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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길 떠남
조회수 | 2,011
작성일 | 06.03.10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사건을 전해줍니다.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광채,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 나누는 예수님의 신비로운 모습은 부활 이후의 영광을 예표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 얼마나 황홀했던지 베드로는 이런 제안을 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마르 9, 5) 겁에 질려 엉겁결에 한 말이지만 베드로 사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욕구를 표현한 것이겠지요.

힘겹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고달픈 삶을 살았을 갈릴래아 서민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잠시나마 안락한 삶에 안주하고 싶어했던 베드로 사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그 빛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남아있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이 동반되었을 때 그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 9)

이제 예수님은 당신 앞에 기다리고 있는 고난의 현장으로 내려가십니다. 예수님 역시 인간적인 두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 앞에 다가올 죽음의 길을 거부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을 것이고,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느님의 뜻에 맞고, 모든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길임을 직감하셨기에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오늘 1독서의 아브라함 이야기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창세 22, 2) 이 얼마나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입니까? 늘그막에 얻은 자식과 즐겁고 안정된 생활을 하며 살려했던 아브라함은 갑작스런 하느님의 이 분부에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번제물로 바친다? 어느 누가 아들을 찌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후 살라 바치는 일을 멀쩡한 정신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겠지요.

그러나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12, 1) 했을 때 아무런 거부 없이 길을 나섰던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왜 그래야 하느냐’ 따져 묻지 않고 서둘러 길을 떠나 하느님의 분부대로 행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이 뚜렷한 믿음을 보시고 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22, 17-18)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진정한 축복, 부활의 영광은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길을 향해 용기 있게 떠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고통과 시련을 동반하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마저도 내어놓도록 요구할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나 자신과 세상을 위해 진정 이로운 길로 이끌어주시리라 믿는다면 한결 가볍게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8, 32)

이형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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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기억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잊히는 것에 대해 저항하며 살아갑니다. 잊히는 소중한 것을 간직하는 방법 중 하나는 ‘기억’입니다(P. M. Zulehner).

엄마, 아빠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놓치고 싶지 않은 현재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한 시간이 잊히는 것을 붙잡기 위해 기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기억했을 때 아이는 행복한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기억은 좀 더 근원적인 것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사건’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기억하며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바로 오늘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소개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며 황홀경에 빠집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지금 그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체 예수님께 그곳에 머물기를 청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예수님께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시자 지금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은 훗날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하는 동안 마주하게 될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제자들은 아쉽지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예수님을 따라 산을 내려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이 부활을 향해 힘차게 발돋움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는 산에서 내려와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힘 있게 증언합니다.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이처럼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사람들 앞에서 힘 있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기억인 것입니다. 아울러 언젠가 닥치게 될 수난과 죽음 앞에서도 그들을 붙잡아 줄 하느님의 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유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되풀이 되고 있는 너무나 소중한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거룩한 변모사건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갈 때, 우리들 또한 수난과 죽음 앞에서 당당히 신앙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서는 부활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 모두를 부활로 나아가게 하는 희망의 표지이며 소중한 기억임을 잊지 맙시다.

사공균 알로이시오 신부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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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무릉도원(武陵桃源)

‘무릉도원’(武陵桃源)이란 평화롭고 조용한 이상향(理想鄕)이란 뜻입니다. ‘무릉도원’ 이것은 도연명(陶淵明, 365-4270)의 ‘도화원기’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줄거리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晉)나라 태원(376-396) 연간의 일입니다. 무릉(武陵)의 어느 고기잡이가 시냇물을 따라 무작정 올라가던 중 문득 양쪽 언덕이 온통 복숭아 숲으로 덮여 있는 곳에 닿았습니다. 막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을 때라 고기잡이는 노를 저으며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복숭아 숲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습니다. 꽃잎은 푸른 잔디위로 펄펄 날아 내리고 있었습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이 숲은 어디까지 계속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며 노를 저어가다가 마침내 시냇물 근원까지 오자 숲도 함께 끝나 있었습니다. 앞은 산이 가로막혀 있고 산 밑으로 조그마한 바위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굴속으로 뭔가가 빛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겨우 사람이 통과 할 수 있게 뚫린 굴이었습니다. 고기잡이는 배를 버려둔 채 굴을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윽고 앞이 탁 트인 들이 나타나 보였습니다. 보기 좋게 줄을 지어 서 있는 집들, 잘 가꾸어진 기름진 논밭, 많은 남녀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들일에 바빴습니다. 이곳을 찾게 된 고기잡이도 그를 맞는 사람들도 서로 함께 놀라며 어찌된 영문인지 까닭을 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옛날 진(秦)나라의 학정을 피해 처자를 데리고 속세와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도망쳐 온 사람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이리로 찾아온 뒤로 밖에 나가 본 일 없이 완전히 외부세계의 교류가 중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마을 사람들은 묻고 또 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며칠을 묵고 난 고기잡이는 처음 왔던 길의 목표물을 기억해 가며 집으로 돌아오자, 곧 이 사실을 태수에게 알렸습니다. 태수는 보고를 받고 사람을 보내 보았으나, 고기잡이가 말한 그런 곳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유자기(劉子驥)라는 고사(高士)가 이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복숭아꽃이 필 때를 기다려 찾아가 보았으나, 무릉도원 사람들이 속세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골짜기에까지 많은 복숭아나무를 심어 두었기 때문에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무릉도원은 정부의 간섭은 물론 세금도 부역도 없는 별천지였습니다. 그래서 속세와 떨어져 있는 별천지란 뜻으로 무릉도원이란 말을 쓰게 되었고 또 이 무릉도원에서 주씨와 진씨 두성이 서로 사돈을 하여 내려왔다 해서 서로 사돈이 되는 것을 주진지의(朱陳之誼)를 맺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유래에 따라 ‘무릉도원’하면 별천지, 이상향, 유토피아, 천국 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살고 싶은 곳, 꼭 가고 싶은 곳을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황홀한 모습을 보고 ‘우리 함께 여기에 삽시다! 주님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엘리아를 위해서도…. 바로 무릉도원 같은 천국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습니다. 해발 575m, 평야 위에 투구모양처럼 우뚝 솟은 산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몸에서 휘황찬란 빛이 발하고 옷은 눈부시게 희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는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나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코 9,7)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뿅 갔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모세와 엘리아를 위해서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우리 함께 삽시다! 이 보다 더 좋은 데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이곳이 천국입니다. 무릉도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이런 변모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었겠습니까? 변모사건 전에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예고를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고, 우리의 주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돌아가실 수가 있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고 베드로는 펄쩍 뛰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부활의 영광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맛 배기로 보여주십니다. 이런 영광에 도달하기 위해선 십자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주님처럼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 할 수 있도록, 사순절 동안 스스로 기도하고 희생하며 봉사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뒤에는 무한한 영광, 부활, 무릉도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동교구 정상업 바오로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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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3.1 독립혁명일

어느덧 해가 바뀌고 희망의 봄이 찾아왔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축제를 여는 때입니다. 신명나는 잔치를 벌여야 하는 오늘, 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100년 가까이 기념하고 있는 ‘3ㆍ1 독립혁명일’(96주년)이 됐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로 갈라져 있으며,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외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과 반감을 갖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3ㆍ1혁명’은 전 세계, 우리 민족 역사에 크나큰 획을 그은 사건이라 생각해 ‘혁명’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자유, 평등, 존엄의 정신으로 ‘조선 독립!’이 아닌 ‘대한 독립!’을 외치며 소수의 지도자나 단체가 아닌 남녀노소, 가진 자와 가난한 이 등 모든 백성이 참여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은 ‘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조선노동당’, ‘조선의용군’처럼 말입니다. 그에 반해 자유주의(자본주의) 사상을 지닌 이들은 ‘대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어찌 보면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이들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이 신분제 사회를 근본으로 했던 ‘조선’이라는 국가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북한), 자주 독립을 외치는 이들은 서구열강에 권리를 빼앗기고 고통받던 시대의 국가 명칭인 ‘대한’(남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의문입니다.

이런 ‘이념’과 ‘실질’의 모순을 갖고 서로가 한 치 양보도 없이 각자의 가치관을 통해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남북, 동서, 빈부, 도농 간 골이 깊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철학자 에드먼드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우리의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대상 역시 의식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라는 인식론을 토대로 상대의 생각과 의견을 인정하면서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 갈등을 풀어가는 첫 단계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배려와 관계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과 십자가의 고통을 설명하신 후 거룩한 변모를 통해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새로운 운명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고,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에 반해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내려올 때 백성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단절하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사람들을 만납니다(탈출 34,34). 모세는 단절과 폐쇄적인 방법으로 ‘관계의 하느님’보다 초월적이며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을 나타냅니다.

가끔 본당 어르신들에게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이나 후손에 권할 수 있는 우리나라 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하고 질문합니다. 저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목민심서」를 첫 번째,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를 두 번째 자리에 놓습니다. 이유는 지도자 혹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국민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조건과 방법, 그들이 지녀야 할 마음 자세를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신자분들께서도 내년 4월 실시되는 총선 전까지 지도자의 덕목을 알 수 있는 「목민심서」를 한 번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1908~1932)와의 대화, 의거 당시 25세였던 윤 의사가 젖먹이 두 아들에게 쓴 편지가 있습니다. ‘3ㆍ1 독립혁명일’을 맞아 윤 의사가 남긴 편지를 소개하여 드립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가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의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론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론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예수님, 그리고 자긍심을 주신 독립투사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안동교구 박재식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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