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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깨끗하게 되어라
조회수 | 2,415
작성일 | 06.02.10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지금 우리는 연중시기를 보내며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제자들의 부르심, 악령추방, 그리고 예수님의 하루일과 속에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묵상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의 지상 공생활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배우고 그 감각을 풍성히 키워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통과 외로움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얼마 전, 꾸르실료 교육을 마친 한 형제가 돌아와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양심에 털이 난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야 자신의 나약함과 가식을 벗고 맑은 영혼을 볼 수 있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형제님은 어떻게 주님께서 이런 죄인을 그리 오랫동안 나 몰라라 내버려 두셨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며 울먹였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서는 나병환자의 외침이 그 형제님의 통곡소리처럼 귀에 익은 듯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잠시 나병환자의 처지와 불편함을 상상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그는 숨쉬는 시체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그를 부정한 자로 선언하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 다음 율법의 규정대로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레위13,45) 하고 짐승처럼 소리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병환자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와의 접촉을 피해 황급히 도망치고 맙니다. 그의 외침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인간사회에 대한 분노와 자기학대라는 무서운 좌절감이 느껴집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대우는 고사하고 가족들로부터도 관심과 이해를 받지 못했던 그에게는 모든 만남이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도망치지 않으시고 그를 만나 주십니다. 가엾은 마음을 지니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고 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깨끗한 손이 인간의 부정한 나병을 만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은 부정을 타지 않았고 오히려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불쌍한 처지를 향해 손을 뻗어 기다리고 계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여겼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며 간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에게는 깨끗하게 되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임했다는 표징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사람들로부터 추방당한 나병환자가 인간구실을 하게 되고 새로운 관계와 삶의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오늘 나병환자는 모든 만남이 끝난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인연이 끊어진 죽음의 문턱에서 새로운 생명과 인연을 맺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되어 세상에 뒤섞여 하느님 나라를 퍼트리기 시작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손으로 세례성사를 받아 깨끗해진 영혼들이니 그 깨끗함을 잘 간직합시다. 만약 깨끗하지 못한 세상, 깨끗하지 못한 교회 안에서 자신이 썩어 가는 줄도 모르는 나병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께 달려갑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썩고 흠집 난 삶을 거룩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맑고 깨끗한 영혼이 세상을 성화하고 하느님 나라를 앞당길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는 주님의 말씀이 한 주간 동안 여러분에게 큰 위로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 아멘.

권중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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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따뜻함

아일랜드에 유명한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드볼린 사람들” 이라는 단편 소설집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외로운 사람이 어느 날 저녁에 유명한 ‘연인들의 거리’라는 길을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 거리에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남녀들 여러 쌍이 다정스러운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눈에 드러나 보이며 자기 자신은 혼자인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자 갑자기 “자기 자신은 삶의 축제를 멀리 떠나온 이방인” 과 같은 느낌을 느끼게 되었다고 제임스 조이스는 설명 합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소외감을 표현했기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그 작가는 현대인들의 인기 짱이었다고 합니다.

소외감이란 집에 있으면서 편안한 느낌을 느낄 수 있어야 마땅한데도 그런 편안한 느낌을 느낄 수 없는 때에 느끼는 느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느낌은 일정한 정착지가 없이 늘 이동을 하면서, 어느 공동체에 자신이 소속되고 있다는 소속감도 없고, 자기의 일상생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자기 자신은 이방인과 같이 느끼는 현대 도시인들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서 기인하는 느낌입니다.

오늘날 도시인들만이 이와 같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도 자주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젊은 사람도 나름대로의 문화가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도외시를 당하게 되는 경향이 다분히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많은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세상이 자꾸만 변하기만 해서 자기네들이 자라던 그 친숙한 세계를 더 이상 느낄 수가 없게 되면서, 그 옛날의 아늑하고 좋았던 시절을 이제 영원히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어른들만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도 소외감을 느끼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현대의 문화라는 것이 오직 젊은 사람들과 생산적인 면으로만 치우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사는 우리들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삶의 외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이고 질적인 면에서는 참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외로움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따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외롭고 소외감속에 마음과 정신이 심한 병에 걸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치매에 그리고 심각한 정신병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에 우리는 나환자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세상과 자신에 소외감을 느끼는 나환자는 예수님 말씀 때문에 따뜻함을 느낍니다. 용기를 내어 따뜻함을 느낀 나환자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나환자를 측은지심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스승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과 따뜻함으로 우리게 있는 소외감을 없애 주십니다. 또한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따뜻함은 영원한 따뜻함이요 또한 우리에게는 영원한 힘이 되게 하십니다.

정희욱 대건안드레아 신부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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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스킨십(skinship)

스킨십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드러내는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스킨십은 상대방에게 오해나 불쾌감을 줄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어사전에 스킨십(skinship)을 찾아보니 스킨십은 껴안거나 접촉 기타 신체 접촉 행위로 인해 두 사람 특히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관계와 애정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즉,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드러나는 애정표현이 스킨십이 가진 본래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보여주신 스킨십이야말로 스킨십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 찾아온 나병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대시면서 고쳐주십니다.

나병이라고 하면, 지금은 치료법이 개발되어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려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엔 어떠했겠습니까! 당시 나병환자들은 공동체에서 쫓겨나서 마을 밖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게 되면 자신이 나병에 걸려 있음을 큰소리로 외쳐야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하고 나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한 자,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며 깨끗하게 고쳐주십니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시라면 말씀 한 마디로 그 사람을 낫게 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백인대장의 하인의 경우엔 그저 한 말씀으로 그 하인을 낫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칠 수 있는 분이 굳이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나병환자에게는 치료가 되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사람이 다 나아 다시 공동체에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미신 손은 사람을 사랑하는 자상한 마음과 배려가 가득한 손입니다. 단순히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고독까지도 낫게 해주신 것입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의 볼을 부비고 안아주고 볼에 뽀뽀를 하듯이 그 사람에게 손을 대신 것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기를 꺼려했던 나병환자에게 하느님의 스킨십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스킨십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사람들에게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의로 인해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에게 손을 내밀어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미는 손길을 통해 사람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정성호 세례자 요한 신부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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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나병환자의 이 하소연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하시며 병을 고쳐주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단 한번 나오는 이 이야기에는 시간, 장소, 환자의 이름도 목격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습니다. 치유된 사실 외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문둥병 뿐 아니라 온각 종류의 피부병을 다 나병이라 했답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불결하니 내 곁을 떠나시오.”라고 외치며 외롭게 살았답니다. 이와 같이 나병 환자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인간 대접 못 받고 저주받은 몸으로 한 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나환자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철저히 믿으며, 자신이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주님은 화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이와 같이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 하더라도 이 산보고 저쪽으로 가라고 해도 옮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는 말씀은 치유 이야기 끝에 거의 항상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는 힘이 바로 믿음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것이겠지요. 성경 전체의 주제는 바로 믿음과 사랑입니다. 각자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깨닫는 만큼 믿음이 더욱 진하게 자라고 끝내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예수님의 인기 관리나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의해 일어난 결과입니다. 즉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아픔과 병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상처를 그리고 아픈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고 자신을 나누어줌으로써 환자와 하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치유의 대상이 자신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을 가지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포자기 했던 자신의 열등의식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됨으로써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믿음 이야기나 창녀 이야기나 탕자의 비유 등이 모두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사람을 치유하는 힘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병환자는 주님을 철저히 믿음으로써 치유 되고 구원 받았습니다. 이는 사람들과 어울려 하나 되어 각자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하고 세상의 죄를 없이 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에 신명을 바친 예수님의 삶에 일치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 나와 이웃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부부 사이 등 모든 관계에 있어서 믿음이 있으면 생기가 돌아 늘 푸른 삶을 살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안동교구 김영필 바오로 신부>
  |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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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나병 환자의 용기

초등학생 시절 설날의 최고 관심거리는 맛있는 음식과 세뱃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설은 이렇게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즐거움을 체험하는 날이었습니다. 몇 년이 흐른 청소년 시절에는 세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배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영화를 보거나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이성 친구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흥분과 떨림의 시간이었습니다.

나이가 든 후 설은 부모님, 형제와 함께 지나온 1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살 것을 다짐하는 날이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고 상대에 대한 오해를 키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30대 이후에는 형제와 친구들 사이에서도 직장(월급)에 따른 빈부의 차이, 자녀들의 성적에 따른 시기와 박탈감을 느낍니다. 처가나 시댁에서 설을 지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가족,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치관, 정치적 노선 등에서 차이를 느끼고 결국 다름을 확인합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서로 등을 돌리고 ‘다음 설부터는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치유를 통하여 참다운 인간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보다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나병 환자’에 집중해보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1960년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꿀꿀이죽(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잔반)을 먹고, 종교 단체에서 배급해주는 음식으로 연명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가장 무서웠던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나병 환자와 전쟁 중 다쳐 장애인이 된 상이용사들이었습니다.

동네에 나병 환자가 나타나면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이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걸어 잠그고 개를 풀어 놓습니다. 나병 환자를 본 개가 짖으면 동네 모든 개가 자지러지게 짖어대면서 삽시간에 동네는 공포 분위기로 바뀝니다. 모든 동네 사람이 숨어서 나병 환자가 동네를 떠날 때까지 감시합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가장 외면을 당한 이들이 바로 나병 환자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어땠을까요?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차별과 냉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나병 환자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추방당해 외롭고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나타난 나병 환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죽어도 좋다는 용기를 갖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 냉대와 모욕 그리고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비웃음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런 용기와 의지 덕분에 아마도 예수님의 자비를 받게 됐을 것입니다. 그의 열정과 신념이 그를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시켰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참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모든 치욕과 어려움을 극복한 이들 말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영웅인 넬슨 만델라(1918~2013)가 그랬습니다. 그는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에게 침을 뱉고 고문하면서 온갖 치욕을 줬던 백인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힘을 모아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고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만델라는 ‘용서와 화해’를 통해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치욕을 극복한, 사마천(司馬遷)이라는 열정적인 인물을 생각해 봅니다. 「사기」의 저자인 그는 아버지 사마염과 같은 태사령 관직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유언인 ‘중국 역사에 대한 기술’을 다짐합니다. 47세 때 흉노와 전쟁에서 패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에게 노여움을 사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엄청난 벌금, 궁형(宮刑, 거세를 하는 형벌)을 받아들여 치욕을 당하면서까지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사마천은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궁형(宮刑)에 대한 견해를 밝힙니다.

“군자에게 이(利)를 탐내는 것보다 더 참혹한 화(禍)는 없으며,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슬픔은 없고, 선영(先塋)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약속과 군자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세상 사람들에게 당하는 치욕을 극복하고 후손들에게 훌륭한 선물(「사기」)을 전해줬습니다.

이번 설에는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한 나병 환자처럼 용기와 열정을 가집시다. 서로에 대한 존경을 통해 진정한 축제, 예수님과 함께하는 잔칫날이 되길 바랍니다.

<안동교구 박재식 신부>
  |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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