니다. 마치 큰 짐이 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것이 걱정을 주려는 것이나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따라 ‘품위 있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신부
가톨릭신문 2015년 2월 1일>
  |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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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찌 된 일이냐

오늘 복음에서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말하며 몹시 놀랍니다. 심지어 더러운 영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맙니다. 비단 오늘 복음 말씀이 아니더라도 복음서의 많은 곳에서 예수님의 권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서, 기회 닿는 대로 예수님을 올가미에 씌우려고 했던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드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는 광분한 사람들을 돌려보내시는 예수님의 담대함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위대한 권위를 보게 됩니다. 더러운 영들이야 영적 존재이므로 예수님의 신성을 볼 수 있어 그 앞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고 치더라도 예수님의 신성을 볼 수 없었던 인간들도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그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예수님의 이러한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다운 권위란 바로 사람들을 위한 진실한 사랑과 섬김에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진정한 권위를 부여받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남을 배려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진정한 사랑과 섬김보다는 자신을 낮추지 못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율법학자들도 군중도 바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섬김의 자세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진정성과 권위를 보았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감동 받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던 그들에게 그렇지 않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이 보기에도 놀랍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다가왔을 것이며 자발적인 복종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권위를 가지고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해줄 때,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권위는 사랑과 존중에서 나오고 그런 권위라야만 사람을 감화시키고 자발적으로 일하게 합니다. 권위(authority)는 권력(power)과는 그 성질을 달리하여 내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권위란 난해한 용어를 쓴다고 해서, 화려한 제복을 입는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이 좀 더 굽실거릴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해서가 아님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수도회에서 권위의 봉사를 수행해야 하는 장상의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섬김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할 만한 권위를 가지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형제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때만 참다운 권위를 가질 수 있음을 서도 바보처럼 잘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형제들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해줄 때가 을까요?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안성철 마조리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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