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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예수님은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분이었습니다.
조회수 | 2,062
작성일 | 06.03.10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 모습이 변하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지어서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모시고 살겠다고 제안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제안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복음서는 오늘의 이야기로써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달은 바를 알립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이야기하여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문서가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에 대해 믿었던 바를 알려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 되게 하겠다는 의도에서 기록된 문서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언급하는 높은 산,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는 것, 옷이 빛나고 흰 것,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 이런 것들은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구약성서가 이미 사용한 표현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구약성서의 이런 표현들을 가져와 사용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할 때, 그들은 예수님 안에 모세와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킨 이유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만으로써 충분히 설명되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분부 말씀을 첨가하였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한 일에서 예수님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보태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신앙의 시조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르친 인물입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하느님은 세상의 권력자인 왕 파라오와 함께 계시지 않고, 천대당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믿고 이스라엘민족의 이집트 탈출이라는 일대 거사를 감행하였습니다. 그 거사의 성공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하신 기적으로 체험되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이런 해방과 구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분”(출애 33, 19)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행하신 일들이 과거 모세가 깨달은 하느님,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며,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과 죄의 장애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그들이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신앙이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쇄신하기 위해 노력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원초의 체험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왕과 제관들은 이스라엘 안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골몰하여 하느님을 왜곡하였습니다. 기득권자들의 횡포에 맞서서 그들을 비판하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선포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시대 기득권층인 율사와 제관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절대성을 강조한 나머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선하신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준수와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순종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그 시대 율사들과 제관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시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사람들이 자각하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지침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성전이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그것들은 하느님을 알리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짐스런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체험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깊이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는 데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해 보이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과시하거나 당신의 권위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제치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할 일을 다 하고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라고 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자유 안에 하느님을 살아 계시게 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나 한 사람 잘되기 위해 행사하라는 나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이 지닌 자유입니다. 인간에게 그런 자유는 이기적 아집(我執)이라 일컬어집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것은 자기 한 사람 혹은 자기가 속하는 집단을 위한 아집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득권자들의 오만방자한 횡포가 사회에도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 읽어낸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기적 아집을 벗어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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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오늘 사순 제 2주일의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 부활의 표지이며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영광스러운 변모의 장소로 숭배된 갈릴래아의 다볼 산에 천상적 두 인물이 나타납니다. 즉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나타나는데, 이들은 구약성서의 하느님의 사람들로서 유대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에게만 말하고 제자들에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을 위대한 분으로서, 고대된 분으로서, 모든 희망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광경에 매료된 제자는 초막 셋을 짓기를 제안합니다. 세 개의 ‘초막’은 초막절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기대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초막절의 축제 주간은 구원의 시기를 미리 기뻐하는 때였습니다. 제자들의 거룩한 두려움에 하느님의 음성은 예수님을 엘리야보다 위대하고 모세보다 더 위대하며 기대된 메시아와도 다른,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계시하십니다. 세례 때의 음성과는 대조적으로 이 때의 말씀은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하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그 후 곧 천상적 광경은 사라지고 무정하게도 지상의 것들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은 완성과 영광의 때가 아닌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먼저 걸어야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교회는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당하고 죽음에 놓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는 최초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비밀을 드러내 주는 것이고, 그분의 임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감추어진 그분의 영광을 현시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길을 옹호하는 것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적인 증명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 모두는 교회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낙심하지 말고 그 분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권고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그분의 부활의 전조이고 오직 부활을 통해서만 실제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영광스러운 변모는 제자들로서는 엄청나고 당황스러운 체험이었으며 그들에게 부활 신앙과 기쁨이 타오르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인정하시고 옹호하시며, 그분 안에서 결정적인 구원의 때가 시작되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부여하시는 표지입니다.

김영곤 신부
  |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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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래 모습을 찾아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라 불리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높은 산’(마르 9, 2)에 올라가 있습니다. 높은 산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시는 곳이자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세, 엘리야와 함께 있습니다. 이는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걸어가시며 우리를 돌보시는 분임을 깨달은 분입니다. 또한 그런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분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 나타났던 예언자들의 대표격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모세가 가르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길로 들어섰을 때, 그 잘못된 길을 버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돌아올 것을 부르짖은 분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모세가 저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듯이,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을,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가르침을 보여주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안에 이루어지도록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생명은 물 흐르듯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흘러갑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에 놀란 사람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은 세상 안에서 성사(聖事)가 됩니다.

우리는 막연히 우리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하느님이라는 우상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이기심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져다 줍니다. 이는 어리석음의 소치이며,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 살면 하느님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본래 모습은 겸손과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필종 신부
  |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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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것

창세 22,1-2.9,10-13,15-18
로마 8.31-34
마르 9.2-10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하느님께 뽑힌 사람들이었으며
믿음의 사람들이었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명에
끝까지 충실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울은 바오로가 되었으며
시몬의 아들 요한은 베드로라고 개명된 사실도 공통되네요.
이렇게 짚으니
세 분 모두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혹독한 시련을 기억하게 됩니다.

고향 땅에서
등 따숩고 배부르게 잘 지내고 있던 아브람에게
가나안을 향해 떠나라 하신 하느님께서는
모자람 없는 축복을 쏟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나이 아흔 아홉 살에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신 이후에는
믿음의 조상으로써의
혹독한 시험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배경과
최고의 지성을 가졌던 사울을 거꾸러뜨린 주님께서는
사울이었던 지난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십니다.

한갓진 갈릴래아에서 어부로 살았던 시몬의 아들 요한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
베드로로 살아간 시간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불리운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
마음에 선해지지 않으시나요?

차라리 아브람으로 머물렀다면
죄악에 빠진 소돔을 위해서
간을 조리며 전구를 청하지 않아도 속편했을지 모르고
차라리
아브람으로 지냈다면
손수 아들을 묶어 번제단에 올려놓는
그런 못할 짓을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바오로가 되지 않고 사울로 살았더라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말 못할 쌩 고생을 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명성과 존경과 부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여유로운 삶을 누렸을 법합니다.

하루치 양식을 위해 배를 띄우는 어부 요한의 삶도
부요하지 않지만 평화로웠을 것이고
큰 욕심 부리지 않으며
나름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실하고 안정된 인생을 꾸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각자 세례명으로 얹어주신 새 이름에는
우리네 삶이
이미 ‘하느님의 것’으로 분류되었다는 표지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십니다.
때문에 겁먹을 일은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삶이
세상의 것과는 동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하겠지요.

내가 가장 소중해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고
내가 힘들이고 공들인 것을
내어 놓아야 하고
너무 너무 귀한 그것을 버려야하며
도무지 없어서는 안 되는 것,
도저히 그것이 없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그 마지막 생명 같은 것마저도
잘라내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사악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자신이 먼저 죽게 해 달라고 졸랐을 것 같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라는 번민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 부분을 침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명령을 듣고
놀라고
고민하고
도망갈 궁리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들이 당하는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의아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택해 나아갈 때
함께 계시며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으신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그날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만으로
너무 너무 충분했습니다.
천사를 보내
당신의 명령을 거두어들이고
서둘러 ‘한껏 복’을 내리고
‘한껏 번성하게’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며 부르짖는 호소는
가혹하게 뿌리치셨습니다.
아들을 죽여
우리를 살리신 하느님의 사랑이
온 땅에 젖어드는 사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편이 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편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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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본모습을 찾도록 노력합시다

지난 사순 제1주일에 들었던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지녀야 할 마음 자세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사순 제2주일에 듣는 ‘새하얗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아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그리며 살아야 하는지 그 목표를 드러냅니다. 즉, 사순 시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자신의 잘못이나 지은 죄를 돌아보며 자중하는 시기가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예수님의 새하얗게 빛나는 본모습을 바라보며 그분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본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만 ‘새하얗게 빛나는’ 본모습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겨 ‘당신의 모습대로’ 만들어 내셨다면, 우리들의 본모습도 역시나 오늘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새하얗게 빛이 날’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본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본모습을 깨닫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들은 원래 ‘새하얗게 빛나는’ 존재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꼴을 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을 믿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하느님을 닮아 새하얗게 빛나는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음을 예수님은 보여 주십니다.

둘째,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새하얗게 빛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닮아 새하얗게 빛난다는 것을, 마치 우리가 영어를 배우거나 새 가전제품을 사듯이 우리에게 없는 것을 내 바깥에서 배우고, 구매해서 내 것으로 삼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방치된 창고를 정리하듯이, 내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게 뭐가 있는지, 쓸데없이 모아두고 있는 것들은 없는지 내면을 잘 살펴, 버리고 정리하고 깨끗이 닦아냄으로써 가능합니다. 원래 모습이란 말 그대로 본모습이라 바깥에서 찾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군가가 가져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새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들이 원래 간직하고 있던 본모습을 찾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종섭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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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 5)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는 가운데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스럽고 감격적인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면 베드로처럼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솔직히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서 머물고 싶은 곳은 고통과 절망이 끊이지 않는 산 아래보다는, 주님의 영광이 함께 하시며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지는 산 위의 그곳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자리를 버리시고 죽음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산 위의 영광을 뒤로하고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아픈 이들의 병을 낫게 하시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어둠과 좌절 속에 살아가던 이들의 삶에 희망의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 신앙인의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하게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받은 축복과 은총을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주님의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고 삶의 무게에 주저앉아버린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이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받은 행복을 자기들끼리만 나눠 가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깨닫고 체험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이웃과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우리가 삶으로 드러낼 차례입니다. 산 위에서 받은 축복을 그것이 필요한 이들과 산 아래에서 나눌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큰 축복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 모시고 산에서 내려가 그것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은총과 복을 세상 사람들과 기쁘게 나누십시오.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하신 우리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부산교구 이재석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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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춘천] 소명의 삶 살 때 은총 커진다  [2] 1814
659   [안동]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1] 1928
658   [마산] ‘소유’와 ‘무소유’  [2] 1881
657   [대구] 복음선포자의 자세  [3] 2533
656   (녹) 연중 제15주일 독서와 복음 [열두 제자를 파견]  [2] 1515
655   [춘천] 지금 내가 어떻게  1577
654   [군종] 그리고 다시 12년이 지나면  1514
653   [수원] 약한 자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  [1] 1771
652   [의정부]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1743
651   [대전] 교회의 자랑스러운 약점  1411
650   [부산]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도 있습니다.(?)  [1] 1703
649   [전주]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균형잡힌 마음을 : 불편심(不偏心)  [1] 2142
648   [수도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짝사랑  [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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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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