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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조회수 | 2,541
작성일 | 06.03.10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장면은 그 앞에서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수난-부활의 예고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가르침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체험하기 전에,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신적(神的)인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미리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용기를 갖고 예수-추종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얼굴에 빛나던 그 ‘영광’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나타날 영광이 미리 빛난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비록 지금 고난과 치욕의 길을 가시지만, 그 길이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바로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는 베드로의 요청에도 드러나듯이, 제자들은 영광 속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 행복한 순간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드는 메시지는 바로 그런 영광의 메시아에 관한 것이었지, 많은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메시아에 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 은총의 체험 후에 산 위에서 세상 아래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들은 황홀한 체험에 취해 산 위에서 눌러앉아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문제들로 뒤얽혀 있는 세상 아래로 내려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스승 예수님을 뒤따라가야 했습니다. 산 아래의 외적 환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과 마음은 달라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수님의 영광을 본’ 눈과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그저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흘러가는 듯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 한가운데에서도 드문 경우이겠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 정말 주님께서 존재하시는구나! 그리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내 존재가 결국 주님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 속에 뿌리내리고 있구나!” 하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이런 체험을 했다면 이 체험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체험하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체험일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세상살이 한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께 대한 믿음 속에 굳세게 살아가도록,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큰 선물입니다. 문제는 이런 은총이 있더라도 쉽게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바로 그 잊고 있던 은총의 체험을 되살리는 때입니다.

김영남 다미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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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 위에 오르시자 예수님 모습이 변해 해와 같이 빛나고 빛과 같이 눈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서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예수님 모습에 너무나도 놀란 베드로가 얼떨결에 말합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경외감에 압도당한 제자들은 이 황홀한 광경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하며 충격과 감동에 취해 머무르기를 청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시며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사순 제2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일장춘몽과도 같은 이 놀라운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에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 얼굴이 변해 빛나고 그 옷이 눈부셨다는 대목은 부활 때 예수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을 겪으신 후에 받으시는 영광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눴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가르침입니다.
 
넷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구름은 하느님 현존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라는 증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서 산 아래에서 예고한 대로 십자가상 죽임을 당하지만(마르 8,31) 부활하여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셨던 분이 선종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불의가 세상을 뒤덮고 24시간 감시와 도청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나라와 국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며 평생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빈소가 마련됐던 명동성당은 그분을 추모하는 열기로 상가가 아니라 마치 피정 집 같았습니다. 거룩한 기운이 그곳을 뒤덮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분 삶을 그리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김 추기경님께서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같은 시대를 살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분을 통해 산 아래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됐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십자가 없이 영광만이 있는 산 위에 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독려해 산 아래 현실로 내려오셨듯이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경쟁과 낙오, 갈등과 싸움, 미움과 배척이 상존하는 산 아래 현실입니다.
 
사람마다 산 아래 현실은 어렵습니다. 장애인 자녀가 있을 수 있고,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가장을 바라봐야 하는 가정이 내 가정일 수 있습니다. 또 부모 때문에 끝없이 참아야 하는 자녀들의 힘겨운 삶도 내 현실일 수 있습니다. 또 치매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힘겨운 며느리 삶이 내 것일 수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감내하기 버거운 십자가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산 아래 현실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산위 놀라운 영광이 찾아온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사순시기를 통해 영광의 부활에 동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기양 신부
  |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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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옷은 새하얗게 빛났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나는 프라도회의 국제회의에 참석 중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접하였다. 서둘러 귀국하려는데 여러 신부님들이 만류하며 “우리와 함께 기도하며 한국 교회의 슬픔에 참여합시다!”하고 간청한다! 참담한 심정으로 지내며 기도하다가“아! 추기경님은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웃으시며 강복하시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모세’를 바라보며 더욱 그러하다. 김추기경님은 우리 모두에게‘모세’와 같은 분이시다. 시공을 초월하여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며‘성인들의 통공을 믿나이다!’라는 신앙 고백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거룩한 변모’이야기는 특별히‘그분의 옷은 … 새하얗게 빛났다(3절)’고 말한다. 몸은 인간의 영혼이 머무르는 집이며 사람의 속마음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예수님의 이 외적인 변모는 이분의 내적인 본성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즉, 예수님의 인간성(人性)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신성(神性)을 계시해 주신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란 다름 아니라 이분이 지니고 계신 선한 마음(善性)을 말하는데‘선(善)은 존재(存在)의 자기 확산성을 지니고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선생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5절)’하고 고백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참된 아름다움(美)이란, 선한 마음(善性)이 외모로 흘러 넘쳐 찬란한 빛처럼 확산되어 가는 걸 말하지 않는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영광의 주님의 모습(묵시 1,13-16)을 미리보여주며예수님은제자들에게도이를암시하신다(9절).

예수님의 존재 안에 깊이 새겨져 있는 선하신 마음이란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온전히 아낌없이 내어 주시려는 오롯한 심정과 결연한 의지이다. 이 선한 의지는 이미 이분의 탄생과 더불어 온 생애 안에서 실현되었기에 부활의 영광이 이분의 수난과 십자가의 길 안에 이미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분의 아름다움은 온 생애와 모든 행동 안에 퍼져 있다. 말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 모범 하나하나가 이분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머지않아 당신이 겪으실 수난에 앞서, 이 수난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아름다움의 신비를 오늘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의 신비 안에 주님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음을 우리에게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주님처럼 선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살려고 할 때에 주님 영광의 빛이 이미 이 고통 안에서 빛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7절).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6-18).

구요비 신부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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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원리

사순 제2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의 빛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가 변화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 즉 복음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 자신이 변화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어떠한 기쁨도 부활의 영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는지.”

참 마음에 와 닿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을,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어쩌면 세상은 변화하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을 먼저 변화하지 않고 먼저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위의 묘비명의 내용처럼 세상은 오히려 변화되지 않고 아픔만이 가득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세상 변화의 진정한 원리는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먼저 나를 바꾸는 것.

사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많습니다. 나의 작은 습관과 태도에서부터 언어에 이르기까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나를 바꾸자 놀랍게도 가족들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위 묘비명의 희망처럼 어쩌면 세상 역시 변화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에 항상 하는 말, 회개, 이 말은 항상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랑만이 인간과 세상을 변화시킬 있습니다.”

고준석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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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랑받는 아들

갈릴래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즈라엘 평야가 있습니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곡창지대로 사용되는 이 평야의 끝자락에 타보르 산이 위치합니다. 이 산 위에서 바라보면 이스라엘에도 드넓은 평야 지대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타보르 산은 전통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읽게 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곳엔 현재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기념하는 성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선 공통적으로 ‘높은 산’이라고만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이 높은 산이 어디인지 많은 논쟁 끝에 마태오와 루카에서 전하는 일주일 정도의 여정에 따라 타보르 산을 거룩한 변모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아주 간략하게 표현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옷이 하얗게 변하고 구약의 가장 중요한 예언자로 꼽히는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함께 대화한다는 내용입니다. 복음서에서 전해주는 대부분의 기적이나 이적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거룩한 변모 역시 사건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반응을 더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함께 지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반응에서 그 광경이 얼마나 황홀했을지 짐작하게 됩니다. 초막에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했던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서 ‘영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서는 땅에서의 반응뿐 아니라 하늘에서의 반응 역시 전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의 세례에서 역시 비슷한 하늘의 소리를 들은 바 있습니다(마르 1,11). 공생활의 시작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가는 막바지 여정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줍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입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저 한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성을 강조합니다.

‘사랑받는 아들’은 오늘 복음과 독서를 하나로 묶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창세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는 이미 복음을,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알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마치 예수님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느님 역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제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로마서에서 이런 사실을 강조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느덧 우리는 사순시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순시기의 시작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이들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외아들이고, 그분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은 수난의 길을 걸을 것이고 인간의 손에, 하느님의 창조물 손에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창조주가 창조물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사순시기는 이것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거룩한 모습을 통해 보여지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 안에서 역설적으로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사순시기는 보속과 참회의 시간이지만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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