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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수님의 신원이 갖는 신비
조회수 | 2,197
작성일 | 05.12.02
대림의 두 번째 고개를 맞으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의 시작을 읽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은 마태오 복음이나 루카 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나 유년사에 대해 전혀 보도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족보도 알리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 1장9절,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부터 마르코는 예수님의 삶에 대한 보도를 시작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마르 1,1-8)은 예수님이 세상에 등장하는 것을 준비하는 매우 간략한 복음의 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 1장1절은 이 서언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코 복음 전체에 대한 제목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제목을 본래 마르코 복음이 쓰인 헬라어로 읽는다면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 두 번째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한 복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예수라는 이름과 연결하여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사용하였는지, 아니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과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예수에 대한 병렬적 호칭으로 사용하였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모두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마르코 복음의 중반부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마르코 복음 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점과 예수님의 죽음을 보도하는 부분에서 백부장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장면에서 미루어 볼 때 두 번째 해석이 복음사가의 의도를 더 잘 반영한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의 첫 줄에서부터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못 박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증언의 내용, 즉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책이 바로 마르코복음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시며, 동시에 메시아라는 호칭이 당시에 의미하던 세속적·정치적 왕의 의미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전체에서 사려 깊게 고백하면서, 그 예수의 신원이 갖는 신비를 자신의 복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제시합니다.

마르코 복음 1장2절부터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도 1장1절의 제목과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시대에 이스라엘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존경했습니다. 복음사가는 이 존경받는 인물을 예수의 길을 준비하며 예수에 대해 은유적으로 증언하는 인물로 제시하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인용했습니다. 이로써 앞으로 그가 보여 주려는 예수의 신원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맞아 공동체가 마르코 복음을 읽으며 우리 공동체에 그 복음의 질문을 새로 던집니다. ‘아기 예수는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과연 누구입니까?’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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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새롭게 시작하다.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그런데 마무리의 계절 12월에 교회의 달력은 대림절로 새롭게 시작하게 됩니다. 12월에 세속의 마지막 달력 한 장과 교회의 새로운 달력 한 장이 서로 만나게 됩니다. 세속과 교회가 만나고 마지막과 새로운 시작이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終則有始 종즉유시).

그전에 존재했던 자신이 죽어야 새로운 자아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새로운 탄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타납니다(死生之說 사생지설).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에 교회가 새롭게 전례력을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일까 마무리의 계절 12월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은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는 이 짧은 말로 구약과 신약을 가름하고 있습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죄를 강조하는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하느님 은총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 요한은 이렇게 썼던 것입니다.

“모세에게서는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요한 1, 16-17).

복음의 시작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오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의 서두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우리에게 새롭게 오시는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그분께서 이제 곧 오십니다.”

복음서가 이렇게 주님의 오심을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다면 복음은 이미 그 출발점에서부터 성경의 끝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은 바로 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마침표를 찍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에수님!”(묵시 22,20)

이렇게 복음의 시작은 성경의 끝과 연결되고, 12월 마무리의 계절은 대림의 시작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시작과 끝,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의 공통된 주제는 바로 󰡒주님의 오심󰡓입니다. 아니, 시작과 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주제가 바로 “오시는 주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 중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에도 오셨고, 지금도 오시고, 앞으로도 오실 분!”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분을 온 마음으로, 온 정신으로 깨어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대림절 기도가 될 것입니다.

박성칠 미카엘 신부
  |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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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길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우리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길을 걷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슬픔 속에서 길을 걷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며 이 죽음은 일생을 마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모든 인간들과의 동반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길은 주님의 길이며 주님은 당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들에게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길”이 실제로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오늘 미사의 두 독서는 우리가 길을 걷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독서는 위로의 책을 쓴 이사야 예언자의 둘째 부분의 책이다. 이 책은 하느님의 백성이 바빌로니아로 유배 갔을 때 기록한 책으로서,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도록 불충실한 백성을 선도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선도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용서해 주고, 복역기간을 끝내 주시는 은혜로운 책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사야는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라고 외친다.

주님 당신이 당신 백성을 성지로 인도하기 위하여 유배자들의 선두에 서서 걸어가실 길이다. 이 성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당신 백성 가운데 하느님 현존의 표지가 될 것이다. 주님의 길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마치 당신 백성의 목자처럼 백성을 해방시키는 길인 것이다.

이 길에서 당신의 내림을 알리기 위해서 메신저들이 파견된 것이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이 기쁜 소식은 또 하나의 다른 기쁜 소식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기쁜소리”로서 가장 위대한 복음이며, 세례자 요한이 오늘 마르코 복음서 서두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과연 이 기쁜 소식은 어떤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마르코는 이 질문에 답변한다. 교회가 금년 한해동안 묵상케 하는 마르코 복음서는 이 복음의 대상이며, 요한이 사막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사건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마르코에 의해서 소개된 요한의 설교는 그의 복음서의 첫 문장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인 것이다.

요한은 어떻게 그의 사명을 수행하는가?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요한은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라고 외친다. 더욱이 요한은 인간의 마음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을 것을 제의한다. 달리 말하면 청중에게 결백의 예식으로 초대하며 세례를 통해서 죄인들이 용서받을 것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게 되리라고 선포한다. 회개할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오실 것이며, 그들을 성화시켜 주실 것이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서에는 이사야서보다 새로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기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의 메시지는 복음의 시작인 것이다. “주의 길을 닦으라”라고 외치면서 요한은 그 어떤 예언자보다 훌륭한 능력을 띠고 사명을 완수할 신비로운 인물의 내림을 준비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회개하도록 인간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즉 그분이 보내주실 하느님의 성령의 성화로 그들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신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권능은 하느님의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분의 내림을 요한은 선포했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주의 길을 닦으라”라는 새로운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 마르코는 복음의 내용까지도 요약하여 서두에 기록하였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사실 예수를 통해서 주님이 오신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그런 그리스도만은 아니다. 인간에 지나지 않는 메시아는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주님이시며,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성화시킬 권능을 가지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주님이시다.

주님의 길은 바로 예수께서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걸으신 길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고 당신의 부활로써 당신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신 예수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길을 홀로 걸으시지 않는다. 그분이 오심으로써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길을 바꾸게 하며, 당신 아버지께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주님의 길은 예수께서 회개한 죄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셔서 걸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길이다. 이 길을 따른다는 것은 자유로와진다는 뜻이며, 그것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해방을 수락하는 것이다. 이 해방이란 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데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대인들이나 현대 가난한 이들이 물질적으로 해방된다는 뜻과는 다르다. 이 해방은 다른 모든 해방의 원천이 되는 영적 해방을 말하며, 죄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들이 억압당하고 물건처럼 취급되는 그곳에 모든 죄악의 원천을 정신이 정복한다. 지상의 물질과 쾌락이 지배하는 탐욕의 정신을 영적으로 해방시켜 준다.

예수는 이와 같은 노예적 욕망으로부터 당신 제자들을 해방시켜 자유의 길을 열어 주시며, 성령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유롭게 걸어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다.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 성령이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의 삶을 나누며 모든 인간이 우리와 함께 걸어가도록 우리 마음을 채워 주신다. 이 인생의 행로는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베드로가 지적한 것처럼 하느님은 참는 분이기에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느님이 참으신다는 것은 하느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맡은바 직책에 충실하고, 인생체험을 하도록 내버려두신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우리 마음 안에서 듣게 될 것이며, 또 주님을 찾도록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신자인 우리에게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주님의 길인가? 우리의 삶이 희망과 사랑을 드러낸다면, 우리의 기쁨이 하느님 아버지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확신이 서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형제애를 실천한다면 우리가 걷는 길은 분명히 주님의 길일 것이다. 이 길을 우리는 걸어야 하고, 다른 이들을 이 길로 인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조자로서 모든 이를 이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시간을 선용했을 때 얼마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우리의 시간을 선용함으로써 영원한 나라로 향하여 참으면서 주님의 길을 걸어가자.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는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길을 준비시키는 일에 기쁘게 나서자.

유재국 신부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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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소명에 따라 산 사람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한 나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이제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 후에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로서 헌신적으로 일하여 세상에 ‘백의의 천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느 날 어떤 기자가 그녀에게 “당신의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신 소명에 따라 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닦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광야에서 낙타 털옷과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벌꿀만을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대대적인 세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면서 곧 다가올 하느님 나라와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세례운동이 군중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많은 추종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메시아이길 바랐고, 또 그렇게 기대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과 곧 오실 분, 곧 주님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렇듯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또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아는 진정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생활과 나의 음성만을 듣는 생활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음의 선택에서 한 발자국 전진하여 몸으로 하는 선택, 즉 나의 생활을 방향 짓는 결단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나의 이름을 불러 개인적으로 맡겨 주신 하느님의 목적을 자각하는 데서 더욱 구체적이며 가치 있게 발전됩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과 나이팅케일의 삶처럼….

고준석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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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낙태죄 폐지에 대한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계기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낙태죄 폐지를 청원하는 사람들이 20만 명을 넘었고, 청와대는 답변하는 과정에서 낙태죄에 대한 새로운 균형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발언을 인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 인용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 역대 교황님들은 일관되게 낙태에 대해서 반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말은 못 해도, 몸이 약해서 어머니의 몸에 의지해야 하지만 태아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모두 고귀한 것이고, 생명은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은 필요할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에는 책임 또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 없이 타인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과 재정적인 지원이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황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품자 면담을 하면서 논문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신학생은 논문의 주제가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는데 어머니께서 사실은 낙태할 뻔했다고 얘기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미안하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신학생은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니가 무척 고마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논문도 사람이 죽음을 결정할 수 없다는 주제로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로 선포하셨고, 작년에는 ‘자비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회칙을 통해서 교회는 약한 이,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억울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는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얼마 전 고통 중에 있는 미얀마 로힝야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깊은 위로를 주셨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노숙자들은 늘어간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인데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불법체류를 한다는 이유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영적으로 메말라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죽는 사람, 너무 힘들어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깎아져서 평평하게 되리라.’ 교만과 욕망의 산을 깎아서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둠과 절망 그리고 고통과 걱정은 희망과 사랑 그리고 나눔과 봉사로 메워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처럼 그런 꿈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7년 12월 10일
  |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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