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76.4%
[수도회] 매일 새로운 얼굴, 새로운 마음으로
조회수 | 2,056
작성일 | 06.03.10
교정사목에 종사하셨던 한 원로 신부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한평생 교도소를 내 집처럼 드나드셨습니다. 틈나는 대로 재소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셨고, 특유의 친절과 미소로 재소자들에게 하느님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도 '부업'으로 미력하나마 교정사목에 조금 협조를 했던 덕분에 교정사도직의 어려움을 알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 어려운 일을 계속하시는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도소 분위기, 어쩔 수 없이 회색빛이지요.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짠해옵니다. 잠시 머물다 나오지만 답답함을 느낍니다. '갱생의 길'을 꿈꾸며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마음아픈 양떼들을 바라보는 것은 큰 고통이지요. 외부와 단절된 가운데, 항상 누군가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통제받아야 하는 재소자들 얼굴은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얼굴들을 매일 접한다는 것은 보통 부담스런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신부님은 특별하셨습니다. 매일 대하는 재소자들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반갑게 인사하셨습니다. 매번 따뜻한 미소를 건네셨습니다. 매번 환한 얼굴로 악수를 건네셨습니다. 순간마다 상대방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 교도소의 '최고참' 재소자가 이 특별한 신부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매일 보는 얼굴인데, 왜 인사는 매일 하고 또 하십니까? 때로 그거 짜증납니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본 형제는 어제의 형제고 오늘 내가 본 형제는 완전히 새로운 오늘의 형제입니다. 매일 매일 변화하는 형제가 반가워서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하는 겁니다"(www.pps.co.kr '아름다운 글'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변화와 변모의 삶을 사셨습니다. 나자렛 예수에서 골고타 언덕 위 수난 당하시는 메시아에로 변화, 인간 예수에서 만왕의 왕 그리스도에로 변화를 거듭 추구하셨습니다.

변화, 변모, 쇄신… 이런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제 개인적으로 씁쓸한 심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그토록 변화되기를, 좀 더 나아지기를 기대해왔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맴도는 제 수도생활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한번 보란 듯이 변화하고 싶지만 생각뿐이요, 다짐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변화'일 것입니다. 부정적 사고방식에서 긍정적 사고방식에로 변화, 비관적 인생관에서 낙관적 인생관에로 변화, 폐쇄적 생활에서 개방적 생활에로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언젠가 얻게 될 상급은 영적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능력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매일 만나는 형제들을 순간마다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상을 뵙게 될 것입니다.

영적 눈을 뜨게 될 때 우리 영혼이 얻게 될 선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것입니다. 한번 영적 눈을 떠보십시오. 지금까지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부여될 것입니다. 그 삶이야말로 변모의 삶이요, 회개의 삶입니다.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한 아기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아기가 방 이리 저리를 기어 다니다가 자수를 뜨고 있는 어머니 앞에 멈췄습니다. 자수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지만 아기 쪽에서 바라보는 자수의 뒷면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갖은 색깔의 실밥들이 뒤엉켜 무슨 형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쪽에서 바라보면 아름답습니다. 만월에, 멋들어진 소나무에, 날아가는 기러기에, 정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작품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계획표와 우리 계획표는 철저하게 다릅니다. 우리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언젠가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작품과 우리가 구상하는 작품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영적 눈을 뜨게 될 때 우리가 그토록 회피하는 고통과 시련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451 76.4%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지난 주일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영광 받으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장엄하게 선포되십니다.
몇 주 후 주님께서는 해골산에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는 주님께서
광야-타볼산-해골산으로 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예수님은
유혹과 시련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수난을 받으시지만
이 모든 여정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가의 문제입니다.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고
장엄하게 선포되는 것을 보고 이미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았기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하라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요르단 강 세례 때 하느님의 아들로 장엄하게 선포되신
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타볼산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다시 영광스럽게 선포됩니다.
그러나 해골산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의 예수님처럼 다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을 당하십니다.

제 친구 손 희송 신부는 자기 책에서 주님의 기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를 풀이하며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은 우리가 실망에 빠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실망은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지 않는 표시이며
특히 하느님 사랑에 믿음과 희망을 두지 않은 결과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편이 되시는데
어찌 실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하고 얘기합니다.
친 아드님도 유혹을 받으시고 수난을 받으시니
우리가 유혹과 수난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거두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과 수난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표시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받은 표시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단련받는 표시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시련을 통해서 굳건해집니다.
그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아들이라면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도록
우리에게 고통으로 단련하실 뿐 아니라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마음으로
우리의 고통과 단련에 함께 하십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3.08
451 76.4%
기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이 인재라고 합니다. 살벌한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순간순간 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초일류 기업에겐 ‘인재 경영’이 생존의 화두라는 것이지요. 경쟁사에 인재를 빼앗기는 것은 곧 회사의 추락을 뜻하고, 반대로 인재를 많이 확보하는 것은 든든한 날개를 다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재들과 하는 사업은 반드시 성공하고 핵심 인재가 기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사람이야말로 기업의 진정한 경쟁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초일류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휴렛팩커드·제너럴 일렉트릭·도요타 자동차도 핵심 인재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목적은 다르지만 ‘인재 양성’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인류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해 열두 명의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하는 쓰라림도 겪으셨지만 목숨을 걸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한 다른 제자들, 특히 세 명의 애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에 그들을 ‘핵심 인재’로 양육하셨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할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은 꼭 데리고 가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마르 5,37)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마르 9,2) 겟세마니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도(마르 14,33 이하) 이들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들을 변화시켜 복음 증거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케 하기 위해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당신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제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방법은 죽음 후에 죽음의 고통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경험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임명한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2­3) ‘엿새 후’라는 말은 이 이야기가 신화적 사건이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요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제자들 앞에서 거룩한 몸으로 변화된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엘리야와 모세도 함께 나타나십니다(9,4).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이미 하느님의 영광을 경험한 분(탈출 24,16-­17)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미 하느님의 영광을 호렙 산에서 경험한 사람입니다(1열왕 19,9-­18).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확신하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위엄과 권능으로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왕으로서 예수님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마르 8,31 참조)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큼은 확고했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믿음에는 아직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광스런 변모 사건을 보여주시면서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9,9)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9,10)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인재로 만들기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 사람은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지만(5,35-­43)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되는 것은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귀중한 인재로 훗날을 위한 소중한 주춧돌로 쓰시길 원하셨기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7)는 성부의 말씀도 이 맥락에서 울려 퍼집니다. 세례 때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라는 비슷한 말씀이 하늘을 뚫고 울려 퍼졌지요. 회사에서 핵심 인재의 충성도는 무엇보다 사장과 확실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장을 사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때는 충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에서 바로 하느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바로 “내가 인정하는 메시아다. 내 아들이다.”라는 사실을 그 신비한 경험 현장에서 분명하게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온 존재 역시 그분처럼 거룩히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겠습니다. 잠시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 것은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라는 말씀대로 신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향한 생활이고 그의 구원의 사명을 함께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순간도 무의미하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분을 잊고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하는 삶의 자세를 포기하고,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느님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의 자세를 키워 나가야겠습니다.

정애경 수녀
  | 03.08
451 76.4%
금의환향(錦衣還鄕)

창세22,1-2.9ㄱ.10-13.15-18
로마8,31ㄴ-34
마르9,2-10

감사합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형제자매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안식년을 맞이하여 수도원을 떠나 하루하루 하느님 향해 흐르는 강으로 살다가 마침내 다시 불암산이 되어 살고자 '아버지의 집' 요셉수도원에 돌아왔습니다. 어제 2월28일 오후 수도원에 도착하여 수도형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니 흡사 금의환향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여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금의환향'으로 정했고, 이렇게 비단옷 금의 대신 자색 고운 옷을 입고 3월 첫날, 사순 제2주일 감사미사를 봉헌합니다.

장충동 수도원을 떠나기전 마음은 자못 착잡했습니다.

"떠나기 싫죠.“

한 수도형제가 웃으며 넌지시 던진 말이었습니다. 흐르는 강처럼 좀 자유롭게 살다가 다시 산이 되어 살게 되니 답답할 거란 예상하에 한 말이 분명합니다.

"예, 신병 훈련소에 입대하는 기분입니다.“

웃으며 화답하니 모두가 빙그레 웃음지었습니다. 와보니 신병훈련소 입대가 아니라 고향집에로의 금의환향입니다.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가 맑은 물의 호수로 돌아온 듯 온 몸과 맘에 활력이 넘칩니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자마자, 배려 깊으신 주님은, 3월1일 사순 제2주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불암산에서 당신의 변모체험 미사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지난 주일에는 광야에서의 유혹체험에 이어 이번 주일은 불암산에서의 변모체험입니다. 광야와 산이 대조가 참 의미심장합니다. 광야가 상징하는바 수평의 세상살이라면 산이 상징하는 바 수직의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니 수평의 밋밋한 광야인생에 지쳤을 때는 지체없이 수직의 산을 찾아 주님을 만나야 합(삽)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주님의 시험에 합격하여 주님의 축복을 받은 곳 역시 모리야 땅에 있는 산이었습니다.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아,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란 신비체험이 있어야 광야인생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과 만나야 비로소 해갈되는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장면은 정말 환상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광야인생에서의 오아시스체험이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에 재현되고 체험되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당신의 변모체험 미사에 초대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환대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지요. 이런 주님의 환대 신비체험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삶의 본질은 광야입니다. 세상도 광야요 내 마음도 '보이는 것이 없는' 광야입니다. 바로 여기 '보이는 것 없는'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샘솟는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하느님은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요, 이 하느님을 만나야 광야인생 살아낼 수 있습니다. 광야인생 잘 살면 성인이요 못 살면 괴물이나 폐인입니다. 성인, 괴물, 폐인 이 셋 뿐입니다. 아브라함, 바오로, 복음의 세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기에 성인들이 되어 희망과 기쁨 가득한 광야인생 살았습니다. 로마서의 바오로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님을 만났기에 이런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아, 바로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 또 대사제가 되시어 이 거룩한 미사를 집전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기에 이런 감동적인 고백을 토해내는 바오로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은 사랑과 기도와 순종뿐입니다. 사랑의 기도요, 사랑의 순종입니다. 주님 사랑의 환대에 대한 응답이 사랑의 기도요 사랑의 순종입니다. 주님과 우정을 깊이하는데는 사랑의 기도가, 사랑의 순종이 제일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산에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는 베드로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신비체험에 집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상의 광야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순종의 성인들입니다. 겸손의 빛나는 표지가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독점적 사랑을 받았던 것도, 하느님의 벗이 되어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억지로의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진정 아브라함은 순종의 모범입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이 부르실 때 마다 즉각 응답하여 순종했던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입니다.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겠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니 비단 아브라함뿐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경외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형제자매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집에 금의환향한 마음으로 주님의 환대를 받으며 이 거룩한 주님의 신비로운 변모체험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거룩하게 변모시켜 주시어 희망과 기쁨 충만한 광야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3.01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수도회] 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착한 목자  [4]
!   [부산]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3]
685   [전주] “하느님 사랑 안에서 참된 휴식을” | 열심히 일한 사람들  [2] 2206
684   [광주]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59
683   [원주] 쉼 보다 더 소중한 것  [1] 1979
682   [군종] 생명수  [1] 1701
681   [대구] 이 시대의 희망, 사목자들  [2] 2132
680   [서울] 주님과의 일치  [4] 1940
679   [수원] 惻隱之心 (측은지심)  [5] 2567
678   [대전] 크리스찬 생활의 리듬  [3] 1955
677   [청주]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44
676   [안동] 한적한 곳을 찾으신 예수님  [3] 2273
675   [마산] 쉴 줄 모르는 사람은 비 복음적이다. (휴가자를 위한 강론)  [3] 2363
674   [인천] “야훼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244
673   [춘천] 살아온 모든 날이 은총입니다.  [3] 2084
672   [의정부] 우리는 교회의 몸짓입니다.  [3] 2132
671   (녹) 연중 제16주일 독서와 복음 [쉬어라--목자없는 양같이]  [3] 1606
670   [전주] 파견  [4] 1993
669   [원주] 그래서 하느님은 농부를 만드셨다  66
668   [광주] 복음 선포를 잘하고 있는가?  [1] 1498
667   [수도회]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  1816
666   [수원] 복음선포의 사명  [3] 2117
665   [부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7] 2436
664   [인천] 예수님을 잊지말자  [5] 2271
663   [군종] 바다와 트로트  [1] 1973
662   [서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5] 2246
661   [의정부] 무얼 그리 재십니까?  [4] 2233
660   [춘천] 소명의 삶 살 때 은총 커진다  [2] 1815
659   [안동]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1] 1928
658   [마산] ‘소유’와 ‘무소유’  [2] 1881
657   [대구] 복음선포자의 자세  [3] 2533
656   (녹) 연중 제15주일 독서와 복음 [열두 제자를 파견]  [2] 1516
655   [춘천] 지금 내가 어떻게  1578
654   [군종] 그리고 다시 12년이 지나면  1516
653   [수원] 약한 자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  [1] 1771
652   [의정부]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1744
651   [대전] 교회의 자랑스러운 약점  1411
650   [부산]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도 있습니다.(?)  [1] 1703
649   [전주]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균형잡힌 마음을 : 불편심(不偏心)  [1] 2145
648   [수도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짝사랑  [1] 1439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