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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아브라함의 시련
조회수 | 2,317
작성일 | 06.03.11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면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시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시련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드러내고 극복하기보다 거부하고 피하고자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놀라운 시련을 겪게 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고 합니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희망이고 미래이며,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한 마디 불평도 무슨 이유인지도 묻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하느님이 지시한 모리야 땅으로 갑니다. 성서에서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감정도 느낌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진정 아브라함은 놀라고 괴로워하지 않았을까요?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즉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 31)라는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당신 편이시고 당신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으셨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도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런 시련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아브라함처럼 합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불평하고 이유를 찾고 피할 길만 찾습니까? 우리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우리 믿음이 부족하고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진정 나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통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그럼 우리 편이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아멘.

우제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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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제사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사악은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늘그막에 얻은 손자 같은 귀한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창세15,5)고 하신 하느님 약속의 징표였습니다.

즉 이사악을 통해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었습니다.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이사악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외아들, 약속의 징표인 이사악을 불살라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 그러한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부인 사라가 있었지만, 감히 하느님의 명령을 두고 누구하고 의논하지도 못하고 혼자 고민에 빠진 늙은 아브라함의 고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이사악을 두고 선택의 고민을 했다면 어떠한 이유를 대어서라도 이사악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저를 데려가시고 아들은 살려달라고 떼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의 고민은 하느님 안에 있었습니다.

약속해 주시고 그 실현의 징표까지 주셨던 하느님과 이제 그 약속을 스스로 취소하는 듯한 하느님.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두고, 하느님 안에 고민했었고, 결국 알아들을 수 없었고, 마침내 하느님 뜻에 절대 순명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무자비한 시련의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필요했을까요? 혈육의 정을 끊는다. 자신이 죽기보다 더 큰 고통을 견디어 냄으로써 아브라함은 참으로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겠지요. 자기 자식도 바친다면 더 이상 무엇이 문제되겠습니까?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건을 통해 하느님 앞에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8,32)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 외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9번이나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토록 깊고 강해서 세상의 그 무엇도(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이제 곧 큰 시련과 고통 앞에 서게 될 제자들의 앞날을 미리 보시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 희망이 될 놀라운 모습을 체험케 해 주십니다. 참된 부활에의 희망은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최창호 야고보 신부
  |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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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모진 아버지의 사랑

일본 나가사키 성지 안내를 약 40번 정도했습니다. 순례 동안 188위 복자 ‘바오로 우치보리’와 아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도쿠가와이에야스 박해 시대에 바오로는 3명의 아들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바오로를 배교시키기 위해 관리들은 협박과 감금, 갈취와 고문을 했습니다.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배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오로의 아들을 잡아 와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아버지 바오로가 보는 앞에서 잘랐습니다. 그 중에는 5살 된 이냐시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바오로가 배교하지 않자 관리들은 아들을 차가운 바다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아버지 바오로는 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까지 바오로는 배교하지 않았고, 큰 아들은 “이런 큰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했습니다. 후에 바오로도 운젠의 지옥 열탕 고문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순례 차량 안에서 이 설명을 들은 순례객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순교의 모습에 감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모진 아버지가 있느냐며 화를 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은 순교할 수 있어도, 자식을 가지고 협박과 회유를 한다면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제1독서에는 아들 이사악의 생명을 하늘에 바치려는 모진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에는 후에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집니다. 아들의 생명을 하늘에 바치려는 아버지가 모질게 느껴지십니까? 아버지가 아 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는 정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바오로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생명보다 하늘나라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가르쳐 주고 실천했습니다. 아들의 고통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참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음을 알고 아들을 바쳤습니다. 아들의생명이 이 세상에서 끝날지라도, 하느님이 아들의 생명을 이끌어 주심을 믿고 따랐습니다. 성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 예수님이 죽음으로 내려가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아시고 아드님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바오로도 아브라함도 성부께서도 모진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아들의 생명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자녀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지금 모질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에 맡기십시오.

<대구대교구 서준홍 마티아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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