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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도 안에서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조회수 | 2,442
작성일 | 06.02.04
우리나라의 경제계와 사회 각 분야를 이끌어 가는 최고 경영자(CEO)들의 특징 중 하나는 하루의 일과를 아주 일찍 시작하는 ‘아침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본당의 매일미사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짐없이 나오는 교우들처럼 기도생활에 충실한 분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본당에서 사목할 때에 가정방문을 하다보면 가족들이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하는 집안은 거실이 마치 성체조배실이나 소성당처럼 성스럽게 느껴져 크게 경탄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지금 겨울방학중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는 부제서품을 앞둔 신학생 40여 명이 한 달 동안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기도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봉쇄 수도원과 같습니다. 이 한 달 피정은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1491-1556)의 ‘영신 수련(靈神 修鍊)’ 방법에 따라 매일 성경 말씀을 한 시간씩 다섯 번을 묵상하고 그 내용을 지도신부님들과 나누는 개인 피정입니다. 신학생들이 이 피정을 통하여 주님을 더 깊게 알고 사랑하고 닮아 가는 은총의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잘 짜여진 기도 수행 중 하나인 이 영신 수련에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마르 1,35). 예수님은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며 사셨지만, 늘 조용한 곳으로 피해 가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하루 일과 중에 제일 먼저 하느님 아버지와의 만날 약속 시간을 잡아놓으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보게 되는 예수님의 기도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와 통교 안에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을 재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의미와 목적,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창조 의미와 구원의 계획을 깨닫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서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특별히 기도 안에서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 병자들의 고통을 대하시는 하느님과 똑같은 마음과 시선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환자들을 치유하시고 마귀들을 추방하십니다.

의학적 인간학에서는 “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병은 결국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뿐이며, 과학적으로는 결코 남김없이 규정할 수 없는 문제”(지그문드 프로이드)라고 합니다. 심지어 “병 그 자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앓고 있는 인간에 대하여 알 뿐이다”(L. 크렐)라고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환자들의 고통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숙명처럼 짊어져야 할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로 가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요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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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사람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해 주고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사랑한다고 수백 번 고백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울 때 함께 있어 주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커다란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고통을 진정으로 알아주고 들어주지 못한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고통은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고 이해해 주기만 한다면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말끔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몬의 장모가 무슨 병인지 복음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습니다. 단순히 열병이라고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서는 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몬의 장모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요?

오늘 제1독서의 욥기의 내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나의 나날은…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삶의 고통과 좌절, 시련과 고뇌, 허무로 인해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시몬의 장모도 욥과 같은 상황일 수 있습니다. 결혼해 시댁 식구를 모시거나 관계하면서 겪는 수모, 자신을 전혀 알아주지 않고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남편, 손안에 자식이건만 때때로 자신을 무시하고 대드는 자식들, 더욱이 사위 집에 얹혀살아 눈칫밥 먹는 신세 등, 그야말로 삶의 고해를 감당하기 힘들기에 온몸에 열이 나고 무기력해지는 열병(화병)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아무 말씀없이 그저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오로지 따스한 사랑의 손길과 이해의 눈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순간 그 부인 안에 쌓여 있던 온갖 슬픔과 고통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여인을 괴롭히던 열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이제 여인은 일어나 정성스레 예수님과 그의 집에 찾아 온 손님을 맞이합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최고의 약은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은 “당신이 고통당하고 있음을 저는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고통당하는 것처럼 저에게 가슴 아픈 일은 없어요.”라는 속삭임입니다. 그러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 십니다. 나의 모든 고통, 아픔, 슬픔을 모두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나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고준석 신부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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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통보다 큰 하느님 사랑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현저히 길어졌습니다. 고치기 어려운 병도 쉽게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대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은 피할 수 없나 봅니다. 오늘 첫째 독서의 주인공은 고통 한가운데 있는 인간, 욥입니다. 그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두고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복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연달아 닥친 불행은 한순간에 이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전부 잃고, 재산도 사라지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악성 종양이 덮쳐 건강마저 잃어버립니다. 엄청난 고통에 짓눌린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라고 부르짖으며,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절망의 말을 내뱉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면 누구나 욥처럼 절규하면서 몸부림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질병과 고통 중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낫게 해주십니다. 갖가지 병을 앓는 많은 사람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호의적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묵시 21,4) 미래의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새로운 세상이 당신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편안하게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을 찾아 길을 떠나십니다.

좋은 부모 같은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인 우리가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종종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좋으신 하느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낱낱이 알 수는 없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우리가 철이 들라고 고통을 겪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처럼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타내어 멀리 떠났지만, 그 돈이 바닥나자 무진 고생을 한 끝에 아버지의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철부지가 철이 들도록 고생길로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큰 고통을 당하면 하느님께 벌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놓으신 분입니다. 설사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은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도록”(로마 8,28)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또 믿읍시다. 아울러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 곁에서 힘이 되어 줍시다.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이 된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서울대교구 손희송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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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복음 선포

욥기의 시작에서 욥은 이렇게 소개됩니다.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욥 1,1). 이런 욥에게 지속적으로 시련이 닥칩니다. 그리고 욥기는 이것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알려줍니다. 욥기는 의로운 욥이 온갖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법을 따르고 정의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 닥쳐오지만 욥은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굳건히 걷습니다. 그 안에서 욥기는 세상사의 덧없음과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그 내용을 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서 한 부분을 듣습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이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과 오로지 그분께만 희망을 둘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소개되고 체험된 하느님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지속되는 예수님의 행적은 이것을 증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데려오고 고쳐주기를 청합니다.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진 이 일들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결국 하느님의 구원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소식은 카파르나움 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전해지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선 제자들은 예수님께 마을로 돌아가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한 곳에서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더 적절해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위해 길을 떠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복음 선포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의 가장 큰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의 가장 모범적인 예를 바오로 사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마치 바오로 사도의 독백처럼 들립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복음 선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선교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을 자처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 일을 하며 선교 여행을 하던 바오로 사도에게 복음은 자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희망은 복음에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선포하는 이들입니다. 물론 복음 선포가 어떤 행동이나 말로써 신앙을 증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복음 선포는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구원을 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선교는 삶을 통해 드러나는 복음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조금씩 실천될 때,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가장 잘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것, 구원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의 첫걸음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신부>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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