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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수님의 전도행적과 메시아의 비밀
조회수 | 2,147
작성일 | 06.02.10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이 치유 이야기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로 나병은 육체를 기형적으로 바꾸고 잠재적으로 전염성을 갖기 때문에 무서운 공포를 주는 병이다.

제1독서: 레위 13,1-2.44-46: 나병환자에 대한 규정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병은 가장 고통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병이었다. 제1독서에도 나오지만 나병에 걸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아무에게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45-46절). 이 규정들은 그냥 말만으로 혹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으로 현실에 있어서는 더 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 병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병환자들은 항상 도시 바깥에서 살았고, 아무도 만날 수 없게 된 그 순간부터는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J. Flabius, Ahtichita giudaiche, III, 11,3). 즉 떠돌아다니는 시체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저주받은 자들로 여겨졌다.

복음: 마르 1,40-45: 그는 나병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나병환자의 간청을 듣고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버림받은 인간에 대해 가지신 연민과 느끼신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측은히 여기셨다"(41절)는 말씀의 연민은 바로 '뱃속까지' 자극시키는 고통의 의미이다. 또한 그 고통은 그 나병환자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손을 뻗쳐' 그 나병환자에게 '갖다 대심'(41절)으로써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지만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된다.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그를 온통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치유의 기적을 이룬다. 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체험 때문에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널리 선전하여 퍼뜨리고 있다(45절).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고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44절) 레위기의 규정대로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데 대한 감사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복음에는 그가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감사의 예물을 바쳤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감사의 표현은 말로써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먼저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겠고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참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될 수 있다.

"그를 보내시며 엄하게 이르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43-44절).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이 병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까지는 또 다른 검증과정을 통해 또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 기억은 예수님께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나환자를 통하여 장차 당신에게 닥칠 '야훼의 고통 받는 종', 즉 나병환자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이사 53,3-4)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될 운명을 예견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불결과 깨끗함을 가리는 논쟁에만 힘을 소비하며,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로 이끌어갈 구실을 마련하려고 하여 당신이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내적인 아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손을 갖다 대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다른 행위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 기적인 완전한 것이 될 수 있으려면, 인간 사이의 혹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경계가 모두 극복되어 한 형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마르코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습을 무너뜨리려 하는지를 이렇게 묻고 있다. 그래서 초기교회는 "나병환자들과 더불어 걷고 주막에서 잡수시는 주 예수님"(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 64)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 예수께 그 기적 후에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지만 그분은 백성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또 한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지금의 모든 가르침은 오로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충만하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때문에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다. 즉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전도사명이 자칫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니즘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자칫 현세적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기복적인 신앙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나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제2독서: 1고린 10,31-11,1: 나를 본받으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제와 희생이 요구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나도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구하여 결국 그들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10,31-11,1). 이것을 나병환자의 치유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평범한 생활 테두리를 넘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기는 경우에도 기꺼이 수락하면서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펴 나가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도움을 간절히 청했던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치유해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고 모든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초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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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저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지난해에 본당의 어르신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다 같이 기념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연령회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게 마지막 사진이 될지 모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촬영에 임하십시오.” 그리고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는 지금, 회장님의 말씀대로 몇몇 분은 그 사진을 통해서만 기억할 수 있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 왠지 모르게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과 동시에 또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온갖 삶의 유혹을 뿌리치게하는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님이 사제관을 찾아오셨습니다. 참 착한 분이시고,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실함을 잃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이 그날따라 저에게 소주 한잔 달라고 하시더니 제 앞에서 흐느껴 우셨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존재하십니까? 제가 그렇게 열심히 당신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는데, 왜 이런 불행을 주십니까?” 저는 그분의 울부짖음에 할 말을 잊어버리고 그저 손을 꼭 잡아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였을까요? 갑자기 형제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담뱃갑을 찢으시더니 이런 말을 쓰셨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저 세상을 위해서입니다(끼아라 루빅).” 그리고는 저에게 자신의 신념의 징표로 이 글귀를 보관해 달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대로 저는 아직도 그 담뱃갑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믿음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분 역시 그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당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재 열심히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베르나노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다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 속의 나병환자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생각하며 하느님을 원망만하고 살았다면 결코 그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좌절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었기 때문에 은총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삶의 고통이라는 굴레가 언제, 어느 때 닥치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나병환자를 잊지 않으셨던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저 세상을 지향하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우리들의 모습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김대영(베드로) 신부
  |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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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복음에 나오는 깨끗하게 된 나병 환자처럼, ‘나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있었나’하고 생각해 보면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그다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특별히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한 것도 없었고, 원만하고 평온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적 같은 일이 있었나?’하고 돌아보니 모두 사소한 것들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시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돌려보내시며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하고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난날 나병 환자였던 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마땅히 그에 합당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는 발설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를 받은 그는 감사를 드리기보다는 자신의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퍼뜨립니다. 지난날의 그 비참했던 기억들은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보다 깨끗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에게 지난날의 기억은 이미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에서 나병 환자의 첫 마디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깨끗하게 해 주고 계십니다.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의 치유가 기적이었듯,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사는 것, 밤에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 어디를 가도 함께 모여 웃고 지낼 사람이 있다는 것 등, 지금 현재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주님께서 주신 ‘기적’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 “이미 받은 기적”과 “이미 받은 은혜”,“이미 받은 행복” 때문에 주님께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겨 은혜로움을 깨닫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기적같은 일들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친 수많은 은혜로움이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나병 환자의 첫 마음에서 나온 기도처럼 우리도 늘 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한주간을 시작합시다.

이정훈(요셉) 신부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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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가엾은 마음

예전에 어린이 미사 강론을 할 때 아이들이 욕을 하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가 욕을 하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입에서 뱀, 구더기, 지네, 송충이 이런 것들이 막 나온단다.” 그랬더니 유치부 아이들이 눈이 똥그래지면서 입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한껏 멋을 부린 아름다운 사람의 입에서 징그러운 벌레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아마도 좀비 영화가 따로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더럽고 추한 것이 그 벌레들일까요? 보이지 않는다고 마구 쏟아내는 욕설과 비방이 훨씬 더 더럽고 추할 것입니다. 벌레는 피하면 그만이지만 한번들은 욕설과 비방은 비수가 되어 마음에 상처를 주고 듣는 이를 힘겹게 만듭니다. 그러니 벌레보다 더 나쁜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합니다. 특히 육신의 건강과 생명에 해가되는 것에는 아주 민감합니다. 그중에서도 즉시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독을 지닌 벌레나 전염을 유발하는 질병을 지닌 동물이나 사람들은 격리를 통해 접근을 차단합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예방하는 당연한 조치입니다. 구제역, 조류독감, 에볼라 바이러스 등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아무리 과학과 의술이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다가와서 도움을 요청하면 어찌할까요? 기겁하고 도망가거나, ‘저리 가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욕설을 퍼부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생명과 안전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안전을 확보한 다음에 이성적 판단을 시도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나병환자가 다가와 도움을 청하자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치유해 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물론 예수님이시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저 같으면 어림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는 싶습니다. 나병환자를 가엾게 여기고 그를 깨끗하게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처럼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면서 직접 치유를 베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를 가엾게 여기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방법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 그런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적어도 저리 가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입에서 온갖 독충을 내뱉는 이기적인 마음만은
아니고 싶습니다.

<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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