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30.8%
[춘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회수 | 2,354
작성일 | 06.02.03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욥기 7,3-4)라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욥처럼, 정신적·육체적으로 병들어 고통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많은 장애인과 환자들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남다름을 복음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를 일으켜 세우셨으며, 그 외에도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고는(마르1,34) "다른 이웃 고을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애햐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하시며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열정을 보여 주셨다. 이로 인해 성경에 등장하는 고통받는 사람들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짓누르던 병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며, 모두가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광경을 자주 접하게 된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들은 해방과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 전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한 채, 인간적인 노력과 지식만으로 해방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욕망에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사건을 기억한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명확한 사랑과 관심이 아닌, 개인의 업적과 경제적인 이득을 위한 인간의 욕심이 어떻게 흥하고 어떻게 쓰러져 가는지를 보았다. 참된 지혜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주님의 모습은 우리가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할 모범이지만, 특히나 이웃 사랑과 생명 존중의 자세 역시 주님의 그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의 영광이 아닌 이웃의 구원과 해방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 완성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이웃사랑`의 목표가 된어야 한다.

이는 서로서로의 마음을 알고 이해해 주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단순한 개념상의 이해가 아니라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더 나가아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마음도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세상을 채울 때 비로소 인간 욕심에 다른 구원에 대한 허망한 기대가 아닌, 세상과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이 주시는 참된 구원과 해방을 함께 얻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주님만이 우리 모두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다는 이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일이야 말로 신자들 모두가 마땅히해야 할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여성재 신부
450 30.8%
때가 되면...

가정 방문을 나가보면 많은 신자분들이 냉담 중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분들의 삶을 알면서도 신앙 안에 머물지 못하고 계심에 마음이 편칠 않다. 그래도 신부의 방문에 죄스러워 하시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못하심에 고개를 떨구신다. 이러한 분들에게는 오히려 사제인 내가 더 죄송스럽다. 하지만 냉담을 하면서도 당당하신 분들은 늘 하시는 말씀이 “우리 집안이 구교 집안입니다. 언젠가는 나갈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다∼ 나갑니다.” 오히려 방문한 신부를 민망하게 만들 때가 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을 찾고 나오신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늘 예수님께 한방 맞았다고 생각할 때에 신앙생활을 시작하시니 안타까울뿐이다.

집안에 수험생을 두고 있는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지금은 학업에 열중해야 하니 시험이 끝나면 그때에 신앙생활을 시키겠다고 한다. 과연 자신이 정한 그때에 아이들이 하느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연초에 본당 공동체는 새롭게 공동체를 이끌어 갈 사목위원이나 단체장들을 선발하게 된다. 이때에도 신자분들은 부여된 직책을 쉽게 거절하면서, 지금은 때가 아니기에 바쁜 것이 다 해결되면 그때 일하겠다고 하신다. 그때를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과연 그때가 자신에게 오기나 할까?

오늘 독서 말씀에서 사도 바오로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코린 9,16)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인에게 복음은 바로 삶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기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씀이다. 성경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닌 주어진 현실에서 신앙인다운 삶을 선포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예수 따름’임을 우리는 망각하고, 의무적인 신앙에 머물러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우리 신앙인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살아갈 때를 스스로 정해서는 안 된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순간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힘들다고 신앙을 포기하고, 손에 만져지는 결과가 없다고 예수님께 등을 돌리는 삶 속에서는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가 없다. 이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내가 만든 때에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그때에 우리의 삶을 투신하는 지혜를 봉헌할 수 있어야 한다. 가톨릭 신앙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예수의 삶을 살아가고, 신앙을 선포할 때는 ‘지금 여기서’”라고….

최혁순 신부
  | 02.07
450 30.8%
복음 공유할 때 세상 고통 사라져

인생은 고역

작가 이동하님은 그의 작품 ‘신의 침묵에 대한 질문’에서 현대의 고달픈 서민들의 희망 없는 삶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머리는 세금 고지서와 결재 서류와 자식 걱정으로 짓눌려 있으며 가슴은 오염된 음식을 먹고 있는 사이에 서서히 병들어 가고 만원 버스에 시달리느라고 맥이 빠진다. 생각해 보면 젊음은 고작 별장의 사진이 되어 앨범 속에 갇혔고, 이제 남은 세월이 확실히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늙고 죽어 간다는 사실뿐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모든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실직의 아픔과 취업의 어려움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존의 번뇌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해마다 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은 이 경제의 위기에서 파탄을 맞고 있으며, 들리는 소식은 모두 어두운 이야기뿐입니다. 때문에 그 옛날 구약의 욥도 인생의 고역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욥 7, 1~3).

이 같은 욥의 탄식이 어디 욥에게만 해당되는 슬픔이겠습니까? 오늘날도 세상 도처에는 욥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외로운 양로원의 노인들 눈에서, 이혼한 부부에게 버려진 아이들의 눈에서, 배고파 쓰러진 엄마의 마른 젖을 빨고 있는 아가의 눈에서, 아직 공부할 나이에 생활전선에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어린 노동자의 눈에서, 민족의 내전으로 전쟁에 뛰어든 소년병의 눈에서, 온갖 윤락가에서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어진 소녀의 눈에서, 이제 곧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시한부 인생인 환자의 눈에서 우리는 욥의 탄식과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복음의 기쁜 소식을 살지 못하는데, 교회가 전해야 하는 복음이란 무엇인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눌러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럴 때 교회에는 사도 바오로와 같은 정신으로 무장된 일꾼들을 더욱 많이 필요로 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1코린 9, 19).

희망의 복음

진정 기쁨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희망의 복음이 선포될 자리는 없는 것일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더 암울한 인류의 역사에서도 기쁜 소식은 전해졌고, 기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진정 악조건 속에서도 기쁨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의 복음을 살지 못했음을 겸허히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 희망의 길, 복음의 길이 세상 어려움을 이길 수 있고, 아직도 살아갈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도록 종의 자세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슬픔에 빠진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외쳐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찡크’는 희망의 곁에서도 그 희망을 찾지 못하고 죽어가는 현대인들의 처지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합니다. 그런데 이내 식수가 떨어지고 청년은 갈증으로 실신하여 쓰러집니다. 잠시 깨어난 청년의 눈앞에 야자수가 보였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죽게 되니까 신기루가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애써 눈을 감은 청년은 절망감에 생을 포기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소리와 물소리가 또 들려옵니다. 청년은 정말 죽게 되니 환청이 들린다 생각하고 눈을 감습니다. 이튿날 아침, 사막의 베두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오아시스가에 물을 기르러 나왔다가 입술이 타들어 죽어있는 청년을 발견합니다. 그러자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은 왜 물가에서 목말라 죽었나요?’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합니다. ‘얘야, 여기 죽어있는 이 젊은이가 바로 현대인이란다.’”

그토록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으며, 많은 안락을 누리고 있는 문명인임을 자처하면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미개인’ ‘원시인’ 취급을 하면서도 실제의 삶은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불쌍한 현대인들, 그들에게 누군가는 살아날 수 있는 오아시스가 바로 곁에 있다고 알려주는 일, 그것이 복음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오아시스의 물은 언제나 충분히 마련되어 있고, 혼자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며 나눌 때, 세상의 갈증은 사라질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 갈증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청량한 복음의 생수를 전하시던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 38).

배광하 신부
  | 02.07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수도회] 영원한 생명의 향기  [1]
!   [부산] 나는 밥이 되고 싶습니다.  [2]
694   [군종] 첫 영성체 하던 날  38
693   [의정부] 주여!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  [3] 2145
692   [춘천] '생명의 빵'먹고 '세상의 생명'되자  [3] 2457
691   [전주] 참 지혜란 무엇인가?  [1] 1827
690   [원주] 감사로 함께하는 잔치  38
689   [안동] 예수 그리스도와 깨어 있지 않으면  [3] 2182
688   [수원] 성체성사의 신비  [4] 2128
687   [서울]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3] 2456
686   [마산] 희망생활의 본질  [4] 1949
685   [대구]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2] 1892
684   [광주] 생명을 주는 빵, 살아 있는 빵  54
683   [인천] 하느님의 거룩한 밥상  [4] 2331
682   (녹) 연중 제20주일 독서와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 내 피는 참된 음료]  [3] 1439
681   [수도회] 매일 마지막 미사처럼  2058
680   [수원] 신앙으로만 알 수 있는 성체성사의 신비  [1] 2413
679   [대전] 서로에게 살아 있는 빵이 되자  [1] 1099
678   [군종]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2] 2068
677   [서울]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신비  [2] 2179
676   [인천] 예수님 안에서 나눔은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3] 2205
675   [의정부] 나의 삶이 예수님의 삶이 되도록  [3] 2409
674   [전주] 삶(신앙)의 열정  86
673   [부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4] 2416
672   [춘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난 무얼 했나”  [2] 2262
671   [안동] 생명을 주는 빵  [3] 2276
670   [마산] 성체,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하느님  [3] 2169
669   [대구] 성체는 생명과 사랑의 음식  [2] 1747
668   [광주] 펠리칸(Pelican : 혹은 사다새)이란 새  [1] 115
667   [원주] 오병이어 - 생명의 빵  [1] 2412
666   (녹) 연중 제19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4] 1524
665   [청주] 영성체를 갈망하라  42
664   [광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 먹을거리(성체)이신 예수님  1701
663   [부산] 생명의 빵  [7] 2349
662   [대전] 우유 한 사발 얻어먹던 시절 이야기  [2] 1914
661   [의정부] 손이 아니라 달을...  [3] 1668
660   [군종] 주님께 눈과 귀를 기울여야  50
659   [서울] 당신은 왜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4] 2164
658   [대구] "내가 생명의 빵이다"  [4] 1938
657   [수원] “예수님 = 생명의 양식” 깨닫고 있는가?  [5] 1891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