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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조회수 | 2,270
작성일 | 06.02.10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의 모든 기쁨과 희망의 원천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믿고 있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한센병이라고 불리는 나병은 환자 자신에게 고통스럽고 참혹한 병이면서 동시에 사회와 격리시키고 대인관계도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병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구약시대에 사제는 나병환자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선언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 상태에서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치며 다녀야 했고 “혼자”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가 감당해야 했던 것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상황 또한 감당해야 했던 나병환자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모든 희망을 걸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은 너무도 명료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사랑으로 나병환자를 어루만져 위로하시고 그의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젊음을 꽃피우는 시절도 있고, 젊음의 색깔이 바래져가는 시절도 있습니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잃지 않고 간직하며 살아가는 희망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낮추며 십자가를 통해 깊은 상처와 아픔을 위로받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다른 이들에게 풍기는 악취도 아랑곳 하지 않고 부끄러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드러내고 희망을 얻고자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면서도 그 소중함을 예수님께 찾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정한 희망과 진정한 자유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병은 무서운 병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겉은 반듯해 보이면서도 속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모습일 것입니다. 자신의 겉모습 뿐만 아니라 속마음까지도 사랑과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지시고 치유해 주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 모두를 당신의 생명으로 깨끗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김용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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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행위는 율법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는 파격적인 행위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당시 나병은 중죄에 대한 엄벌이라고 생각했고, 나병환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큰 죄인들로 생각되었습니다. 이처럼 나병환자들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은 불결하고 불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도의상 불결한 사람들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회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나병환자와 접촉을 했다면, 그는 그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을 행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이 현실주의자였더라면 나병환자들을 동정하여 치유해주시되 멀찍이 떨어져서 말씀으로 치유해 주시거나, 아니면 앞으로 복음 선포의 지속적 활동을 위해 접촉을 삼가셨을 것입니다. 사회적 관습이란, 어느 한 사람이 이에 도전하여 바꾸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와의 만남을 위해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심으로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당대인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 때문에 그분 자신은 당대 사회의 유력한 집단으로부터 도의적 나병환자로 취급되었지만 이를 두려워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문둥병자들처럼 사회로부터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며 소외당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성격이나 정신적인 장애로 인하여, 육체적 부자유와 질병으로 인하여, 윤리 도덕적인 가치관의 차이로 인하여 소외당하고 배척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꺼려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들의 기적적 치유나 궁극적으로 그들과의 화합과 일치를 바라지만, 그들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고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용하지는 못합니다. 늘 기적을 청하지만, 그 기적을 위하여 자신이 희생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불목과 분열을 다시 화해시키고 일치시키기 위한 해결책을 오늘 복음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 해답인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조처를 취한다면 버림받은 자들을 구제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재현 프란치스코 신부
  |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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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바라봄’과 ‘돌봄’ 가운데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병 환자가 있습니다. 스스로 나병을 뒤집어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병 환자는 자신의 탓 없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치며 공동체 밖에서 죽은 듯 살아야 합니다(레위 13,45-46 참조). 어느 누구보다도 돌봄이 필요하지만,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나병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서서히 잊히며 죽음을 향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제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살갗에 생긴 병을 살펴보고 공동체에서 격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누군가 다 나았다고 찾아오면, 다시 살펴보고 공동체에 받아들일 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그저 율법에 충실하게 나병 환자 를 바라볼 뿐입니다(레위기 13장 참조).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만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뭇사람들은 스치는 눈빛조차 거두었던 나병 환자의 뭉크러진 몸을 정성껏 어루만지십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바는 한 사람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을 씻어내고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모습을 닮은 한 사람 한 사람 을 죽음의 늪에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한 치의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율법 준수보다 생명 살림을 선택하십니다.

피붙이가 바다에 가라앉는 것을 피눈물 삼키며 지켜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신(物神)의 제단에 제 물이 되어 하루아침에 일터를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송 두리째 짓밟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가운 시선과 험악한 비난을 온 몸으로 맞으며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사람다운 삶을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더러 운 돈과 불의한 권력에 오염된 세상이 덮어씌운 몸의 일 부분이 아니라 온 삶이 파괴당하는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구약의 사제’가 될 것인지, ‘제2의 예수’가 될 것인지 피할 수 없는 선택을 맞닥뜨립니다.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 볼 것인지, 아니면 곱게 품에 안고 돌볼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벗님들, 예수 그리스도 의 참 제자가 되고자 오늘도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딛으실 사랑하는 벗님들, 과연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중간 은 없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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