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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
조회수 | 2,192
작성일 | 06.02.10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 환자 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서가 소중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의 믿음과 그분이 믿고 계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고, 그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외아드님이 알려 주셨다”(1,18). 같은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14,9).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를 고쳐주십니다. 나병은 예나 오늘이나 법정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격리시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록도를 비롯하여 안양 라자로 마을 등 여러 시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격리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그들을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격리하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병에 대한 진단도 과학적이 아니어서 피부가 불결하면 나병환자로 취급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도 나병 환자는 마을에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불결! 불결!”하며 외쳐서 사람이 자기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사이 말로 하면 방역당국의 확인을 거쳐서 격리조치에서 해방되고, 공민권을 되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환자는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그 수속 절차를 밟지도 않고 떠들고 다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다니지 못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임의로 격리에서 해제하여 그 시대의 관행을 무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최근까지도 나병은 불치의 끔찍한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렸던 한국의 시인 한하운은 그 끔찍함을 자기 시집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준다.” 인류역사는 이 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 불렀습니다. 같은 시인은 그 말이 어처구니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이 끔찍한 불행 앞에서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세상에 있는지 묻습니다.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어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이 준 벌, 곧 천형(天刑)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 예수님이 남기신 비유들 안에도 하느님은 언제나 선하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셨다고 회상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셔서 예수님도 그 아버지의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 장애와 그런 병고가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지닌 경우가 있고, 원인이 설명되지 않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들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혹은 젊은 나이에 죽어 가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선의의 사람들이 짓밟히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반면,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높은 지위와 재물을 누리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 한 사람이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크게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들을 우리는 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죽도록 노력을 해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의 원인을 모릅니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이런 불가사의한 일에 합리적 해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 들렸다는 사람들에서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모두가 기피하는 나병을 고쳐서 그 환자를 사회에 복귀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도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으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마르 3,4)을 하며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돌아온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그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셨고,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에게는 고통이 없고 행복만 있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우리의 합리성에서 생각하면 완전하신 하느님에게는 고통이 없어야 합니다. 치통만 조금 있어도 우리는 불행합니다. 우리의 상식에 고통과 행복은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고통과 기쁨은 동시에 함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를 때 우리는 불행하지만 않습니다. ‘네가 나의 모든 것이다’고 말하면서 자기 삶의 일부를 바치며 겪는 고통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사랑은 고통 중에서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요한의 첫째 편지(4,8)는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 안에 침묵으로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고통당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면서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죽어 가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그대들은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시오”(루가 17,10).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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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유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나환우의 치유 사건은 몸이 깨끗해진 나환우가 봉헌의 삶이 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봉헌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는 몸도 깨끗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나환우 자신의 마음이 먼저 깨끗해짐으로써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마음이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대학 다닐 때 나환우 정착 마을에 가서 방학 생활 20일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생활 중에 기억에 떠오르는 시간이 있습니다.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아침 식사에 올라 온 돼지고기, 계란, 밥, 국, 반찬 등이 푸짐한 정도를 넘어서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점심, 저녁식사 또한 말할 것도 없이 먹고 마시는 음식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신학생 2명이 잘 먹고 잘 지내게 해 주려는 나환우 어르신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습임을 잘 알지요. 외모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마음 씀씀이가 배여 나오는 것임을 말입니다. 저희들도 그 분들의 정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으려고 다 먹었는데, 저희는 몸무게를 엄청 늘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나환우 어르신들의 마음 씀씀이와 정성을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외모에 따라서 선입견과 여러 가지 판단이 오고 가는 생활에 물들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의 시각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이 깨끗한 지 더러운 지에 대해 판단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 많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지 더러운 지를 알 수 있는 길도 있지만, 잘 느끼고 보지 못할 경우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부분에 대해 느껴 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몸이 오그라들고 문드러져 있다고 해서 마음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몸은 멀쩡해도 마음이 오그라들고 문드러져 있는 경우도 의외로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펴지고 깨끗해지는 작업이 우선임을 상기하는 것이 치유의 출발이라는 것을 기억시키는 것이 오늘 복음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치유 사건으로 바로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치유가 되면, 그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와 선행 실천이 신앙생활 안에서 이루어져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나와 너, 우리 모두에게 널리 물들 수 있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윤희동(바울리노)신부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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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과 치유 받은 나병 환자의 대화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인간의 근본적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몸서리치는 상황을 살아가는 처지에서도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지도 못하며 고작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한 발 물러, 당신의 뜻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고백하는 인간의 품새가 수채화처럼 곱습니다. 아울러 그 가냘픈 청을 고스란히 받아 “하고자 하니”라고 화답해 주시는 주님의 연민에 가슴이 젖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주님의 당부를 어길 수밖에 없었던 나병 환자의 감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치유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린 일이 그분의 길에 걸림이 되었다는 점이 의아합니다. 과연 그분 사랑을 체험한 감동과 감격을 ‘어쩌란 것인지’ 여쭙게 됩니다. 이 기쁨을 왜 숨겨야하는지, 묻게 됩니다.

한국에는 많은 종교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전 세계의 종교계가 주목하고 부러워합니다. 이처럼 많은 종교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을 보면 상대를 존중하는 민족성을 알 것 같다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종교학자들의 분석은 판이합니다. 한국 땅에 많은 종교가 수용되는 까닭은 어떤 종교든 한국에 뿌리 내리면 여지없이 ‘기복신앙’으로 둔갑을 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믿음은 곧 복 받는’ 것으로 변질된 현상이라는 분석입니다.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은 삶의 고통을 없애주는 비결이 아니며 고난을 면제받는 도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이한 현상에 마음이 쏠려서 이적과 기적에 솔깃하여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그분께서 일하지 못하도록 그분의 손발을 꽁꽁 묶는 행태입니다. 그분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못난 짓입니다. 기적이 그분 복음의 전부였다면 그분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온 세상을 개벽시키셨을 것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세상의 고통과 고난이 믿음과 사랑의 걸림돌이라면 깡그리 없애실 수 있었다는 걸 진정 모르십니까? 구일기도를 하면 “무슨 소원이든 다 이루어진다”느니 어느 성지의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며 쫓아다니는 맹신이야말로 그분의 진리를 얼룩지게 합니다. 이렇게 오늘도 그분은 “외딴 곳”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극구 ‘잘못 되고’ ‘오도된’ 주님의 뜻임을 선명히 밝힌 곳에, 쉬쉬대며 쫓아가는 음험한 작태가 어찌 빛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지요? ‘낫더라’고 ‘들어 주더라’며 웅성대니 어찌 잡신을 섬기는 미신행위가 아닐지요. 뭔 냄새가 난다고 코를 킁킁대며 성모님을 귀신 취급하니, 망발입니다. 성모상에서 피눈물을 보겠다고 교회의 명령에 순명치 않는 것마저 마치 선택받고 박해 받는 믿음인양 떠벌리는 일, 중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나 같은 죄인’이 그분의 은총으로 구원된 사실입니다. 놀랍고 기이한 은총으로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승격된 사건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무수한 허물을 지닌 내가 그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도구로 변화된 일이 기적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만 사제에게” 가서 속죄 예식을 거행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많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와 사제에게 부여하신 권위에 복종할 것을 명하신 것이라 헤아립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행위가 그분의 뜻을 가로막고 태클을 걸 수 있습니다. 그분의 움직임을 불편하고 옹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몸소 세우신 교회의 가르침을 묵살하고 무시하는 헛된 행위를 꼼꼼히 살펴야 할 이유입니다. 이 때문에 그분의 자녀는 복음만 자랑합니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별 수 없는 존재’가 변화되어 살게 된 일만을 증거합니다. 땅의 것에 얽매여 ‘낫고’ ‘얻고’ ‘되고’ ‘이루는’ 차원을 넘어 ‘변화된 나’의 행복을 기쁘게 누립니다. 참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분께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겸손된 기도를 올립니다. 이렇게 ‘말씀과 은총으로 변화된 나의 삶’으로 기적의 증인이 된 일만으로 충분히 감격하며 살아갑니다.

장재봉 신부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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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의 손과 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때때로 차별이나 소외를 당해보셨을 것입니다. 이때 느끼는 소외감이나 차별감의 결과로, 작게는 불쾌감에서 끝나지만 크게는 살인이나 자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의 수단화, 왕따 문제, 학력 차별, 이익만을 따지는 모습 등 다양한 인간 소외의 모습들이 사회 문제로 드러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진정한 치유를 통해 소외를 복원시켜주시고 화합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보여 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레위기에서는 정결례 법에 관한 내용으로 나병환자들이 부정한 자로 낙인찍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이러한 격리는 단순히 따로 떼어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자체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는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철저하게 공동체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으로, 더 아프고 슬픈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가장 버림받고, 말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나병 환자를 한순간에 고쳐주시고 사회로 복귀시켜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병의 치유를 넘어 고립되어 살아야 하는 소외를 복원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치유의 과정에서 나병 환자가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예수님만이 이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다는 진정한 믿음의 고백과 자신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청하는 완전한 내어 맡김을 통해 치유의 문이 열림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은총과 치유를 청하는 것이 단지 나의 발전과 행복을 얻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이루어 주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과 치유는 ‘우리 모두를 하나도 잃지 않고 아버지의 나라로 초대하시려는’ 당신의 측은지심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그날까지 그분은 손과 발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손과 발을 필요로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매서운 바람이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이지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믿음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따뜻이 안아주십시오. 혹시라도 주위에 아프신 분이 생각나시면 꼭 한번 찾아볼 수 있는 한 주 되십시오.

장훈철 바오로 신부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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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새해를 맞은 교회는 계속해서 마르코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역시 하느님의 모든 권능과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고칠수 없었던 나병 등과 같은 전염병들은 모두가 죄의 결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고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그 나병 환자에게 지체하지 않고 바로 측은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 일을 통해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제1독서 레위기에서 병이든 자를 사제에게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 것과 같이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제에게 가서 자신이 깨끗해진 것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마태오 복음 5장 17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 완성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따르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이 깨끗이 치유된 환자에게 다만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 것을 단단히 이르십니다. 이것은 당시 많은 유다인들이 믿고 있었던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단지 유다인들만을 위한 메시아였고,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하는 그런 현세적인 왕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행하신 치유나 기적들이 이런 잘못된 이해 속에 놓이지 않도록 엄중히 이르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루카 복음 2장에 나타난 시메온의 노래에서처럼 만민에게 마련하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러 오신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혼의 구원엔 무관심하며,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과 안위만이 해결되는 나라로 잘못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인 코린토 1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할 것을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 생각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에 우리 안에서 행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부산교구 한인규 신부>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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