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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나병 환자와 같은 깊은 믿음과 용기이다
조회수 | 2,465
작성일 | 06.02.11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나병 환자와 같은 깊은 믿음과 용기이다. 우리에게 굳은 믿음만 있다면 어떠한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해서 용기를 가질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오늘의 나병 환자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자비의 마음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제 1독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나병 환자는 다른 사람들과 상종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즉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나는 부정(不淨)하다’고 외칠 것이며, 병이 나을 때까지는 언제나 부정한 상태로 있을 것이니, 그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할지니, 집 밖에서 살 것이니라>(레위 13,44-46)

그러므로 나병 환자는 결코 군중들 속에 끼어서는 안되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는 감히 그러한 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그가 그만큼 예수님께 대해 절대적인 신뢰심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행위를 범해 가면서까지 군중 속에 끼어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머물러 계시는 집에까지 찾아 들어갈 수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완전히 사회로부터 버림을 당한 나병 환자는 그의 필사적인 신뢰로써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선생님을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실 생각만 있으시다면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신뢰에 찬 간청이냐! 주님께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이 없으시다.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다. 다만 행하지 않으시는 것은 마음이 없어서이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안 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병 환자는 이러한 굳고 깊은 신뢰로써 예수님의 자비심에 호소했다.

예수님께서 그를 측은히 여기시고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 주겠소. 깨끗하게 되시오.> 그러자 나병 환자의 나병 증세는 곧 사라지고 그는 깨끗하게 나았다. 그의 믿음이 주님의 자비심을 불러일으켜 주님의 기적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율법서에는 성한 사람이 나병 환자를 만나면, 그도 역시 부정한 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법이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러한 율법에 구애됨이 없이 환자에게 <손을 갖다 대시었다.> 얼마나 자애 깊으신 주님이신가! 우리의 믿음도 그와 같이 굳고 깊어서 주님의 자애로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했으면 싶다.

김몽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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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모성(母性)’인 측은한 마음

43년 간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던 마리안나와 말가리다 수녀님이 지난 해 말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한 가족처럼 지낸 주민들에게 헤어지는 아픔을 주기 싫다며 ‘사랑하는 친구·은인들에게’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새벽에 남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두 수녀님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 큰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주민들에게 감사표현을 했습니다. 수녀님들은 환부에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늘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저는 수녀님들의 집에서 여러 번 피정을 하는 은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 없이 떠난 소록도의 두 천사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두 수녀님의 숭고한 사랑에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치유하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환자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1,41).

구약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자비)을 헤세드(hesed)와 라하밈(rahamim)이라는 두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라하밈은 ‘애간장’라는 뜻인데 그 어근은 rahem(母胎, 모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단어를 쓸 때(호세 11,1-8; 이사 49,14-19)는 하느님의 모성(母性)을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인 모성을 예수님의 측은한 마음에서 봅니다. 이 측은한 마음, 곧 애간장이 타는 마음은 예수님의 백성을 향한 착한 목자의 심정을 보여 줍니다. 이는 자기를 떠나 불행을 겪고 있는 상대편과 한 운명체가 될 정도로 이타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인 아가페(1요한 4,16)의 뿌리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서 나병 환자의 운명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 8,17).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십니다(마르 1,45).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마음을 닮는 길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이 가엾어 하는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키우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맹자(孟子)는 “지금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다면, 다 놀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진심이요, 생각해서 얻는 것이 아니며, 힘써서 맞춘 것도 아니며, 하늘의 이치가 그러하다”고 갈파하였습니다. 얼마 전 에이즈 환자들과 함께 사시는 외국인 선교사 한 분을 만나 뵙고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나병이나 에이즈는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라 치료가 가능하므로 이런 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깊은 관심과 배려를 해야겠습니다.

구요비 욥 신부
  |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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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다양한 원인과 치유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질병으로 부터 오는 고통은 어느 한정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질병에 걸리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매일 병으로 시달립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고통을 받습니다. 결국에는 우리 대부분이 병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면 질병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니면 질병은 우리의 삶 안에서 전혀 의미가 없습니까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질병은 죄에 대한 벌이나 보속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엘리사에 의해서 나아만이 치유된 것이(2열왕 5장)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 의사나 치유자, 치유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질병에 관한 이러한 신학적인 관점은 예수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제자들의 질문에서 잘 나타납니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요한 9,2) 질문은 그들이 여전히 죄 때문에 질병이 생겼다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념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결과로 질병이 생겼다고 하는 제자들의 견해를 거부하셨습니다.(요한 9,1-7 참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이 경우에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란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베푸신 치유를 말합니다. 또한, 병이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서도 창조적으로 삶을 이끌어감으로써 삶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말합니다(예를 들어, 헬렌 켈러와 같은 사람). 왜냐하면 하느님의 능력과 창조성은 우리가 고통의 한복판에 있을 때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희랍 사고에서 치유활동,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 그리고 땅을 일구는 행위는 서로 관련이 있었습니다. 치유는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건강하여지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된 여인(루카 8,43-48 참조)에게 말씀하실 때 선택한 단어는 의학적인 용어가 아니고 sozo라는 영적ㆍ종교적인용어입니다. 이는 모든 부분 곧, 신체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으로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단지 치유만이 아니라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죄는 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병은 단순히 운명일 수 있는데, 이는 병을 지니고 태어나거나, 질병의 요인을 지니고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유행병으로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병이 우리를 온전함과 개성화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질병의 다양한 가능성 때문에, 마음을 열고 편견을 갖지 않고 질병의 각 경우에 접근하며, 여러 가지 각도에서 질병의 원인과 그 의미를 탐구해야 합니다. 특히 심리적인 장애의 경우나 심리적인 부분을 동반하는 신체적인 장애는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앞당겨서 그 의미를 아는 것은 병이 우리에게 고 있는 진실한 메시지를 가릴 수 있기 문입니다.

문종원 베드로 신부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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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병(病)·환(歡)·자(慈)

1.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6 참조)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어제 새로 서임되신 추기경님들과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감사 미사를 봉헌하십니다. 작년 이맘때 우리 염 추기경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번에 교황님께서 ‘붉은 모자(biretum rubrum)’를 씌워주신 이탈리아 람페두사(Lampedusa) 섬이 속한 아그리젠또(Agrigento) 대교구장 몬떼네그로(Montenegro) 추기경님의 서임은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관례(?)를 뛰어넘는 교황님의 깊은 뜻은 전쟁과 가난 때문에 고향인 아프리카를 떠나온 이들을 환대(歡待)한 람페두사의 사목자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납니다. “누가 이주민(移住民)들을 위하여 울어줄 것인가?”

2.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1코린 11,1)

제3회 이태석 봉사상 수상자인 산청 성심원의 유의배(Luis Maria Uribe) 신부님은 “요즘 완치가 가능해진 한센병은 천형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병입니다. 세상의 편견 때문에 속이 썩어 들어가는 병이죠.”라는 말로써 우리들의 닫힌 마음이 열려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나병환자 치유가 ‘가엾은 마음’(마르 1,41 참조)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안에‘가엾은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공감(共感)할 수 있게 되고, 이는 동정(同情)을 일으켜서 개심(開心)하도록 도와줍니다.

3.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 1,44)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사랑과 책임」에서“인간은 보이는 세상과 통교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세상인 하느님과도 통교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이미 자신 안에 ‘통교의 은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환대, 곧 받아들여 끌어안음’의 삶을 살아야 할 소명을 지닙니다. 때문에 교황님께서는 “배척의 문화를 뒤로하고 환대의 문화로 나아갈 때”(2014년 세계 이민의 날 담화 참조) 우리 자신의 실현도 이룰 수 있다고 권고하셨습니다.

4.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알아 뵈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나는 병(病)들어 고생하는 너희들에게 환(歡)대의 문화를 살게 하여 치유되게 하는 자(慈)비로운 하느님이다.” [나·병(病)·환(歡)·자(慈)] 그러므로 ‘나병환자의 치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구원의 길로 마음을 열게 하는 성사(聖事)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성부께서는 당신의 유일한 말씀이신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또 단 한 번에 말씀하셨다.”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곧 시작될 사순 시기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해지시길 빕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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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동체적인’ 믿음

이스라엘 사람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생각 중의 하나는 ‘선민의식’입니다. 선민(選民)의식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고 그 후손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식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부심이자 종교 생활의 근간을 이룹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45 19,2)는 하느님의 명령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 곧 부정을 멀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종교생활의 일부가 됩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부정을 멀리하려는 여러 가지 제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레위기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내용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병을 알리고 병이 사라질 때까지 공동체와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공동체 전체가 부정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을 격리해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악성 피부병은 치유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나병은 여전히 부정한 병이었고 그것에서 깨끗해지는 것은 그가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음을,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이의 믿음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아무런 방법도 없이 병이 사라지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의 이런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한을 잘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예전에 사용하던 요리문답의 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천주 전능하시뇨? 천주 전능하시니, 하고저 하시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하시느니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어투로 된 표현이지만 오늘 복음과 가장 잘 어울리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믿음과 관련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나보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행한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공동체적인’ 믿음을 조금 더 강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가톨릭 교회의 믿음은 공동체적입니다. 나 혼자만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 전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교회 전체를 위해 기도하고 또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벅찬 일인데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이것보다 더 위로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 다른 이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기도하지 못할 때, 다른 이들 역시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 힘들고 지친 이들이 있다면, 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면 기쁘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 그들도 역시 나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고 기도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신부>
  |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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