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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또 다시 길을 떠나며
조회수 | 2,222
작성일 | 06.02.03
수도회 인사발령에 따라 최근 새로운 소임지로 옮겨오게 됐습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나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또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솔직히 '짠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진하게 정을 주고받았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뒤로 하고 떠나야하는데서 오는 안타까움은 정말 큰 것입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형제들, 선생님들, 후원자들, 지인들과 이별도 아쉽기만 합니다. 그간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바꾸는데서 오는 부담감 역시 큰 것입니다.

그래도 '떠남'을 통해서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지난 6년간 사목을 정리하면서 저는 다시 한 번 제 삶을 정돈할 수 있습니다. 결국 떠남의 순간은 영원한 떠남인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행위이기에 삶의 여러 순간 가운데 아주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떠남은 슬픔과 아쉬움의 순간이기보다는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자주,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며 새로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떠남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가 언제까지나 한 자리에 집착한다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제자리일 것입니다.

떠남의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보다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안주와 편리에 길들여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금 과감히 길 떠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일 작은 희생과 양보, 기쁘게 물러남, 십자가의 수용 등을 통한 일상적 떠남에도 더욱 익숙해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 역시 '길 떠나는' 구도자이자 선교사로서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어제와 결별하고, 익숙한 곳과 작별하고,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치유하셨고, 악령 들린 사람을 구해주신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순식간에 갈릴래아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안식일이 지나면서 '안식일 규정'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수많은 환자들, 악령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밤새 대대적인 치유활동이 이뤄졌습니다. 하느님 은혜가 풍성하게 내린 이 호숫가 작은 마을의 밤은 감사와 환희, 기쁨과 설렘과 함께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먼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피곤에 지친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어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 모습이 안보이자 사람들은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다들 아우성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아룁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준비가 덜 된 복음 선포자였다면, 덕이 덜 닦인 선교사였다면 우쭐하는 마음에 사람들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자신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음껏 능력발휘를 해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단호하십니다. 일어나셔서 홀연히 앞장서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카파르나움 외에도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많은 고을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들이 많았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예수님께는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모습은 오늘날 우리 모든 선교사, 복음선포자들의 모범이십니다. 자신의 인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느님 일을 하실 뿐이지 자신은 조금도 챙기지 않으십니다.

오직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들의 몸값을 치루려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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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인생, 축제인생

욥기7,1-4.6-7
1코린9,16-19.22-23
마르1,29-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인생,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Life is drudgery! Wow!“

영어 강론을 읽던 중 첫 구절 중 'drudgery' 단어의 뜻을 알 수 없어 사전을 찾았더니, '명사;(지루하고 따분한)고된 일, 싫은 일, 고역'이라 설명되어 있고 이어 문장의 뜻이 담박 환히 들어났습니다.

"인생은 고역(苦役)이다! 아!“

그대로 오늘 말씀의 분위기를 요약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삶의 체험입니다. 대부분 너무나 힘들게 살아갑니다. 삶을 즐기는 게 아니라 힘든 삶에, 노예처럼 자유를 잃고 살아갑니다.

많은 분들이 사느냐 죽느냐 생존의 문턱에서 허덕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초라하고 비루한 삶 같아, 예수님이 오셔도 연민 가득한 눈길을 보낼 것입니다. 예수님 오신지 2000년이 지났어도 현실은 여전히 힘겹기 짝이 없습니다.

"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삶은 고해(苦海)냐, 축제냐?" 묻는 다면 여러분의 답은 어느쪽이겠는지요? 믿는 이라면 삶은 선물이요 축제라 대답하겠지만 선뜻 이런 답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삶은 짐이요 고해라 함이 훨씬 현실적으로 공감이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이들로서의 분명한 결론은 '삶은 선물이요 축제다.'라는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제자들, 40여년이 지나 50대에 접어드니 선생님인 저를 찾습니다. 이 또한 인터넷, 스마트폰, 카톡 등 문명의 혜택입니다.

"선생님,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옥현이예요. 김옥현“

"툴립 표지 일기장 선물해주시고요. 넘 뵙고 싶어요.“

"선생님, 넘넘 멋지세요. 선생님 그 온화한 미소 그대로세요.“

"네, 선생님 꼭 갈께요. 눈물 나요. 얼마나 그립고 그리운 선생님 이었는데요. 친구들 잘못하면 선생님이 잘못 가르치셨다 하시며 선생님 종아리 직접 때리시고. 그때 참 마음 이팠었어요.“

"와우! 우리쌤 짱이예요. 선생님 넘 멋지신거 아녜요.ㅎㅎ. 선생님 뵐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제가 선생님 사진 밴드에 올렸더니 3.5학년 담임이었다며 난리들이 난 거예요. 뵙고 싶다고요. 선생님 인기 짱이세요. 선생님, 친구들이 선생님이 날짜 시간 정해 주면 무조건 시간 비우고 간다니까 선생님이 정해 주세요"

40년 만에 제자에게 받은 카톡내용입니다. 40년전, 20대 교사시절 순수와 열정은 하늘에 닿을 때 였었고 제 인생 가장 행복했던, 제 젊음 모두를 바쳐 가르치고 사랑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어려워도 지난 세월의 아름다웠던 추억은 여전히 살아있고 마냥 그리워지나 봅니다. 바로 이 그리움의 뿌리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옛 스승이었던 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상징하는바 하느님께 대한 원초적 그리움입니다.

사막이 사막인 것은 그 중심에 오아시스를 품고 있어서이듯, 인생이 인생인 것은 그 중심에 영원한 그리움의 샘이신 하느님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을 만날 때, 하느님을 살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막은 낙원이 되고,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이, 허무인생은 충만인생이 됩니다. 찰나의 삶은 영원한 삶이 되고,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은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으로 변합니다. 오늘은 선물인생, 축제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첫째,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해 고해인생, 허무인생입니다. 속절없이 무너지고 망가지는 인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희망, 생명, 기쁨, 행복, 힘, 모두입니다. 사막같은 뉴튼수도원에서 3개월 살다보니 하느님 희망이, 하느님 기쁨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결코 의식주의 보장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목마름, 배고픔입니다. 오늘 의인 욥의 탄식이 가슴을 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 품팔이의 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이 없이 사라져 가는구나.“

갖가지 사정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는 분들에겐 너무나 공감이 가는 실존적 체험입니다.

그러나 욥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간절한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느님 믿음의 끈을 꼭 잡고 있어야 무너지지 않고 삽니다. 하느님 믿음의 끈을 놓으면 '허무의 심연'에 떨어져 죽습니다. 욥의 눈물겨운 믿음의 시련, 믿음의 투쟁입니다. 온갖 회의중에도 결코 하느님 믿음의 끈을, 희망의 끈을 꼭 잡고 있는 믿음의 의인, 하느님의 사람 욥입니다. 살아계신 사랑의 하느님과의 만남만이 유일한 구원의 출구이자 답입니다.

둘째, 참 나를 발견하고 내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때 참 나의 발견이요 사명감 충만한 삶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 신원을, 내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평생을 살아도 자기를 모르고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자기를 모르고 살면 헛 산 인생입니다. 이보다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만나 참 나를 발견해야 참 기쁨, 참 행복, 참 평화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참 나의 발견도 실현도 불가능합니다. 예전 구도자들 역시 하느님을 찾아, 참 나를 찾아 사막에 갔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을 찾아 참 나를 찾아 수도원에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도 바로 사명감의 자각에서 기인됨을 봅니다.

"다른 이웃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하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세상에 온 이유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복음 선포에 전념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과연 나는 무엇하러 이 세상에 파견됐는지요. 자주 물어야 하는 내 삶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확신에 넘친 감동적인 고백 역시 그대로 사명감의 표출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주님을 만나 참 사명의 발견과 더불어 참 나를 발견한 바오로 사도입니다. 완전히 참 나를 살았던 바오로는 물론 우리의 존재의미는 바로 그리스도이자 복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참 나를 만납니다. 기도는 사막 인생에 오아시스입니다. 생명과 빛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고역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힘도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받습니다. 하느님과 대화의 소통이 기도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우정(友情)도 깊어지며,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성장합니다. 진정한 성장은 외적성장이 아니라 이런 내적, 영적성장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삶을 얼마나 역동적인지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진 주님이지만 참 경쾌해 보입니다. 스트레스 받기로 하면 주님보다 바오로 사도보다 스트레스 많이 받은 이는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기도의 힘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역동적 삶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외딴곳의 기도처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 영육을 충전해야 사막인생 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외딴 곳은 어디입니까? 영육이 살기위해 하루 중 머물 수 있는 나름대로 외딴곳의 장소와 시간 마련은 필수입니다.

여기 외딴 곳의 관상기도와 더불어 꼭 강조해야 할 것이 수도공동체의 외딴 곳인 성전에서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이 한 마음, 한 몸으로 바치는 영적 삶의 주식과도 같은 미사와 성무일도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아, 이렇게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고 구원하며, 공동체의 일치를 이뤄주고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줍니다. 악마들도 발붙일 자리를 잃습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바로 이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도 외딴 곳에서의 개인기도와 더불어 전통에 따라 제자들과 함께 시편 기도를 바쳤음이 분명합니다.

제 좌우명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에 이어 또 하나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사제서품 25주년 상본에 택했던 성구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좌우명이요 좌우명을 통해 나의 신원과 사명을 확인합니다. 마침내 내 삶을 요약하는 좌우명은 묘비명이 됩니다.

제가 수년 전 수도형제들의 연피정 지도때 받은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피정을 마칠 무렵 묘비명을 써서 자기 삶을 요약해 보도록 했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1,2ㄴ).

한 수도형제의 가칭 묘비명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명과 빛이 충만한 그 많은 구절들을 놔두고 이런 구절을 묘비명으로 택했으니 말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음을 반증합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습니다만 성소까지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삶은 분명 짐이 아니라 선물이요 축제입니다.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사랑 충만한 인생이요, 고해 인생이 아니라 축제 인생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 충만한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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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새순이 돋아나고 봄꽃이 피는 꽃소식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은 생명을 내포하고 생명은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의 초대는 생명의 참여로 축복과 기쁨이 됩니다. 또한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창조는 주님을 향한 신뢰로 시작됩니다. 복음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언제나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평화와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시어 당신 사랑을 나누어 주시며 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살아계신 복음을 만납니다. 복음은 살아계신 예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행복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기쁜소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일깨워 주시는 주님께서 가장 가까이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복음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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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하루생활

몇 해 전, 이맘때 쯤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피정을 했습니다. 10여 일 머무는 동안 매일같이 바라보던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자리는 흙이 많지 않았고 주변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었습니다. 피정집 주변에 많은 나무들이 있었지만 유독 그 나무에 눈이 갔던 이유는 평탄한 곳이 아닌 아주 비탈진 곳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나무의 뿌리가 밖으로 나와 주변의 바위를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무의 고단한 삶이 느껴졌습니다. ‘그래, 세찬 바람이 불면 넘어지지 않으려고 저리 했겠구나....’ 물론 다른 뿌리는 물과 양분을 찾아 땅 속으로 내려갔겠지요. 피정을 마칠 즈음, 그 나무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곤 물었습니다. ”나무야,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는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자체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나무가 당당하게 보였습니다. 삶의 경외감이 올라왔습니다. 또한 ’그래 이 땅에서 나무 한 그루가 살아가는 것도 저리 힘겹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첫째 독서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이야기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고, 고통의 밤이고,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간다.”(욥기 7,1-4.6-7) 주변을 돌아보면 아프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기도 하고, 이 사회의 모순과 잘못된 정책으로부터 나오기도 하고, 사람도 아프고 산도 아프고 바다도 아프고, 어디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곳곳에 아픔이 자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해가 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복음에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지만, 그 아픈 사람들, 몸이 아프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 그네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프고 아팠을까? 어떤 이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오랫동안 앓았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돌보는 이 없이 질긴 목숨을 외롭게 이어 갔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그 많은 치유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연민이 가는 자리입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 절망과 실의에 빠져 캄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희망으로 환한 빛으로 끌어올리는 예수님. 그러기에 예수님의 치유는 그저 몸의 질병을 낫게 하는 의료기술이 아니었음을 압니다. 그분의 치유는 상처 입은 몸과 부서진 인간성의 치유, 인간 존재의 고귀한 모습을 회복시키는 사랑과 생명의 행위였습니다.

배고픈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듯이, 아픈 이들을 보면 그분은 참지 못하시기에, 아마도 예수님은 그 많은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병을 낫게 하는 일을 늦은 밤까지 이어 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고단하셨을 텐데 좀 더 늦게까지 주무시지.... 기도를 마치시곤 다시 회당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전형적인 하루 생활을 보여 줍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시고, 낮에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아마도 오후부터 저녁, 밤늦게까지 치유하는 일에 전념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른 새벽, 예수님이 보이질 않자 제자들이 찾아 나섰고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건만, 다른 고을로 가자고, 나는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나는 이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라고. 그렇게 예수님은 매일같이 기도하고, 기쁜 소식을 아픈 몸과 마음에 불어 넣어 주고,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여정을 걸어가셨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하루 생활을 보면서 저의 하루여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른 아침 그날 복음을 읽고 나서 묵상하고 미사를 드립니다. 낮에는 주어진 사도직을 하고 잠들기 전에 의식 성찰을 합니다. 상황에 따라 저녁에 미사를 드리기도 하지만 큰 틀은 기도(미사)와 일, 성찰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 갑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그분께 대한 신뢰가 자라나고,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우리 안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납니다.

낮에는 사도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저의 체험을 나눕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종들”인 예수회원들은 “하느님의 발자국을 따르며” 각자의 사도직의 자리에서 복음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비록 약함이 있고 불안전한 인간이지만. 잠들기 전에 의식 성찰을 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 삶이 생명의 길이었는지 죽음의 길이었는지, 하느님의 뜻에 걸맞은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어긋났는지, 부족하고 죄스러운 자리에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청하고 다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잠자리에 듭니다.

하루하루가 쌓여 우리의 한 생애가 이루어지듯이 하루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성찰로 마칠 때, 우리는 좀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고, 성찰은 삶과 사고에 새로운 관점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 일하고 놀고, 공부하고, 노래하고, 놀고, 밥 먹고, 잠자고.... 그 모든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찾으며 걸어갑니다. 온전한 인간됨의 길이고, 사랑의 길이고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하루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예수회 최성영 신부 (요셉)>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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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3] 2137
697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4] 2870
696   [안동]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표징  122
695   [군종] “끝에서 만나는 은혜로운 시작”  113
694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154
693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5] 1889
692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668
691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648
690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13
689   [부산] 참된 봉헌  [5] 2453
68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25
687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692
686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379
685   [서울] 두 부류의 인간상  [6] 3063
684   [대구] 참된 봉헌  [2] 878
683   [마산] 우리 신부님은 돈 이야기만 한다?  [3] 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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