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21.6%
[마산]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조회수 | 2,729
작성일 | 06.03.10
예수님은 예루살렘에로 가시는 도중에 당신의 모습을 변화시키시며 신적(神的)인 면모를 보여주신다.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려는 배려이다. 성부께서는 구름 속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셨다. 나에게 있어 예수는 누구인가? 나는 참으로 그의 말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이 내 삶 속에 들어와 있는가?

1. 오늘 복음의 위치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로 가시는 여행 중에 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고 물으셨다. 그 때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마르8,27-38) 그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타볼산에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셔서 갑자기 모습이 변하여 당신의 눈부시고 황홀한 신적(神的) 면모를 들어내신 것이다. 이는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당신의 수난을 대비하여 제자들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2. 인간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우리들처럼 배고파하시고 피곤해하시고 때로는 슬퍼하시고 분노하시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보아왔을 뿐이다. 말하자면 인간 예수를 보아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 제자들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그분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그분은 아니었다. 베드로는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아들, 성자로서의 신적(神的)인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位格) 안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함께 조화되어 있음을 믿고 고백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란 '홍길동'처럼 성(姓)과 이름(名)이 아니다. '예수'란 우리와 꼭 같이 여자의 몸에서 나시고, 나자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사신 그 인간 예수 즉 그분의 인성(人性)을 일컬음이고, 그리스도(Chritus)는 메시아 즉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신성(神性)을 일컫는 이름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호칭 자체가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시다”는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이 “인간이시며 또한 하느님이시다”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3.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베드로가 황홀경에서 정신을 못 차린 채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모세께 드리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그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가 바로 당신의 아들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신 성부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봐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는 어떤 분인가?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예수는 어떤 분인가?” 예수에 관한 나의 생각은, “예수는 석가모니나 공자와 더불어 인류의 큰 스승 중의 한 분이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지나 않은가?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이시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그분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그분처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4.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수는 나의 삶과 연관이 있는 분인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어떤 결정에 있어서 예수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정말 하기 싫어 미치겠는데, 예수 때문에, 그분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서 꾹 참고 해 내는 일이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정말 해보고 싶은데 예수 때문에, 그분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포기하는 일이 있는가? 한마디로 예수는 내 삶 속에 들어 와 있는가? 아니면 내 머리 속에, 기억 속에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나의 생활 속에까지는 들어 와 있지 못하는 그런 분은 아닌가? 아니면 '예수'라는 이름은 기억하고 싶지 않는 이름은 아닌가? 나는 그분과 아무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사는 삶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예수를 믿는 신앙인 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이다.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삶은'신앙생활'이라기보다 '취미생활'이라고 해야 할 수준이 아닌가?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예수님은 나의 삶 속에 들어와, 내 삶의 중심이 되어 있는가?

유영봉 몬시뇰
450 21.6%
위대한 인류의 선각자, 삶의 모범이며 고매한 인품의 대사(탁덕)님께 드리는 강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주보는 교구의 여러 신부님들께서 돌아가면서 글을 쓴다. 순서대로 돌아가는데 사순2주일 강론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사순2주일 강론만 썼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참 희한한 생각이 드는 걸 참기 힘들다. 글쓴이가 150여명이 있는데 순서대로 돌려서 52주간 중에 세 번 연속 같은 주간이 찾아올 확률이 얼마일까? 수학하고는 거리가 멀기에 수학선생님이 계시면 계산을 부탁한다. 로또 1등 당첨될 확률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보고 이번에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내가 얼마나 회개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손톱만큼의 미동도 없이 변화되지도 않았기에, 얼마나 석두(石頭)이기에 같은 말을 여러 해 동안 반복해서 듣게 하시는가?’

얼마 전 잘 알고 지내는 신자분(나를 추종하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다. “대사님!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사”, 교회에서 베푸는 전대사도 아니요 깊은 절에 살고 계시는 고승도 아니다. 이 말은 대형사고의 준말이다. 그렇다. 내 인생이 그랬다. 내가 사고치지 않으면 사고는 없다. 또 어떤 분에게 이런 말도 들었다. “신부님은 다리도 좀 길어지고, 얼굴이 좀만 더 잘생겼어도 할 게 하나 있어요.” 차마 내 입으로 말을 하기는 싫다. 여러 신부님들의 사회적 지위와 품격에 손상을 주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신부라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 것이다. 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제단의 문제로 확대되니 말이다. 그래서 반성한다. 나만 회개하고 변화되면 된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세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대부분 나의 문제임을 어슴푸레 깨닫는다.

나는 강론대에서 겁도 없이 큰소리치며 살았다. 무지해서 큰소리쳤고 어설퍼서 큰소리쳤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나의 어두운 모습과 부족한 부분을 감추어주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바랬고, 신자분들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외쳐왔다. 소리의 방향은 언제나 타인이었다. 내가 강론대가 아닌 신자석에 앉아있었던 시절에는 착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론대에 서는 순간부터는 온갖 사기, 공갈, 협박, 위선으로 내 삶을 채웠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돌이키지도 못하고 살고 있다.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큰소리치는 베드로 대사님에게도 세 번이나 “너는 회개했느냐? 너는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 같다. “너는?”이라고.

반성한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삶의 모습 중의 하나가 돌아보는 자라고 들었다. 지혜로운 노인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반성할 때는 거울 앞에서 하십시오.” 매일 거울을 본다. 그리고 오늘도 거울 안에 있는 자를 보고 이렇게 말을 건넨다. “대사님, 너나 잘하세요.”

전동혁 신부
  | 03.07
450 21.6%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자!

옛날, 어떤 마을에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죽을 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도사가 나타나 유일한 비법을 말해주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삶아 아버지께 드리라는 것이었다. 부부는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그렇게하여 아버지 병을 낫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제 밤에는 훈장님이 서당에서 합숙하자고하여 이제 오는 길입니다”고 말하면서 죽은 아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하는 부부에게 도사가 또 나타났다. “부부의 극진한 효심을 보고, 어제는 신령님이 여러분에게 동자삼(童子蔘)을 보내주신 것이오”라고 일러주었다.

1독서의 내용도 비슷하다.

아브라함은 늙으막에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명을 받았다.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었지만,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온 아브라함은 그 말씀대로 실행했다. 모든 것을 갖추고 모리야 땅으로 가서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들대신 덤불 속의 숫양을 제물로 바치게했다.

두 이야기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각각 신령님과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이다. 그 순종은 그들이 가졌던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확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누구나 희생의 몇배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얻는다. 예수님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당신 자신을 십자가 제물로 바치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에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어떤 마전장이도 흉내낼 수 없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에 황홀해하면서 계속 머물고싶어 했다.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이 사랑받는 아들 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살리기위해 아들까지 희생시킨 젊은 부부처럼, 또,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려고한 아브라함처럼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한다. 그리고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도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많은 복도 받게될 것이다.

최봉원 야고보 신부
  | 03.03
450 21.6%
[마산]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

우리는 종종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 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늙은 나이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가 아니었던 아들 이사악의 마음에서 그 답을 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나 아버지에게 목숨을 내어놓기 위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아들의 마음이나 다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사악이 내렸던 그 결단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하게 여기시고 그 마음을 기쁘게 받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당신에게는 그런 마음만으로 충분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인간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위해 외아들을 제물로 내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은 이해해 보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우리의 이해가 머리로 끝나 버리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께서 충분하게 여기시고 받아 드리실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단지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쉽고 편안해지기만을 청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변모 앞에서 초막을 짓고 살자는 베드로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는 이 사순 시기는 예수님과 함께 초막을 짓고 산에서 머무는 시기가 아니라, 산에서 내려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동참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시기가 마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는 그 사랑 안에 푹 잠기게 만들어 주는 시기임을 알고 있습니다.

<마산교구 진선진 마태오 신부>
  | 02.28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수원] 진정한 권위는 봉사와 사랑에서 
!   [광주]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봉사하는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   [부산]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   [인천] 그리스도교적 모든 권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봉사적 권위이다. 
!   [서울]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1]
703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섬기러왔다]  1587
702   [부산] 공수래 공수거  [5] 2344
701   [수도회] 자기 해방의 여정  [5] 1976
700   [수원]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  [5] 2216
699   [대구] 내 깡통  [3] 2120
698   [군종] 부자와 하느님 나라  56
697   [서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6] 2140
696   [의정부] 소유와 나눔  [4] 2246
695   [안동] 부족한 것 하나  [2] 1077
694   [마산] 나눔의 훈련을 하자  [4] 1935
693   [인천] 거지는 ‘하느님의 배려’  [5] 2202
692   [전주] 영원한 생명  [2] 2138
691   [광주] 우리의 봉헌은 떳떳한가. 그러면 무엇이 내 것입니까.  [1] 65
690   [춘천] 나눔 + 버림 = 영원한 생명  [4] 2346
689   [원주] 영적법칙  [1] 71
688   [대전] 그 놈의 돈이 뭐길래  [3] 2443
687   [청주] 부족한 한 가지  88
686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4] 1576
685   [수도회] 이혼, 그 뜨거운 감자  [1] 661
684   [원주] 휴가증  74
683   [부산] 창조 사업을 함께 하는 남녀  [5] 2196
682   [인천]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6] 2374
681   [서울] 남자의 감격  [6] 4365
680   [대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1] 2220
679   [마산] 기도의 보루(堡壘)로 진을 치자  [4] 2274
678   [안동] 사랑의 공동체 가정  [2] 2068
677   [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4] 2466
676   [광주] 혼인은 새로운 탄생  [1] 2177
675   [전주]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맺어준 사건, 혼인  [2] 92
674   [대전]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2] 2235
673   [군종] 4주간의 탐색기간을 드리겠습니다  1936
672   [춘천] 최고의 기적  [2] 2371
671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3] 107
670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3] 1657
669   [부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단  [2] 1823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