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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높은 산에 오르다 : 십자가를 향하여
조회수 | 2,217
작성일 | 06.03.10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우면 산에 자주 오릅니다. 산에 오르는 동안 소음 속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수 있고 뒤엉킨 생각의 실마리도 조금은 정리되기도 합니다. 복잡한 세상에 얽매여 살다가 어쩌다 한 번쯤 높은 산에 올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 번쯤 내려다본다는 것은 마음에 새로움을 가져다줍니다.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밤낮 자기가 사는 세상만이 전부인 줄 알고 별것도 아닌 세상사에 얽매여 아웅다웅 거리던 내 삶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속에 있는 모습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비장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당신이 당하실 수난과 죽음이 패배의식이나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임을 미리 알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가시게 될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과 함께 준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 뜻밖의 체험을 한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베드로는 변모하신 예수님을 대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며 엉겹결에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나선 높은 산에서 세상과 전혀 다른 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베드로에게 산 아래에서 겪어야 했던 혼란과 고단한 삶을 깨끗이 잊게 해주는 체험이었고 그래서 ‘그냥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높은 산에서 보면 세상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끔 산에 오르면 세상의 시름을 다 잊고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도 커집니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나 혼자만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갈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수는 그것이었습니다.

나 혼자만의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에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 눌러 앉고 싶은 욕망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이루는 데에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고 계시지만 베드로는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나 혼자만의 평화와 안락을 위한 일에 머물고 만다면, 그것은 신앙을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만드는 일이며 하느님을 자기만족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교만한 삶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생활할 때 어느 중국인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주인을 따라 문간에 있는 방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불당처럼 꾸며진 그 방에는 수많은 성상들이 가득했습니다. 크고 작은 부처님상들 옆에는 성모상과 예수님 상,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신상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상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사람이라서 나는 그 친구에게 “취미가 다양하네. 이렇게 여러 가지 성상들을 모으는 것도 취미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음. 이중에 아무나 영험한 분이 나에게 복(福)을 주면 되니까…” 나는 그 친구의 영악한 신앙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자기중심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있으며, 참된 변화를 위해서 겪어내야 할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제안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지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세분이 함께 머물 초막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움켜쥐고 자신이 바라는 평안을 누려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겠지요.

자기만족과 안락 속에 주저앉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길을 나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에서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위안과 위로는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잘 따라 걷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힘입어 산에서 내려와 그분이 가신 십자가를 향한 길을 함께 걸어갈 때 그분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김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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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찬란히 빛나는 모습으로 변하셨다. 그때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구름이 그들을 덮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났다. 제자들이 둘러보자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들은 몰랐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그분의 신성(神性)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예수님이 치르셔야 할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의 영광과 승천, 재림을 예시한 것이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어떤 맹인이 이웃집에 놀러 갔다. 밤이 되어 돌아가는데 그 집주인이 등불을 주었다. 맹인은 조롱한다고 여겨 화를 버럭 내었다. 주인은 "당신은 소용이 없을지 모르나,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은 그 등불을 보고 피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

맹인은 등불을 받아들고 어두운 길을 더듬어 가다 웬 사람과 '쾅'하고 부딪혔다. 맹인은 "눈 뜨고도 등불이 보이지 않소?"하며 호통을 쳤다. 부딪친 사람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불은 무슨 불이요. 당신은 꺼진 등이 보이지 않소?"하고 답했다. 맹인은 더이상 말을 못했다.

인간이 이성으로 전지전능한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알아듣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지혜나 지식으로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약한 존재다. 그마저도 이기적 아집과 독선, 편견으로 자기중심적 사고로 빠져든다.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서 현대인은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자부심을 겸비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돼간다. 그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금전이다. 돈이면 서비스나 재화, 심지어 성(性)까지도 구매할 수 있다. 부의 축적을 위한 출세지향주의가 삶의 목표이며 그것들을 위해 각오를 다지고 어떠한 희생도 치를 기세다.

이러한 이기적 개인주의는 신앙마저 위협한다. 이 세상 수많은 인구가 종교를 믿고 의지해 살지만 그 안에 독선과 비리가 얼마나 많은가? 허나 이것은 오직 '나' 자신에게 어떠한 이해타산이 미치는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자기를 세상 중심으로 삼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옳고 그름을 분별없이 맹신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을 체험함으로써 이성적 판단을 유보한 조건 없는 신뢰이다.

하느님의 에덴을 떠나온 우리 모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분은 위대한 황제도, 백성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도, 너그러운 절대 권력자도 아니다.

하느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다니시며 가슴 태우시는 분이시다. 돌아온 탕자에게 벌은 고사하고 기쁨에 넘쳐 큰 잔치까지 베푸시는 분처럼 자식을 품에 안고 항상 보살펴주시는 아버지시다. 그 사랑은 따뜻하고, 무한하며, 무조건적이라 완전히 신뢰할 수 있어 우리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고, 서로 보호하고 돌봐주며, 희로애락을 공감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사랑하는 형제자매로 구성된 가족이 돼야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현세에서 예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어리석고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바오로 사도는 이에 대해 하느님의 역설적 지혜로 대답한다.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1??25 참조).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으시고 비우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그분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신뢰는 사랑에 기반을 두며 사랑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는 것이다.

서광석 신부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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