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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갑시다
조회수 | 2,124
작성일 | 06.03.10
고해성사를 듣다 보면, 인생이 십자가의 연속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저마다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그들을 바라다보면, 연민의 마음과 함께 우리네 인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나는 것인가를 되묻곤 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삶도 참으로 고달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그런 착잡하고 혼란한 마음에 잠시 쉬고 싶어지셨을 것이다. 그래서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신 목적이 기도하러 가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루카 9,28).

당신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하시고,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비장한 말씀을 하신지 여드레 동안 많은 갈등을 겪으신 듯하다. 더욱이 제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외로움이 더욱 심했으리라. (베드로가 엄한 소리했다가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것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마르 8,31이하).

아마도 예수님은 산에 올라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을 것이다. 당신이 겪어야 할 고통의 의미에 대해 명상하고 또 명상하셨을 것이다. 아버지 하느님께 당신이 겪어야 할 수난을 없애달라고 담판이라도 지우고 싶었으리라. 아니면, 하소연이라도 하려 하셨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애절하게 ‘기도하시는 동안’ (루가 9,29)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것이다. 근심의 그늘에 어두웠던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되었다’(마태 17,2). 당신이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의 커다란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고 새로이 하신 것이다. 비록 아직 끝나지 않은 수난의 여정이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느낀 그 순간부터는 이미 부활에 대한 기쁨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역시 일상에 지치고 힘겨워 하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무의미한 반복의 연속을 살아가는 듯 보인다. 도대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과 초라한 내 삶의 현실사이에서의 갈등은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내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모습은 위로의 기쁨으로 밝게 변화하게 될 것이다.

삶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예수님을 따라 고통과 대면하는 산으로 올라가자! 높은 산에 올라, 하늘을 가까이 하듯, 세상의 근심을 잠시 접어 놓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명상하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 묻고 또 물어보자. 내 영 안에 작은 변화의 울림이 생겨날 것이다. 거기서 십자가를 넘어서는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정승익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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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보답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세 제자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그분 신성의 광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계약의 선구자요 하느님 영광의 두 증인이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목격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신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9,31)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이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실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지만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저희끼리 서로 물어봅니다.”

이 마지막구절을 보면, 겟세마니에서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 세 제자들마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그분의 파스카 신비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분의 참혹한 십자가상 죽음을 보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16,16) 라고 고백했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뒤따르는 아버지의 말씀이 그 믿음을 확고하게 하면서 “그의 말을 들으면”언젠가는 그들도 아드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모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이 변모사건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요한3,16)하신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아드님의 사랑, 곧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예레31,3)의 한 현현(顯現)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모사건 때의 사도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 승천하여 성부 오른편에 계신 그분께서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교회헌장11항)인 성체성사를 통해 미사 때마다 우리에게 오시고 당신의 신성과 인성으로 성체 안에 참으로 현존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별말씀을 하시면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고……다시 오겠다.”(요한14,18)고 하신 바로 그분이시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하신 그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오늘날에도 성체 안에서 당신 제자들의 배반과 저버림을, 멸시와 모욕과 채찍질과 못질을 수없이 당하고 계십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시42,1)우리에 대한 성체 예수님의 그리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목마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1요한 4,8.16)이시고 사랑은 일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자주 받아 모시고 찾아뵙고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그 무한한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아니겠습니까?

심재형 세례자 요한 신부
  |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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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성공하고 싶으세요? 아니면 실패하고 싶으세요? 아마 백이면 백 모두가 다 성공을 지향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제까지의 우리 삶은 계속해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걷기 시작했을 때 지금처럼 잘 걸었을까요? 아닙니다. 잘 걷고 싶었겠지만 내 뜻과는 달리 걸핏하면 바닥에 넘어졌을 것입니다. 한글을 처음 배울 때는 어떠했을까요? 지금은 글도 쓰고, 말도 잘하지만 처음에는 글도 제대로 못쓰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지금 수영을 잘 하시는 분들은 스스로를 생각해보세요. 처음으로 수영 배울 때는 어떠했나요? 아무리 수영을 잘 하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또 몇 명은 물에 빠져 거의 익사할 뻔 했을 것입니다. 또 처음으로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을 때 제대로 공을 맞힐 수 있었나요? 쉽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공과 방망이는 왜 이렇게 친하지 않은지 계속해서 헛스윙만 하는지요.

그렇다면 걸음마를 잘 못한다고 해서 바보라고 말해야 할까요? 갓난아기가 한글을 잘 읽지 못한다고 해서 멍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처음으로 물에 들어가는 친구가 박태환 처럼 수영을 못한다고 해서 운동신경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김광현 선수가 던진 공을 내가 야구 방망이로 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까요?

사실 실패라는 것은 더 나은 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즉, 실패는 내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영양제입니다. 문제는 다른 이들과의 끊임없는 비교에서 오는 소극적인 마음 때문에 실패를 숨기려 하고, 실패를 외면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을 더 나은 나로써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지요. 더군다나 자신들뿐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는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전교여행이 결코 쉽지는 않았겠지요.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다녔던 힘들었던 시간들이 떠올려졌을 테고,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무시무시한 수난과 죽음의 걱정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힘들었던 시간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실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 머무르자고 예수님께 제안을 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실패를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제자들을 향해서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실패의 삶처럼 보이지만 또한 너무나도 힘들고 지친 이 길이지만, 하느님께서 굳게 믿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도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다 실패로 보입니다. 또한 모든 것이 피하고만 싶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부활을 위해 있는 것처럼, 실패처럼 보이는 우리의 삶도 영광의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따르는 것.”

그럴듯한 모습으로 꾸미기 보다는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보이는 편이 훨씬 더 성공적이다.(다케무라 겐이치)

조명연 신부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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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지난겨울 신학생들과 함께 살면서 키운 체중을 이제는 줄여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신기한 것은 체중이 늘 때는 저도 모르게 그리고 아주 빠른 시간에 이루어졌는데, 체중이 줄어드는 것은 체중이 느는 것과는 달리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음식 조절을 하는데 그리고 운동도 많이 하고 일도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몸무게에 도달하니 좀처럼 줄어들지 않네요.

아무튼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하긴 그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이것 하나뿐이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내 뜻과는 정반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 바로 잡아 보려고 하지요. 그러나 바로 잡히나요? 나의 의도와는 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너무나 많지 않았나요?

어제는 새로 꾸며진 성지 쉼터에 어떤 분이 기증하신 철쭉과 회양목을 심었습니다. 심기 전에 저는 머릿속으로 구상했지요. ‘이렇게 심으면 멋지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심었습니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저의 생각을 다시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심어야 하는 그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땅 속에 박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저의 힘으로는 도저히 옮기는 것이, 아니 심지어 땅 밖으로 빼는 것조차 불가능했거든요. 만약 저의 구상을 바꿀 수 없다면서 무조건 그 자리, 즉 돌이 박혀 있는 그 자리에 나무를 심으면 어떻게 될까요? 뿌리를 내릴 수 없으니 분명히 죽고 말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번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제자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것도 수제자라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모습을 본 뒤에 그곳에 그냥 눌러 살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길만이 아닌 것이지요. 오히려 남들이 피하고 싶은 고통과 수난의 길인데, 그들은 영광스러운 길만이 좋다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 안주하자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예수님의 길인 십자가의 길. 제자들은 그 길을 아직 보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과는 반대로 말했던 것입니다.

결국 나의 생각과 뜻이 항상 정답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숨어있는 주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교만하고,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나의 부족한 이 머리로 판단하고 단죄하였던지요?

사순시기의 제2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깊어가는 이 사순시기. 더욱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겸손한 내 자신을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함부로 그리고 섣부르게 말하지 맙시다.

조명연 신부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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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

사순 제2주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나옵니다. 타볼산으로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옷이 하얗게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십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가 두려운 나머지 초막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게 드리겠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겪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중에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들려온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들려오던 목소리가 지금 예수님께서 변모 중에도 들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하나의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또 다른 시작을 나타내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으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수난 예고를 해주십니다. 또한,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는 스승의 모습을 본 제자들은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당신께서 수난 하시고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실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마 타볼산으로 데려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적으로 나약한 마음을 가진 제자들이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 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절망적인 사건이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날에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믿고 있고 그것에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이기에, 피조물이기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다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여 같이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2000년 전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으로 부활하여 같이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많이 슬퍼하고 가슴 아파합니다. 더는 볼 수 없다는 것과 살아계실 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족들과 친구들은 죽음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죽음 앞에서 슬픔과 무기력함에 잠겨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여 같이 살 것이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수난 전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통해 절망에 빠진 제자들과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삶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해주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무기력한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런 믿음과 마음을 하느님께 기도 안에서 정성껏 청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범율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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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수님을 위한 조연, 우리들

최근 유행하는 영화들을 보면 관객 동원수가 수백만에서 천만을 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력과 시나리오의 탄탄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영화배우의 푸념처럼 기획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영화는 우리나라 개봉관 스크린의 절대다수를 한꺼번에 차지해서 흥행을 한다. 영화를 보러 간 관객들의 선택 폭이 좁아들 수밖에…….
인기몰이를 하는 영화를 보면 내용의 구성이 탄탄한 경우도 있겠지만, 주연배우의 인지도나 연기력도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한 가지 더, 주연배우를 빛나게 해주는 조연배우나 카메오, 우정출연 배우들의 역할도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예수님은 생애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만 보아서는 그 생애의 주인공이시고 또한 우리가 지금 사는 교회의 주인공이다.

예수님이 주인공인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것은(물론 예수님은 그 자체로 빛나시지만), 조연인 우리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조연 배우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예수님 출연의 영화는 빛을 잃고 말 것이며 교회의 빛도 사라질 것이다. 예수님 출연의 영화, 예수님 그분의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조연으로서의 우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주연이 되고 그 역할도 잘 해 나갈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됨으로써 빛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우리는 그분이 출연하신 영화 속의 조연이 된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우리는 우리 삶의 주연이 되는 것이다.

본당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사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주연의 모습이 되고,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본당의 손님이나 이방인이 아닌 주인이 된다.

주인은 쓰러져가는 집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집을, 모든 것을 융성하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다.

예수님을 위한 조연인 우리들이 삶의 주연의 생활로 예수님의 변모와 같은 변화되는 삶을 체험하자.

사순절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그분을 향한 생활의 변화가 요청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의 기도와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생의 영화는 미완성이다. 사순시기는 우리가 우리자신의 출연 영화를 완성하고 변화시켜 예수님의 모습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하는 시기이고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찾고 따라야 하는 시기이다.

<인천교구 주세익 요한 세례자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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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박벌은 하루에 200Km이상을 날아다닐 정도로 아주 부지런한 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뚱뚱한 몸통, 그리고 날개는 작고 매우 가벼워서 못난이 벌이라는 소리도 듣지요. 그런데 이 몸통과 날개를 연구했던 곤충학자들은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뚱뚱한 몸통과 작고 가벼운 날개를 보면서 도저히 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잘 날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날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자신이 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랍니다. ‘날 수 있을까?’라는 궁리보다는 ‘꿀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하루 종일 날아다니면서 꿀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호박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가능이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불가능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어디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까? 혹시 불가능하다면서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에도 해당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 일이 먼저이고 주님의 일은 나중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변모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신의 신성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우리들이 나중에 받을 영광의 자리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라는 영광의 장면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변모가 이루어진 공간은 ‘높은 산’이었습니다. 물론 타볼산이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제한적인 공간을 떠나서, 그 높은 산은 세상의 사람들과 분리되는 곳이며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곳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래쪽에 머물러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높이 올라간 사람들 앞에서 변모하셨다는 점이지요.

과연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높은 곳을 어렵고 힘들다면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래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자신의 입맛에 좋은 것만 그리고 편한 것만을 따르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제1독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의 뜻이 더 우선이기에 그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굳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뜻은 아래쪽에 있지 않고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입장만을 따른다면 결코 높은 곳에 오를 수 없으며, 주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셨던 그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거룩한 변모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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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   [수도회] 이혼, 그 뜨거운 감자  [1] 661
684   [원주] 휴가증  73
683   [부산] 창조 사업을 함께 하는 남녀  [5] 2196
682   [인천]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6] 2374
681   [서울] 남자의 감격  [6] 4365
680   [대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1] 2220
679   [마산] 기도의 보루(堡壘)로 진을 치자  [4] 2273
678   [안동] 사랑의 공동체 가정  [2] 2068
677   [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4] 2465
676   [광주] 혼인은 새로운 탄생  [1] 2174
675   [전주]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맺어준 사건, 혼인  [2] 90
674   [대전]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2] 2235
673   [군종] 4주간의 탐색기간을 드리겠습니다  1936
672   [춘천] 최고의 기적  [2] 2370
671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3] 107
670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3] 1657
669   [부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단  [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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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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