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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치유를 청하고자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의 용기와 믿음입니다.
조회수 | 2,406
작성일 | 06.02.10
정초에 오는 첫 절기인 입춘이 지났고, 오늘이 정월 대보름날이니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삶 속에도 봄기운처럼 따뜻한 사랑의 기운이 보름달처럼 차오르기를 빌어봅니다. 복음은 얼어붙은 세상에 따뜻한 봄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고 마른 가지에 새 생명을 틔우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도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갔던 나병환자의 치유이야기를 통해 당신께 다가온 사람을 온전히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치유의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이의 태도와 예수님의 반응은 온전한 치유의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묵상하게 합니다.

치유의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치유를 청하고자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의 용기와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된 나병환자가 예수님과 그 일행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이 나병환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님께 나아갔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당신께서 하고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무릎을 꿇음은 겸손한 자로서 하느님께 대한 경배를 표할 뿐 아니라 삶에 대한 경의, 이웃에 대한 존중, 자기 자신에 대한 겸허의 자세입니다. 그는 이 무릎 꿇는 행위 안에서 자신 안에 얼룩진 마음과 영혼의 상처를 바라 볼 수 있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부정과 자기소외의 어둠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결정하고 주님께서 이루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 질것을 믿는 간절한 신앙으로 주님께 의탁하는 일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나병환자의 이 믿음이 결국 버림받은 인생을 살리는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 청하는 나병환자의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불러일으켰고 예수님은 주검과도 같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춥고도 긴 겨울에도 세상은 봄을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힘겹고 혹독한 시련의 겨울일 지라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손길을 청하면 우리의 삶 속에도 선한 사랑의 기운이 가득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 마을 복숭아꽃 가지마다 맺히는 봄’(玉洞桃花萬樹春)

김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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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이들

중학교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잔소리를 줄이려 무던히도 노력합니다. ‘중학생’하면 떠오르는 순수하고 청순한 이미지가 아닌 버릇없고 메마른 아이들을 보며 많이 아팠습니다. 꿈도 없이 돈 많이 버는 직업만을 희망하는 많은 아이들을 보며 무섭고 정 떨어져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들을 만든 세상과 어른들에게 더한 무서움을 가지게 됩니다.

물신의 노예가 되어 참된 행복과 평화를 잃어버리고 자녀들에게까지도 자신들의 불행과 집착을 유산으로 남기는 미련한 세상과 어른들이 안쓰럽습니다. 진짜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학과목과 진도에 구애가 없는 저는 잔소리와 같은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세상이 진리라고 말하는 겉의 화려함과는 아주 다른 영화와 다큐도 보며 아이들의 진짜 마음이 드러나도록 유도해봅니다. 아이들에게 먼저 “사랑한다” 말하고 안아주고 쓰다듬으며 친구라 부르며 살고 있습니다. 조금씩 아이들의 진짜 마음이 보입니다. 아무리 겉모습을 강하게 꾸며도 여리디 여린 순수함과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아이들. 사고치고 버릇없고 어른들과 학교의 판단에 지독한 문제아라는 친구들도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아이다운 순수함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이쁘게 보입니다. 내 마음대로 그들을 바꾸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큰 숙제입니다.^^)

부정한 사람을 양성하는 부정한 세상의 부정한 어른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나병에 걸린 이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으로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의해 깨끗해 질 수 있는 믿음의 우리가 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쌓고 움켜쥐는 것이 아닌 비우고 풀어내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먼저 살고 아이들에게 보임으로써 더 이상의 부정을 키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따라 무엇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무엇일까요?

양승욱 신부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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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권위'를 격상시키려면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자신을 고쳐 달라고 애원한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깨끗하게 되라"고 말씀하시니 환자는 나병이 사라지고 깨끗이 치유된다.

나병은 정신질환이나 일반적 질병과는 달리 그 사람 본래 모습과 다른 외형적 변화를 가져온다. 사람들 대부분 그런 나병환자를 피하거나 차별해 처우한다. 그러나 이것은 외모를 보고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미성숙한 태도이다. 인간의 존엄한 가치는 외면보다는 내면에 있고, 그 겉모양이 어떻든 무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심은 당신 피조물에게 사랑을 표시하심과 아울러 권위를 보여주신 것이다.

권위는 라틴어로 '만든 자', '저작자', 또는 '창조자'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창조자들은 혼신을 다해 작품을 만든다. 작품에 대한 애정과 사랑 역시 깊다. 이들의 창작하는 달란트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작품에 대해 가지는 애정 또한 창조주 하느님이 당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단테는 예술가를 '하느님의 조카'라고 칭하기도 했다.
 
바다에서 살던 새 한 마리가 성 밖에 날아와 앉았다. 이런 새를 처음 본 왕은 그것을 신조(神鳥)라고 생각했다. 신하를 시켜 잡아와 사당을 지어 새를 모셨다. 왕은 그 새를 위해 매일같이 사람들을 불렀다. 요란하게 풍악을 울리며 진수성찬을 차려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왕의 호의에 새는 오히려 겁을 먹었다. 갈수록 두려움에 떨던 새는 온종일 고기 한 점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며칠 후 죽었다.

이 이야기에서 세상의 권력자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한 예를 볼 수 있다. 현세적 권위는 권력자의 주관적 의도가 우월시 되고 그 대상인 객체의 고유한 특성이 배려되지 않는다. 왕이 새를 사당에 모신 것은 생태에 맞게 잘 기른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원의대로 다루며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이다.

예화에서 왕은 주위 사람들 의견이나 판단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권력을 독단적으로 행사한 세상 권위자의 전형적 모델이다. 천차만별인 피조물을 그 각자의 본질과 특성에 맞게 고유한 방법으로 보살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권위와는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권력은 남을 지배하여 강제로 복종시키는 힘이지만 권위는 어떤 분야에 뛰어남을 보여 남이 스스로 신뢰하며 복종하게 만드는 힘이다. 즉, 권위는 힘을 행사하는 사람의 인품 또는 품위라면 권력은 힘의 강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 사랑에 배치되는 권력에 대해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5)고 말씀하시며 배척하신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라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당신 곁으로 부르시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4-35)고 하셨다.

사람을 진심으로 섬긴다는 것은 관용과 배려,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 고유한 권위인 사랑이다. 또 창조주의 자리인 옥좌를 비우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인간 삶의 자리로 옮기신 예수님 강생 신비다. 즉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은 그분의 최고 권위를 극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우리 각자는 가정과 사회, 신앙 공동체 어느 분야에 소속돼 주어진 소임과 그것에 상응하는 권위를 가지고 생활한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작품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충실한 종이 주인을 섬기듯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내어 주셨다.

우리도 서로 배려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려 노력하여 그리스도인의 품위, 곧 권위를 격상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서광석 신부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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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고통 없이,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많지 않습니다. 누구나 어려움과 고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어려움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일상의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언제나 기쁨과 감사를 드리며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품위를 잃고 매일을 불평과 불만 속에 원망과 저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에 의미를 더할 수도 있고,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고통은 우리 삶의 내용이지 피해야 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받아들이고, 안고 살아갈 때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우리를 되돌아보고 뉘우치게 하기도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체험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본래의 인간으로, 순수한 자기로 돌아가도록 해 줍니다. 욕망과 위선에 사로잡혀 진정한 내 삶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항상 소외와 한숨 속에 그리고 분노와 불만 속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애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더러운 사람으로 취급당하여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입술도 가리고 길을 갈 때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하고 외치고 다녀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병환자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 그리고 좌절감이 심각하였기에 그들은 살아있었지만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를 예수님께서는 내쫓지 않으시고 그를 동정심과 함께 이해하면서 그의 고통과 비참에 동참하시어 그에게 손을 대어 고쳐 주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인간은 죽음과 고통을 통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깨닫고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와 같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애원할 때 예수님의 치유를 받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삶의 태도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삶을 절망과 저주로서가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 안에서도 자신을 헤아리고, 진정한 자기로 거듭나는 순수하고 진실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충실히 고백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살아갈 때,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 전주교구 강명구 요한 보스코 신부
  |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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