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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조회수 | 2,006
작성일 | 06.02.10
어릴 때부터 피부가 몹시 약했던 저는 여러 가지 피부병으로 엄청 고생을 해봐서 피부병이 얼마나 괴로운 병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의 말 못할 고통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질환이 됐는데, '옴'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직도 단체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심심치 않게 발병해서 사람들을 괴롭히곤 하지요. 증상이 진행되면 정말 참기가 어렵습니다. 전염성은 또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언젠가 제가 옴과 유사한 피부병에 걸려 죽을 고초를 겪었습니다. 지독한 가려움증을 이기지 못했던 저는 자는 동안 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엄청 긁어버려서, 그 다음날은 손을 침대에 묶고 잔 기억도 납니다. 너무나 간지러워서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가려움을 참기가 너무 힘들어 'PM'이란 강력한 무좀약을 상처부위에 발라봤지요. '이걸 바르면 좀 따갑겠지만 아마 빨리 나을거야'하는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웬걸, 너무나 쓰라렸던 저는 펄쩍 뛰다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기까지 했습니다.

피부병 중에 별것도 아닌 옴이 이렇게 지독한데, 나병은 얼마나 사람을 괴롭혔겠습니까? 나병은 옴과는 차원이 다른 병입니다. 옴이야 어느 정도 고생하고 꾸준히 치료를 하면 원상복귀 된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은 특효약이 전혀 없던 불치병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나병에 걸렸다하면 그날로 '인생 종치는' 날로 여겼습니다. 일단 나병에 걸리면 특별한 치료약이 없었기에 즉시 사회로부터 격리됐습니다. 말이 격리지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이었습니다.

나병으로 인한 괴로움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병환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나병을 천형(天刑)으로 여겼습니다.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대가로 나병을 얻게 됐다는 인식, 나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벌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보편화돼 있었던 것입니다. 나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만 해도 서러운데, '천벌 받은 사람'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자니 억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가족들과 강제로 생이별한 환자들은 성문 밖,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치유에 대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철저한 세상의 변방에서 나병환자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삶,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삶을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병이 진행될 대로 진행된 중증 환자로 여겨집니다. 그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일이었겠지요.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오고 눈이 떠지면 다시금 더욱 문드러져 가고 있는 자신의 삶을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혹시나' 하고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는 일이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개울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밤 사이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나병이 낫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단 한번만이라도 예전의 보송보송했던 피부를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이제 마지막 희망을 안고, 무례가 되는 줄 분명히 알면서도, 율법을 어겨가면서 예수님께로 달려온 것입니다. 자비와 연민으로 충만한 예수님 앞에 서니 서러웠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립니다. 꼭 한번 나아보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곡히 아룁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서,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나병환자의 외침 앞에 마침내 예수님 마음이 움직입니다. 삶 자체가 슬픔과 고통 덩어리였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권능의 손을 그에게 펼치십니다. 자비의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의 새 삶을 한번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마음,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메시아임을 굳게 믿는 확고한 신앙이 결국 기적을 불러옵니다.

오늘 저 역시 치유 받은 나병환자처럼 주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깨끗해지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보란 듯이 새 삶을 살고 싶습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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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순례자

레위13,1-2.44-46
1코린10,31-11,1
마르1,40-45

'가난한 사람들'로 제목을 했다가 '가난한 순례자'로 바꿨습니다. '가난'이 물음이라면 답은 '순례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막연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기 안에 갇힌 모습입니다. 나이들어갈수록 본질로 들어나는 가난입니다. 하느님 빠진 가난보다 비참한 경우는 없습니다. 안식년 동안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 참 많은 가난을 체험합니다. 사막같은 뉴튼수도원에서 수도자의 삶 자체가 가난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가난이다.“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살아갈수록 점차 분명히 깨닫게 되는 가난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동료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compassion)의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가난의 절정은 병이며 죽음입니다. 함께 살면서도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이들을 보면 정말 가난한 인간 존재임을 절감합니다.

"사람은 섬이 아니다.“

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사람은 섬이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뉴튼수도원이 사막같고 섬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는데 섬같고 사막같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간 본질을 직관하신 주님의 1차 복음 선포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역시 이사야서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아 평생 가난한 이들의 구원을 위해 투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유롭고 부요한자 몇이나 될까요? 바로 가난한 인간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자체가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가난한 순례자로 사는 것이 답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이사49,13).

새삼 가난한 자들의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가 상징하는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순례자의 모범입니다.

첫째, 나병환자 그는 참으로 절박했습니다.

완전히 고립단절된 모습이 자기 안에 갇힌 수인을 상징합니다. 비록 나병환자가 아니더라도 자기 안에 갇혀 절망하는 영적 나병환자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병이 남아 있는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13,46).

참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인간실존을 상징합니다. 천형과도 같은 나병환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둘째, 나병환자는 간절히, 절실히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절망에 머물지 않고 희망의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 희망의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하느님만이 희망이요 구원의 출구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만이 희망입니다. 사실 가난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기도가, 믿음이 필수입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되이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하는 가난한 나병환자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는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니 비로소 가난으로부터 탈출의 구원입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됨으로 천형(天刑)의 나병은 천복(天福)이 되었습니다.

셋째, 구원에 대한 나병환자의 복음 선포의 응답입니다.

주님께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이래야 완전한 구원의 치유요 영적 나병이 재발되지 않습니다. 활짝 개방하고 복음 선포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알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복음 선포의 삶이 영적 자유와 부요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적절합니다.

"형제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10,31.33-11,1)

영적 나병에 대한 최고의 예방이자 처방입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 바로 분도수도회의 모토와 일치합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영광을 두고 복음선포의 삶에 충실할 때 내적 자유와 부요의 삶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절망과 불신의 영적나병을 말끔히 치유하시어 희망과 믿음의 빛 가득한 내적자유와 부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가난한 순례자들인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6,20ㄴ).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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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가장 무서운 건 언제나 우리자신들입니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존재 또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우리자신들을 신앙으로 깨끗이 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아픔을 봉헌하게 하시며 우리의 간절함을 거룩함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만납니다. 아픈 부분에서 주님을 만나고 아픈 부분은 삶의 모순을 치유하는 은총이 됩니다. 아픈 부분에서 제일 먼저 뜨거운 기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아픔에서 시작한 기도는 예수님과 우리의 간격을 더욱 가깝게 만들어 놓습니다. 깨끗해져야 할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아픔은 축복이 됩니다. 우리자신을 반성하는 거기에서 주님을 향한 믿음은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부끄럽고 가장 아픈 부분에서 우리의 삶이 성숙해지길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건강한 삶이란 건강한 삶으로 이끄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삶이 서로를 깨끗이 하고 있음을 믿는 치유와 정화의주일 되십시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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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낫게 되었다.

오늘 연중 제 6 주일의 주제는 깨끗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구약시대에 나병은 부정한 병, 곧 더러움의 병이었고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들 사는 곳 바깥에 머물러야 했으며,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 때면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치며 다녀야했습니다.

전염을 막기 위한 격리가 그 이유였음에 틀림없지만 이것을 부정함, 죄와 연결시킴으로써 부정한 사람과 깨끗한 사람 간에 사회적 구별과 차별은 물론 영적인 구별과 차별도 생기게 되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구별과 차별을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 모인 곳을 피해야 하는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오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로 나옵니다.

이는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운데 나오면 돌로 쳐 죽일 수 있던 때나 병환자가 사람들 가운데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을 누구보다 환영하셨기 때문이지만 예수님의 추종자들도 구별과 차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영적이건 신체적이건 더러운 사람에 대해서 어찌해야 하는지 분명한데 그러나 실제 우리 삶을 보면 세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곧 차별하고 쫓아내는 부류, 씻으라고만 하는 부류, 씻어주는 부류입니다.

첫 번째는 더러운 사람을 차별하고 쫓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부류의 사람들은 비정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자기는 그리해도 좋을 만큼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혹 육신이 깨끗할지 모르지만 죄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십니다. 자기는 깨끗하다고 착각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깨끗하다고 착각할 뿐죄 없는 사람, 영적으로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네가 씻으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부류의 사람도 차별하고 쫓아내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더러운 걸 싫어하고, 더러운 사람을 사랑치 않는다는 면에서 같지만 다만 적극적으로 내쫓지는 않고 무시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더 나무라실지 모르겠습니다. 차별하고 미워하고 내쫓는 그런 것으로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고 더러운 것을 만지다 자기가 더러워질까 피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더러운 것을 손수 닦아주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처럼 사랑 때문에 스스로 걸레가 되는 겁니다.

걸레란 남은 깨끗하게 하면서 자신은 더러워지는 것인데 사랑의 걸레는 깨끗하게 할 뿐 더럽혀진다 생각지 않기 때문이고, 사랑이란 그것이 참 사랑인 한 더럽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 같이 나빠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고 아직 사랑의 사람이 못된 것이고 반대로 더러워질 수 없는 사랑의 사람은 더러워지는 걸 개의치도 않기에 그들의 죄와 더러움보다 그들의 고통과 불행을 더 보고 마음 아파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회개하기 전의 프란치스코처럼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려고 집착하고 싫어하는 것은 두려워 피하지만사랑의 사람은 회개한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들에게 간 것처럼 나병환자들의 고통과 불행을 보고 그들 가운데 가며 무엇보다도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만나고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구별이 죄이고, 차별은 더 큰 죄이며, 사랑 없음이 가장 큰 죄임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본기도처럼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저희를 좌절시키는 차별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저희가 나병 환자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협력하며, 형제들에게 아버지 자비를 전하게 하소서.

<작은 형제회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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