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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조회수 | 2,290
작성일 | 06.02.11
현대 자연과학적 교육을 받아온 우리들은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도 자연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적적인 사건은 얼마든지 있다. 나병환자를 낫게 해주시는 주님이시다. 믿고 바라는 이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1. 한센시병(나병), 그 철저한 버림받음의 증거

우리나라에서는 나병(癩病)을 문둥병이라고도 하였다. 왜 그렇게 불렀을까? 아마도 나병에 걸리면 피부와 관절이 문드러지기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만큼 나병은 무서운 병이었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손마디가 떨어져나가고, 살갗이 문드러지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스스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그래서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罰)이라고 하여 천형(天刑)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면에서 모든 질병 중에 참으로 견디기 힘든 질병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질병이나 환난은 다 죄의 벌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가장 몹쓸 병에 걸린 나병환자는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으로 취급되었다. 말하자면 나병환자는 “나는 죽을죄를 지은 대 죄인이요.”하고 자기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병 환자는 그 전염성에 대한 두려움과 보기에도 끔찍한 흉한 모습 때문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다. 요즘 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왕따'라고 한다. 나병환자들이야말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죄 많은 사람이라 하느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한마디로 그 어디에도 구원의 희망이 없는 철저히 소외된 인간이었다. 이런 나병환자가 예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스승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하며 간청한다.

2. 하느님의 사랑은 새 생명을 준다

'벤허'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의 모친과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현장에 갔다가 태양이 빛을 잃고, 온 천지가 어두워지면서 번개와 뇌성이 무섭게 치고, 세찬 소낙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피부가 어린 아이 피부처럼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한다. 벤허는 무죄한 의인인 예수가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듣고는 원수갚을 마음을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 당시 율법으로는 나병환자는 성한 사람에게 다가가서도 안될 뿐 아니라, 성한 사람이 나병 환자인줄 모르고 다가오면, “나는 불결한 사람이요!”하며 소리를 질러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복음의 나병환자는 그 법을 어기면서 예수께 크게 소리지르며 낫게 해 주십사 청한다. 그들도 예수께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을 것이기에 어떤 규정이나 방해에도 불구하고 달려가 낫기를 청했을 것이다. 그러한 무례를 아시고도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시며 그를 낫게 해주신다. 순식간의 일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부르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다.

3. “저를 성하게 하여주십시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사람들 앞에서도 얼굴을 들 수 없고, 하느님으로부터도 스스로 등을 돌린 상태가 된다. 그래서 모든 가족들과 세상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취급된 나병환자는 죄인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나병환자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떳떳할 수 없고, 사방이 꽉 막힌 채 출구라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죽는 것이 더 낫다.”싶은 때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쳐도 그럴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듯 한 죄와 악습의 굴레에 더욱 얽매여 “이제 틀렸다.”싶은 절망의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런 때에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 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처럼 겸손과 믿음으로 “주님 저를 고쳐주십시오.”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자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믿는 행위이다.

"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무능을 체험하고, 그래서 철저히 부서진 나머지 참으로 겸손해진 바로 그 순간에 찬란한 빛이 비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믿고 바라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도 이 미사 중에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못지 않게, 온갖 죄로 인해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는 우리의 처지를 고백하며 “주님 우리를 고쳐주소서”하며 겸손되이 간청하자.

유영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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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을 위하여

나병은 나균에 의해서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난치병으로 한센병이라고도 합니다. 전염병이기 때문에 치료약이 없던 시절에는 격리만이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1독서 레위기를 보면(13,44-46) “악성 피부병에 걸린 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지만 나병환자에게는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고 사람들과 동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절박합니다. 무릎을 꿇고 애원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절박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며 깨끗하게 되라고 말합니다. 그저 말씀 한 마디면 될 텐데 굳이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나병뿐만 아니라 나병환자의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마음의 병까지도 본 것입니다. 나병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나병환자는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괴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그가 설령 깨끗하게 된다 하더라도 다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적응기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까지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집니다. 동등한 한 사람으로 대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격리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하나인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단단히 당부하지만 나병환자는 곳곳에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닙니다.

물론 그것이 예수님의 행동을 제약하게 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병이 치유된 나병환자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병뿐만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간 일이 나병환자에게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기적이나 치유만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줍니다. 나병환자는 단순히 나병만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되어 자신의 일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문득 고등학교 때 윤리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첫 시간에 人을 네 개 써놓고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답다’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고 어떠한 경우에도 외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바칩니다. 기적을 행할 때도, 치유를 행할 때도 사람에 대한 가엾은 마음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는 신앙인은 누구나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코린 10,31) 하는 사람입니다. 또 사도 바오로처럼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는”(1코린 10,33 참조)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박철현 신부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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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게 하는 가엾은 마음”

몸이 깨끗해야,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질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마음도 영혼도 청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고 가까운 분과도 인격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쌍방이 결합하려면 둘 다 깨끗해야 합니다. 더러우면 인격적 결합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청결은 관계 맺기를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신앙생활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맺어가는 과정이기에, 영적 청결은 신앙에 절대 필요한 요소입니다. 영적 더러움 곧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치명적 장애입니다. 이를 제거해야만 하느님과 결합하는 데에 문제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교를 비롯하여 대부분 종교들이 씻는 예식을 중시했고 때로는 까다로운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정결례 규정을 어기시면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갖다 대셨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나환자는 온전히 격리되어야 한다는 정결례 규정에 구애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하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자비의 행위가 율법을 ‘넘어선’ 것입니다. 율법이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의 구체적 사례들을 규정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행위는 율법을 넘어 완성한 것입니다. 이를 망각하고 율사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았습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이번에는 예수께서 나병 치유와 관련한 규정을 준수하십니다. 사제만이 병의 치유를 인정할 수 있다는 규정, 나환자가 치유되어 건강한 삶을 살려면 사제로부터 치유사실을 확인받고 감사의 예물을 바쳐야 한다는 규정을 지키셨습니다. 비참한 처지를 극복하려는 나환자의 희망과 집념 및 예수님께 대한 신뢰, 정결례 규정을 넘어서시는 예수님의 자비행위를 가능케 한 것은 ‘가엾은 마음’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행동이나 자세보다 더 중요하고 앞서는 것은 마음입니다.

우선, 가엾은 마음으로 환자를 보시고 ‘뼛속까지 저미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갖가지 고통을 겪고 있다면, 하느님은 그때 가엾은 마음을 품으십니다. 말하자면 고통에서 구하시기 전에 우리와 더불어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십니다. 먼저 우리와 십자가 고통을 함께 지심으로써 고통의 부담을 덜어 주십니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진지한 노력과 당신께 대한 신뢰심을 보시고 주님은 우리에게도 ‘너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가엾은 마음과 물리적 접근, 신체적 접촉 등을 통하여 고통 겪는 우리를 지탱해주시며 위로하시고 마침내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과 신체적 접근이 저주받은 병, 최악의 절망을 이겨낸 것입니다. 그 결과 나환자는 몸과 육신은 물론이고 마음과 영혼까지도 치유 받았습니다. 가엾은 마음과 자비로운 행동으로 인해 불치병이 치유되어, 환자는 저주에서 축복으로,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넘어갔습니다. “스승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최영철 알폰소 신부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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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스승님, 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저의 보호자 되시고, 구원자 되어주소서!’

오늘 입당송의 저자처럼 누군가 이런 기도를 간절하게 올리고 있다면, 그는 심한 곤궁에 처했음이 분명합니다.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인간 존재의 뒷면에는몸과 정신 양쪽 다 심각한 죄와 한계를 지니고 있어 언제든 쉽게 다치고 부서지고 죽음에 부쳐질 수 있는데, 그 한계가 자신 앞에 고개를 내밀 때 입당송과 같은 기도가 저절로 우러나올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입당송의 기도보다 더 절실한 기도를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나환자에게서 듣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나환자는 자신의 절실함을 무릎을 꿇으며 드러냅니다.

아시다시피 성경과 유다교에서 나병은 인간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불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건강한 사람들을 이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환자는 가족 친지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따로 살아야 했는데(레위 13,46), ‘아, 나의 주인님,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하여 저지른 죄의 값을 우리에게 지우지 마십시오. 미르얌을, 살이 반은 뭉그러진 채 모태에서 죽어 나온 아이처럼 놓아두지 말아 주십시오.’(민수 12,12)라고 아론이 모세에게 했던 애원처럼, 나환자는 비록 그의 몸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나환자의 이러한 삶은 당사자에게는 죽음보다 더 무섭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죽음의 심연에서 나오는 나환자의 절규요 간청이며 기도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만나면서 질병으로 인해 부서진 한 사람의 인생은 되살아납니다.

그런데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영적인 측면에서 죽음의 병으로부터 구원된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서 한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의 지향이며 삶이고, 또한 그의 사도직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음이 된 사도의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해 영적인 죽음의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몸의 질병과 영적인 질병으로부터 해방된 두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영과 육을 죽음으로부터 풀어주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시며 그 나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는 지금 내 앞에 서 계십니다.

나는 지금 그분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에 정신이 빼앗겨 모르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그분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외면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 하고 오늘 화답송처럼 노래를 부르고, 사도 바오로처럼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산교구 이학율 사바 신부>
  |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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