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2 29.6%
[전주] 기도와 삶 : “왜 걱정하세요? 기도할 수 있는데”
조회수 | 2,318
작성일 | 06.02.03
교구청에서 일하던 때 교구의 사목에 관한 일들을 맡아 준비하고 치러야 할 일들이 적지 않은데다 처음 하는 일이 서툴러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성격적으로 ‘일 중심’의 생활에 익숙했던 나는 많은 일들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걱정과 완벽하게 일을 해내야한다는 강박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생긴 큰 사건을 처리하려고 서울로 가는 버스 속에서 피곤함과 걱정으로 지쳐 있는 나를 일깨우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에 걸린 현수막에 “왜 걱정하세요? 기도할 수 있는데”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나를 유지시켜주는 힘은 기도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잊은 채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욥의 한탄처럼 인생의 고달픔과 고통 속에서 허덕이며 타성과 두려움에 지쳐가는 내 삶이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기도로부터 힘을 얻지 않고 인간적인 능력에 기대어 자신을 소모하는 내 삶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사실 내가 힘겨워하고 있었던 원인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걱정하기 전에 기도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기도하기 전에 걱정부터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점점 힘이 빠지고 삶의 여유조차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걱정부터 하고 있는 내 삶에는 주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 메말라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나는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차올라 마음의 평안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일을 무사히 마치고 내려오는 버스 속에서 걱정했던 모든 일들이 모두 잘 풀리게 되어 감사의 기도를 바치며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늘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전하는 예수님은 곧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필요한 모든 힘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상은 걱정을 불러일으킬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는 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그분의 뒤에는 그분을 모함하고 없애버리려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충분히 자라나지 못한 탓에 엉뚱한 문제에 휘말리기도 했고, 인간적인 야심과 미숙한 열정으로 주님의 길에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혼란스럽고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갈 수 있었던 힘은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책임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용기를 얻었고 당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어 내는 사랑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소개하는 첫머리에서부터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열정으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예수님 활동의 중심에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해줍니다. 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일이 밤늦게까지 계속돼 피곤하고 지치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먼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신’ 다음에야 “다른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하시며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기도보다 일을 우선시하고 중요시했다면 공생활에서 밀어닥치는 사람들과 일들 속에서 주저앉았을 것이고, 당신을 향한 반대와 비난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활동은 걱정과 두려움의 덫에 걸리게 되고 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선한 지향을 지닐 수 없게 되고 우리의 행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내가 집착해 있는 곳을 향하여 내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올바로 깨닫게 되며 두려움과 의심 없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당당하게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 걱정하세요? 기도할 수 있는데…”

김영수 신부
452 29.6%
기도와 사랑이 예수님 만나는 공간

요즘같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힘든 때에 우리는 욥처럼 자기 삶의 발밑을 내려다보면 씁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렇게 나도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욥기 7,1-3). 욥이 경험했던 것처럼 인간의 삶 속에서 고통과 질병의 충격은 지금까지 확실했던 사실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던 생각들을 한순간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기에 고통과 질병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달려가든가, 아니면 그분에게서 되돌아서 버리게 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방법을 택하든 우리는 신앙의 암울한 공간에서 허덕이게 되나 이 공간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공간임을 금방 확신하게 된다.

오늘 복음의 공간, 즉 시몬의 장모를 비롯하여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이 만나는 그 곳은 관대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장소이다. 다시금 예수님의 분주한 하루 생활 안에서 전해지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를 고통스럽고도 희망이 사라져 가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게 하고, 우리의 품위를 지켜나갈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마치도 병자봉성체를 가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 주어진 소중한 생애동안 최선을 다해 사람들에게 위로와 치유됨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시며 복음을 전하신다. 또한 그 아까운 나날들 속에서 고통받는 병자들이 구원받음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신명나게 살아갔으면 하고 바라셨을 것이다.

본당에서 병자 봉성체를 가는 날이면 우리도 이러한 마음이 더욱 간절히 든다. 예수님께서 침상에 다가서서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하느님의 힘을 건네주시듯이 우리의 작은 기도가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고통받는 많은 의인들이 성체를 모시며 자기 자신 안에 하느님의 공간을 더욱더 확장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렇게 예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은 기도와 사랑의 공간이다.

길성환 신부
  | 02.07
452 29.6%
나를 따라 오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는 것을 보고 치유해주신다. 마을 사람들이 데려온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리고 외딴 곳을 찾아 기도하신다.
 
한 수도자가 있었다. 깊은 산 속 바위가 그의 집이었다. 비바람과 굶주림도 개의치 않고 오직 명상의 기쁨 속에 살았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수도에 필요한 책 한 권을 줬다. 다음 날 아침 책을 보니 쥐가 표지를 갉아 먹었다. 쥐를 쫓고자 고양이를 구했고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려고 소를 마련했다. 그것들을 혼자 돌보기 힘들어 여인을 맞아 들였고 그를 위해 집을 지었다. 귀여운 자녀도 생겼다. 더 이상 명상에 전념할 수 없었다. 책 한 권의 소유로 수도자의 삶은 달라졌다.

우주생성 수백억 년에 비하면 우리가 머물다 가는 인생 80여 년이란 순간처럼 짧은 세월이다. 그마저 대부분 슬픔과 고통으로 쌓여 있다.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겪는 고통은 불완전한 인간 속성상 자초하거나 가족, 사회공동체의 생활을 인연으로 숙명처럼 씌워지는 짐이다. 또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화의 수도자처럼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본질적인 것에서 이탈되는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 치열한 경쟁구도 안에서 겪어야 할 허무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부와 지식과 세상을 주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똑똑한 사람을 보면 불평불만을 품고 불행을 느껴 평화롭지 못하다.
 
우리는 부서지고 깨어진 인간이요 영적 육적으로 치유가 필요한 고통스러운 존재다.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희생제물인 어린양이 되셨다. 봉헌된 희생양의 삶을 사시면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몸소 겪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에게로 결집시키셨다.

욥은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을 거들떠본 적이 없는 의인이다.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 7,1??7)이라며 고통을 토로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런 욥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

욥의 고통은 예수님 십자가를 상징하는 의인의 고통으로서 대속의 의미를 뜻한다. 새로운 생명을 낳는 희생제물이며,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이고 구원의 신비로 연결된다. 죄인의 희생과 고통은 의로우신 하느님 구원계획에 대속물이 될 수 없다. 의인의 고통만이 원죄의 멍에에서 인류를 구할 봉헌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상생활에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 아픔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다. 즉 스스로 고통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을 아시므로 그 고통을 껴안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희생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신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 버린다"(요한 16,21).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통과 기쁨, 패배와 승리, 죽음과 삶이 표리관계에 있다는 완벽한 상징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예수님 십자가 고통과 함께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 그러기에 참고 견디어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우리 존재자체를 뒤 흔드는 이 고통을 봉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좌절, 우울증과 자살 등에 이르는 심각한 인격적 파탄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될 것이 아니며 반드시 하느님께 드리고 그 결과까지도 완전히 의탁해야 할 봉헌물이다. 고통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인격을 드리는 것이다. 새 생명을 낳음으로 물질적 풍요를 돕는 경제적 봉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기에 고통의 진정한 의미가 구원의 신비 안에 숨겨져 있다. 고통의 봉헌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더 큰 기쁨을 잉태한 거룩한 대속물이며 사랑이다.
 
우리는 살면서 남에게 준 고통에 대해서는 회개와 보속으로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 주어진 고통을 기도와 함께 하느님께 드리며 서로가 위로하고 도움으로써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눈물이 마르고 설사 뼈가 나와 보일 만큼 운다 해도 결국 세상은 무정한 것 그대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며 이웃의 외면을 더 고통스러워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영적, 내적 치유를 해주셨다. 우리도 이웃의 고통과 함께해야 하며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한다.

서광석 신부
  | 02.0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
!   [수도회] 사랑의 실체  [2]
!   [전주] 사랑은 우리 삶의 본질  [3]
!   [수원] 형제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  [2]
708   [대전]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  1207
707   [청주] 묵상 : 꽃이 진다고  52
706   [마산] 주님의 사랑 안에서......  [3] 1894
705   [부산]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5] 2443
704   [안동] 벗(친구)이라 부르겠다  [3] 2454
703   [대구]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2] 2400
702   [인천] 짝사랑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누가…?  [6] 2266
701   [서울]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5] 2502
700   [의정부] 주님, 당신을 사랑하러 왔습니다.  [1] 54
699   [춘천] 서로 사랑하여라  [3] 2580
698   [군종]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1] 63
697   [원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 58
696   (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3] 1804
695   [수도회] 주님과 제2의 인생을  [3] 2113
694   [전주] 더 큰 불행은 보고도 믿지 않는 것  [2] 2063
693   [청주] 토마의 불신앙  [1] 1992
692   [대전] 증거의 삶  [1] 1746
691   [의정부] 당신이 기뻐하시니 우리도 기뻐요.  [1] 1965
690   [수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 2164
689   [인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3] 2232
688   [서울]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 2296
687   [대구]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1] 2017
686   [부산]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6] 2176
685   [마산] 부활신앙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3] 2163
684   [안동] 의심과 평화  [2] 2101
683   [춘천] 차선 지키기  [2] 100
682   [원주] 남을 위해 내 몸을 쓰게 하려고  [1] 2230
681   [군종] 보이는 것에 대한 더한 믿음  [1] 66
680   자비주일과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님(상본)  [2] 2285
679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 1687
678   [수도회] 매일 새로운 얼굴, 새로운 마음으로  [3] 2035
677   [수원] 변모의 기쁨과 빛을 향하고 있는 사순 시기  [3] 2236
676   [인천]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갑시다  [6] 2095
675   [서울]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4] 2512
674   [대구] 아브라함의 시련  [2] 2271
673   [마산]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3] 2649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