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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변모의 기쁨과 빛을 향하고 있는 사순 시기
조회수 | 2,282
작성일 | 06.03.10
오늘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주일이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베드로의 신앙고백(8,29) 후에, 그리고 수난에 대한 두 번의 예고(8,31-33; 9,30-32) 사이에, 즉 복음의 한 가운데(9,1-9)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 앞에 빚게 될 물의를 예방하려 하는 것이다. 고통과 죽음은 예수께 있어서 파스카로 가는 길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에 그리스도께 성금요일이 없었다면 환호하는 부활의 기쁨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사순 제2주일에 택한 이유는 마르코와 같이, 사순절의 여정이 비록 광야를 거쳐 피곤하고 어려운 길로 우리 자신을 끊고 극복해야하는 험난한 과정을 거치지만 결정적으로는 부활의 쇄신과 변모의 기쁨과 빛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새기도록 한 것이다. 사순절은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생기를 불어 넣어줄 사랑의 실천을 위한 자기극복을 지향한다.

제1독서: 창세 22,1-2.9a.10-13.15-18: 이사악의 희생

이렇게 1독서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이사악의 희생(22,1-18)은 생명을 바친다는 사실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범죄행위이다. 이사악의 희생의 의미는 다름 아닌 생명의 포기와 희생은 사랑에서 왔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에 대한 증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천사의 말씀이었다(12절).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아브라함에게 무수한 자손을 약속하신다(16-17절). 이렇게 생명의 포기와 희생에 의미를 주는 것은 사랑뿐이다.

복음: 마르 9,1-9: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보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여기서 초막의 의미는 결정적으로 하느님 안에 쉬는 '종말론적 안식'의 환희와 기쁨을 예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는 매일 있을 수 있는 유혹들을 그저 회피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해야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영광에 오르셨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 44.).

예수님의 변모시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부활 때 천사는 순백의 옷으로 나타난다(16,5).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예외적이고도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구약성서상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즉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아 산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15,39)는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제2독서: 로마 8,31b-34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2독서에서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입증해 준다: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31-32절). 이사악의 사건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었다. 그리스도께는 대신 희생될 수양이 없었지 않은가!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서까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도 영구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주시는 분이십니다"(34절). 이렇게 보면 항상 주제는 같다. 즉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표는, 비록 사랑의 고통스러운 시련은 겪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기쁨과 아름다움과 생명을 달성하는 것이다.

주님의 변모는 그분의 고통과 기쁨, 능욕과 영광의 신비이며, 우리 인생의 신비를 더 잘 이해시켜주는 '빛의 순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때, 즉 말씀을 실천할 때, 말씀을 살 때, 우리 자신의 존재도 변모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일에 있어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체험을 하면서, 즉 구원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순절의 근본 의미이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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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난 한 가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기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계속 남아달라고 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셨다. 예수님이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뜻은,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일때 비로소 영광스러운 승리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길 원하신다. 그 길은 우리 각자가 자신 앞에 놓인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결심을 해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난’은 무엇이 있을까? 실천할 수 있는 수난이어야 하겠다. 수난을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수난하리라 결심하셨기에 “하느님의 아들”이라 선포되셨고, 동시에 수난의 실천을 통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는 고백을 받으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쉬운 ‘수난’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도하러 성당에 가는 것이다. 내가 가진 가장 유리한 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집에서 성당에 가는 거리가 가장 짧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에 가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기도를 사제관에서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 것이다. 물론 사제관에서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난 한가지가 주님이 현존하시는 성당에 머물러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성당에 도착한다. 따라서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 된다. 예수님은 초막을 드리겠다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셨건만, 우리는 그동안 이 길을 걷지 않고 너무 초막 안에서만 편하게 있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이제 짧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 영원한 초막이 되어주실 주님 앞에 앉는다. 성당으로 가는 ‘수난’을 마치자 아무도 없는 성당의 십자가가 쓸쓸하게 느껴진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조배하는 사람들과 있는 시간보다는 성당에서 혼자 계신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또 하나의 ‘수난’의 예감이 나를 감싼다. 성당에 좀 더 오래 머물러 있자는 것이다. 왠지 ‘수난’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질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나는 거룩하게 변모되어지지 않을까.

강버들(F.하비에르) 신부
  |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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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생명성

신학생 때 여름 방학은 이태리 한 본당에 가서 있으면서 여름 산간학교에 따라 갔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험한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였습니다. 개울도 건너고 경사진 곳도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특별히 한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비탈을 무서워서 못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는 일도 없고 해서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그 아이를 번쩍 집어서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함께 갔던 주일학교 교사들이 저를 안 좋은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선생님들이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 안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가 홀로 해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가 빼앗은 것입니다. 저처럼 안쓰러워서 도와준다면 아이는 점점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면 스스로 해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의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겉에서 보기엔 아주 얇은 막이지만 그 안에 있는 병아리가 나오기 위해서는 발악을 해야 합니다.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안에 있는 병아리만이 알 것입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가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엄마보다는 말 못하는 아기가 더 고통스럽게 태어나는 것이고 엄마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아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제왕절개를 해서 더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면 모르겠지만 사실은 정상적으로 고통을 느끼며 태어난 아기가 더 건강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기를 위해서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태어날 때부터 그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누에고치라면 나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태어남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남의 고통은 누구도 대신 겪어줄 수 없고 이것을 예수님은 ‘세례’라고 표현하십니다. 죽음과 새로 태어나기 위한 고통을 겪어야 그런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진리를 오늘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느리고 힘들어보여서 저는 나비만 빼서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나비는 마치 누에모양으로 쭈글쭈글해져 있었고 날개도 누에모양으로 오그라져있어 좀체 펴지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나비의 노고를 줄여주기 위해 살짝 입김을 불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하게 날개가 빨리 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것에 재미가 들려 바람을 불어주었습니다. 물론 마음 안에는 이렇게 하면 나비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실험삼아 계속 해 보았습니다.

나비는 드디어 조그만 공간 안에 움츠리고 있던 날개를 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날지를 못했습니다. 날개에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 기억으론 결국 그 나비는 날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고 스스로 날개를 펴지 못한 나비는 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새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도 겪어줄 수 없는 고통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왜 구약의 많은 위대한 성조들 가운데 오직 이 둘만이 예수님께 나타났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새로 태어남이 이 둘의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과 예수님은 겉은 영광스러운 모습이지만 사실 ‘출애굽’, 즉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시나이산 부근에서 40년을 숨어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타는 덤불로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모세는 기가 막혀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모세가 야훼께 "주여, 죄송합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고 당신께서 종에게 말씀하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 하고... 모세가 다시 "주여, 죄송합니다.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십시오." 하고 사양하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크게 화를 내시며...”

모세는 좀처럼 백성들을 구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도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당해야하는 수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모세가 처음에 거부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하시며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죽음의 골자기로 내려가십니다.

모세가 이집트 땅에 내려가 거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온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어 지옥에 내려가 당신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훨씬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엘리야 역시 처음엔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으로부터 구해내기를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다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엘리야만을 남겨놓으십니다. 이스라엘엔 심한 가뭄이 들게 하고 엘리야는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머물게 하십니다.

3년 반이 지나고 아합과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 간의 운명의 결전이 갈멜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송아지를 잡아놓고 그 위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편이 참 하느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야가 이겼고 그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였습니다.

우상이 사라지자 이스라엘에는 비로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불과 비는 성령님을 나타내고 엘리야는 성모님을 나타내고 희생제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어쨌든 자신들이 믿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말에 이세벨은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엘리야는 우상숭배를 없애 은총이 땅에 내려오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참을 도망 다니다가 너무 힘들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는 죽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우상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것과 같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셋의 사명이 서로 공통되고 그 공통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고통 없이는 무엇도 새로 태어날 수 없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을 깨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살리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기에 자신이 받아야합니다.

고통의 생산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고통 없이 자신은 물론 어떤 누구에게도 생명을 선사할 수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의 영광은 그래서 수난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순을 지내고 있는 지금 우리, 우리가 겪어야하는 고통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고통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알을 깨는 고통들입니다. 이것을 이겨낼 때엔 타볼산의 예수님처럼 더 영광스러운 나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을 지향하는 성인들은 항상 ‘저에게 멸시와 고통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우리도 ‘고통 안에 숨어있는 생명성’을 묵상하며 사순 2주간을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신부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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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늘나라 마전장이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서 하얀 천으로 된 요와 이불 홑청을 빨래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불 홑청을 긴 시간 잿물에 담가 놓았다가 잘 헹구어서 발로 밟고, 다듬이로 두드리고, 손으로 당겨 펴서 좋은 햇볕에 널어 잘 말리면 참으로 눈부시게 하얀빛이 감도는 천으로 변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가 하시는 대로 따라서 밟고 두드리고 잡아당기고 하였는데, 어느새 하얗게 변한이불 홑청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날 밤 새로 빤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할 때 느꼈던 행복은 지금 생각해도 절로 미소가 떠오릅니다. 요즘은 워낙 성능 좋은 표백제가 많이 나와서 예전의 수고로움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상대적으로 어린 시절 새하얀 새 이불이 가져다주었던 행복한 감정은 느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미리 예고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 셋을 따로 불러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시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옷은 그 어떤 마전장이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앞으로 당신이 차려입을 영광스러운 옷을 미리 보여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겪게 되는 수난과 죽음의 과정이 바로 이 새하얀 옷을 마련하는 방법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보고 배우라는 가르침의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찮은 이불 홑청도 하얗게 만들기 위해서는 잿물에 담그고, 물로 헹구고, 발로 밟고, 손으로 두드리고, 잡아당기고, 널어 말리는 수많은 과정이 필요한데, 하물며 부활의 영광을 입는 그 옷을 마련하는데 있어서야 어찌 더 큰 수고로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모욕과 박해를 견뎌내고 죽음의 강을 건너가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이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손수 하늘나라 마전장이의 모범을 보여주려 하십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아무리성능 좋은 표백제를 사용한다 해도 부활의 영광에 합당한 옷을 마련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가르쳐주신 그 방법 그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면서 판공성사가 한창입니다. 그동안의 삶의 자리를 성찰하면서 부족했던 모습들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가운데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갈수록 고해성사도 성능 좋은 표백제를 선호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듣기 좋은 소리해주고, 짧고 간단하게 해주고, 쉬운 보속 주고……. 과연 그렇게 하고 고해소를 나오면 행복합니다.

<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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