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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 일생이 대림시기
조회수 | 2,155
작성일 | 05.12.02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사야 예언(40,3-4)이 실현된다는 것과 기쁘면서도 동시에 불안한 기다림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일어날 중대한 ‘어떤 사건’있고 오셔야할 ‘어떤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을 기다리는 가운데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다. 그 미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구하면서 우리의 원의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제1독서: 이사 40,1-5.9-11: 주님의 길을 내어라

제1독서에서는 신비스러운 ‘소리’가 당신 백성을 승리로 다시 이끌기 위해 되돌아오시는 야훼를 위해 길을 ‘준비하라’고 권고한다(3-5절). 그 ‘길’은 종교적 행렬을 위한 길이나, 승리자의 길을 의미하며, ‘사막’은 또한 많은 기적들을 동반했던 첫 번째 출애굽과도 연결하고 있다. 그러면서 슬픔과 비탄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음을 생각하고 있다(9-11절). 야훼의 가장 위대한 ‘도래’는 당신 나라에서의 구원사업을 위한 것이다. 그 ‘도래’는 화해와 사랑의 ‘도래’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귀향과 예루살렘의 재건이 이루어져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분은 어미 양과 새끼 양들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목자이다(11절). 그분 안에서는 권세와 사랑이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복음: 마르 1,1-8: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이 신비스러운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며 그 소리는 사막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다. 그의 선포는 아주 짧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온통 ‘더 훌륭한 분’ 즉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과 그 메시아가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대한 것이다. “내 뒤에 오신다”(7절)는 말은 오심의 긴박성을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이며,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기조차 부당하다고 한다. “신발끈을 풀어드린다”(7절). 이 두 가지는 모두 주인을 위해 길을 내며 앞서 가는 종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중요한 그리스도론적인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며, 또 하나는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더 훌륭한 분”은 ‘더 힘센 분’의 의미로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켜”(1요한 3,8) 사탄을 쳐부수시어 구원사업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성령을 베푸실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언을 따라 마지막 날에 성령이 충만히 넘쳐흐를 것을 기대해 왔다(이사 44,3; 에제 36,26 참조).

세례자 요한은 단순한 ‘소리’로써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자체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고 준비하였다. 그의 생활 자체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웅변적인 설교였기 때문에 “온 유다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5절). 낙타 털옷을 입고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 살았다는 것은, 그의 속죄의 정신만이 아니라 고행적인 열정, 또는 그분을 찾아 얻기 위한 간절한 기도, 어떠한 상황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근본적 자유에 대한 갈구 그리고 주님께서 지나가실 ‘광야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열망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삶과 설교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4절)의 세례를 선포한다. 즉 메시아의 도래는 마음의 ‘회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개’가 없으면 메시아도 오시지 않는다. 만일에 오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들을 단죄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절)이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 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체의 제목과도 같다. 이제 복음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하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고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계속적으로 참여하여야만 한다.

제2독서: 2베드 3,8-14: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주님의 날’을 기다림에 있어서 경박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14절). 즉 우리 신앙인들의 기다림은 무기력하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나아가 창조력을 지닌 기다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다림은 ‘은총’이 아니라 단죄를 위한 ‘심판’이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의 오심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짧은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긴장을 이완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까지 우리가 가진 몫을 꾸준히 채워감으로써 완성시켜야할 과제를 우리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또한 나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해 가면서 이루는 것이다.

‘대림시기’는 오랜 동안의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고향, 하느님 나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이 대림시기는 우리의 일생 전체가 대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삶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대림시기와 성탄의 신비를 함께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성탄을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진정한 제물로 봉헌할 수 있도록 살아가도록 하자.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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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자연과 인디언들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한 백인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이 주인공에게 이름을 ‘늑대와 춤을’이라고 붙여준 이유는, 그가 늑대와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림 2주일이자 인권주일을 지내는 우리는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만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오늘 1독서에 나온 말씀 내용처럼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봉헌했던 인물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3,4)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 세례자의 선포는 스스로를 의인들이라 여기며 살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세례자가 선포한 ‘회개’란 무엇일까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는 ‘전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삶으로 나가려는 결심의 징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회개의 확실한 징표는 바로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루카 복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 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루카 3,10-14).

결국,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말한 요한 세례자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는 ‘세례’라는 전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요한 세례자가 선포하는 회개의 삶이란, ‘이웃을 사랑하고, 탐욕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 두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요한 세례자가 밝히고 있는 성탄의 준비는 바로 이웃 사랑과 탐욕을 멀리함 안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례와 실제 이루는 삶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요한 세례자의 입을 통해 내면과 외면이 통합된 진실한 삶을 갈망하고 계심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고 마련하는 큰 영신적 이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예수님을 고대하고 성실히 준비하고 있는 이 대림시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황용구(안드레아) 신부
  |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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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지 않는 오롯한 삶

며칠 전 사제 서품 50주년을 맞이하시는 신부님 금경축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동안 감사와 고마움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정성 들여 미사를 드리시는 신부님, 그동안 신부님의 삶을 보아왔던 선후배 신부님들, 잔칫상을 차려주신 주교님,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미사에 함께하시던 교우분들, 이 모든 분을 다시금 생각해보니 기쁨의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며칠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신부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나에게 칭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마자 모두가 신부님께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50년 동안 한 번도 갓길로 가지 않고 오롯하게 사제로서 살아오신 신부님! 참으로 대단하시고 훌륭하시다 여겨 보낸 박수가 아닌가 합니다. 살다 보면 한눈팔 상황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이겨내고 살아오신 신부님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금경축을 맞이하신 신부님보다 더 한눈팔지 않고 사셨던 분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아닐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주님의 오시는 길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하여, 광야에서 외롭지만 대담하게 외칩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인 세례를 베푸는 일에도 온 힘을 기울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도록 발 벗고 나섭니다. 그러면서도 가난하고 겸손하게 삽니다.

세례자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삽니다. 그분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광야를 당신의 집으로, 우리에게는 건강식품으로 알려진 메뚜기와 들꿀을 주식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낙타 털 옷과 가죽을 의복으로 꾸미고 사십니다. 이러한 의식주의 삶은 자신을 위한 가공되지 않은 웰빙(well-bei ng)의 삶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위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그분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한눈팔 시간도, 주저할 여유도, 멋있게 꾸밀 시간도, 더 이상의 가식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철저한 구도자이며 예언자이자 선지자의 삶이었습니다. 환상적인 소설 속의 삶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며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욕심을 내지 않고, 오롯하게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사신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변함없이 한 발 한 발 내딛습니다. 그것도 겸손하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하시며 자신을 낮추십니다. 낮추기 위한 낮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알고 계신 것이며, 남에게 존경받기 위한 낮춤이 아니라 남을 존경하고 그를 높여주기 위한 진정한 낮춤과 겸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들어 높여야 할 이를 들어 높이는 용기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례자 요한은 욕심이 없습니다. 욕심이 있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목숨 걸고 성실히 한 것뿐입니다.

다시금 금경축을 맞으신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신학교 때 교수 신부님들이 하신 말씀 가운데, ‘튀는 신부가 되려고 애쓰지 마라. 평범한 신부가 되어도 신자들은 다 따라오게 되어 있다.’라는 말씀이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한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그래서 잔꾀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보자 생각했습니다.” 평범함을 일생의 목표로 삼아 겸손하게 살아오신 50년의 사제 생활! 생각만 해도 감동적이며 교훈적입니다.

“외롭지는 않으세요?”라는 어느 기자의 우문(愚問)에 금경축을 맞이하신 백발의 사제는 “아, 50년을 훈련한 일인데, 뭐. 하하하.”라는 현답(賢答)을 던지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부님은 인간적으로 외로우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한눈팔지 않고 오롯이 사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이 늘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목숨 바쳐 당신의 사제직을 충실하게 실천했던 장한 선구자이며 예언자이며, 대장부였음이 틀림없습니다.

현대를 살면서 한눈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눈팔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길. 그러다가 만년(晩年)에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인생을 마감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계시며, 그렇게 해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마지막 날 웃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최인각 신부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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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가 원하는 것’의 관계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어떤 크리스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이 학교에서는 성탄 성극에 등장할 배우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랄프라는 4학년 학생이 있었는데, 다른 누구보다도 연극을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인 말더듬이었고, 판단력도 보통아이들보다는 뒤지는 장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연극을 시키기로 하였고, 단 한 마디만 하면 되는 여관 주인 역할을 시켰습니다. 요셉과 임신한 마리아가 찾아와 방을 찾으면 세 번, “방 없어요.”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었습니다. 물론 단순한 역할이라 연습 때는 잘 했습니다.

성탄절이 되었고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이 찾아와 문들 두드리자 랄프가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요셉이 방을 찾고 있다고 하자, 여관 주인은 또박또박 “방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그럼 큰일이네요, 날도 추운데 제 아내가 언제 아이를 낳을지 모르겠거든요.”라고 감정을 넣어서 말했습니다. 여관 주인은 역시 “방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한 번 더, “정말 큰일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 제 아내가 어디서 아이를 낳을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자, 랄프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럼...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

연극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그럼,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라는 한 마디 때문에 숙연해졌고 따듯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포함한 이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랄프는 자신이 자신의 방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가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가정은 랄프의 방에 들어와서 자신들에게 자리를 내준 랄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랄프는 이미 그 성가정의 마음 안에 있고 그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입니다. 어떤 누구도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받아들이려면 필연적으로 자신은 자신에게서 나와야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아지려 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교만’ 때문에 하느님을 자신 밖으로 내쫓아버린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은 “마귀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마귀는 바로 나의 ‘자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대답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곧 교만이고 마귀이고 자신의 자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태어나시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 나 자신의 즐거움을 찾고, 나 자신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며, 오직 ‘나’만 찾기에, 참 ‘나다’라는 이름을 지니신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나’는 오직 하나만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를 모시느냐, 혹은 하느님의 ‘나’를 모시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내 안의 주인을 ‘나’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참으로 내어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비의 예수님을 환시로 보았던 성녀 파우스티타는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비의 성모 수녀 회에 갔을 때 원장 수녀님만은 달랐습니다.

“이 집의 주인님께 가서 자매님을 받아들이시겠느냐고 여쭈어보십시오.”

그녀는 곧바로 성당으로 가서 기도하였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받아들인다. 너는 내 마음 안에 있다.”

원장 수녀님은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셨나요?”라고 물었고 그녀가 “예”라고 대답하자, 곧 “주님께서 받아 주신다면 나 역시 받아들입니다.” 하며 그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성녀가 되셨습니다.

다른 수도회 원장 수녀님들은 스스로가 수녀원의 주인이 되어 파우스티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집주인은 자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하느님뿐만이 아니라 이웃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이제 나의 ‘자아’를 쫓아내야 합니다. 자신의 자아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자아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알아야합니다.

사랑을 해 보신 분들은 이런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대도 내 말투와 표정까지도 따라하고 있습니다. 이는 본인들보다도 주위 사람들이 더 잘 느낍니다. 상대가 나의 거울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그렇게 둘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둘이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그것과 닮아가며 그것이 곧 내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맘 안에 사랑하는 사람이 살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전부는 엄마입니다. 아기 안에는 엄마가 있고 엄마 안에는 아기가 있습니다. 아기가 빵긋 웃으면 엄마도 웃고 엄마가 웃으면 아기도 웃습니다. 엄마가 아프면 아기도 아프고 아기가 아프면 엄마도 아픕니다.

이탈리아의 어떤 도시에 아름다운 얼굴과 우아한 자태, 고상한 표정을 한 그리이스 소녀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가난한 시골 소녀가 그 동상을 마주 대하게 되었는데 소녀는 선 채로 그 동상을 빤히 쳐다보다가 집에 돌아가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 소녀는 다시 동상 앞에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그녀의 누더기 옷을 수선했습니다. 날마다 소녀는 변화되었고. 모습은 더 우아해졌으며. 얼굴은 더 세련되어 갔습니다. 소녀는 그 유명한 동상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외모가 변모된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우상인 아이돌의 사진을 걸어놓고 머리, 의상까지도 따라하며 닮아가려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사랑하는 것이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그렇게 닮게 만듭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세상 것, 권력이나 쾌락, 재물 등을 쫓는다면 나는 그런 것들로 가득 차, 권위적 인간, 쾌락에 찌든 인간, 재물에 눈먼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이 곧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만은 원하고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 나도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따라서 ‘자아를 버린다는 의미’는 곧 ‘내 자아가 바라는 것들을 모조리 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외에 바라는 것이 없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가난’입니다. 내 마음을 가난한 마구간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어떤 예술가가 화강암 덩어리로 훌륭한 사자상을 새겼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간단합니다. 내가 생각한 사자의 모습이 아닌 것을 모두 쪼아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 자체도 자신이 희망하는 유일한 분외에는 모든 것을 쪼아냈습니다. 교만을 쪼기 위해 겸손하고 육체를 쪼아 극기하며 세상을 떠나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삶이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란 ‘고쳐서 다시 돌아옴’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날 아기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면 이제 ‘회개’합시다, 쪼아냅시다. 새로 태어날 아기 예수님 외에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 있다면 빨리 고쳐 되돌아옵시다.

예수님 아닌 다른 것들을 바라는 것은 참다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악이 그런 것들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참조; 로마 7, 20-21)

전삼용 요셉 신부
  |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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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주님의 길을 마련한다는 의미

사제가 되고 3년 정도 지났을 때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좀 더 크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무조건 한 달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보겠다는 다짐을 했고(월말이나 월초에), 그것을 꾸준히 실천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바쁘다는 핑계로 고해에 소홀해지게 되었는데, 얼마 전에는 동창 신부를 만날 기회가 있어 거의 석 달 만에 고해성사를 보기도 했다. 한 번 다짐한 것을 끝까지 잘 지켜나가면 좋으련만 꾸준히 실천하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을 반성해 본다.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부분은 ‘성찰’이다.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 살아갈 나날들에 대한 준비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살아온 나의 모습을 돌아볼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일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어떤 순간에 나에게 다가와 당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지,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진지하게 바라보고 뉘우치는 것은 매 순간 이루어지기 힘들고 성찰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찰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성무일도 끝기도 안에서 잘 실천하고자 노력 중이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대림 시기 안에서 주님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준비’가 무엇일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런 삶을 내가 살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곧 나를 새롭게 거듭나도록 이끄시는 그분의 오심을 내가 잘 맞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잘 맞아들이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기준점은 분명하다. 곧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것, 이러한 평가 기준점을 토대로 앞서 언급한 고해와 성찰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실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럴 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을 좀 더 잘 바라보고 맞아들일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내가 되지 않을까?

▥ 수원교구 서영준 라파엘 신부 - 2017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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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실패할수록 광야에 가까워진다

“저는 대학에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학점이 1.7점이었죠. 여러분은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미용실에 앉아있었어요. 그리고 거울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 뒤에, 한 여자가 머리를 말리고 있더군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 때마다, 저를 보더라고요. 눈을 보면서... 저는 그녀를 처음 보았어요. 그녀는 펜을 달라고 하며 ‘예언이 떠올랐어요.’ 1975년 3월 27일, 그녀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소년이여, 넌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야.’ ‘하지만 저는 얼마 전 퇴학을 당했다고요. 저는 육군 입대를 알아보고 있었어요.’ ... 그리고 실제로 저는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수백만 명에게 이야기를 전했죠.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중요했던 건 그녀가 한 말이 항상 제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보호받았고 길을 배웠고 변화했습니다. 실패하세요, 크게! ... 안전한 상자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크게 실패할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는 미국 최고의 배우 덴젤 워싱턴이 어떤 대학의 졸업식에서 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퇴학을 맞지 않았다면 그 청년은 미용실에서 자신에게 한 그 여인의 말을 그렇게 끈기 있게 붙잡고 믿으려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성공해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저 웃어넘길 허무맹랑한 말 따위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날짜까지 명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런 목소리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그렇게 하느님만 절실하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 아직 세상에 의지할 것이 남아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그 사람 안에서 싹도 틔우지 못하고 시들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하는 이유는 바로 그 광야에서만 주님의 목소리가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신의 힘을 빼지 않은 사람은 마치 고집 센 망아지처럼 주인의 힘이 자신을 통해 작용할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힘을 빼는 과정은 이 세상에서 실패의 광야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중국 1위 갑부인 ‘마윈 알리바바’의 홍콩대 졸업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실패에 대한 경험을 즐겁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실패를 많이 했죠. 뭐... 저는 ‘재미있는’ 실패들을 했었습니다. 중요한 초등학교 시험에 두 번 낙제했고요. 중학교 시험에도 세 번 낙제했죠. 그리고 대학도 삼수를 했죠. 그리고 취업을 준비했는데 30번 떨어졌습니다. 동네에 처음 KFC가 들어왔을 때 24명이 응시했고 23명이 합격했는데 나머지 1명이 바로 저였습니다. 경찰에 지원했을 때는 5명 중에 4명이 붙었습니다. 역시 저는 나머지 1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거절당하는 일은 ... (일상이었죠). 아, 그런데 제가 하버드에도 지원했다고 했죠? 10번 다 거절당했습니다. 이 실패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린 그렇게 잘나지 않았거든요.’ 지금도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거절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죽을 맛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포레스트 검프란 영화를 추천해줬죠.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바로 이 남자다, 우리가 배워야 할’. 당신이 하는 일을 믿으세요. 그 일을 사랑하세요. 다른 사람이 좋아하든 말든. ‘단순하게요’.”

여기에서 우리는 마윈이 가난하게 태어나 어떻게 중국의 제1의 갑부가 될 수 있었는지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실패를 남의 탓이라 돌리지 않았습니다. 잘나지 않은 자신의 탓이라 여겼습니다.

“우린 그렇게 잘나지 않았거든요.”

자신이 잘났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해보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뛸 수 있는 높이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높이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평온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탑니다. 겸손해지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몸에 힘이 빠진 사람입니다. 광야에 나오지 않고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힘을 주실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생각 좀 그만 하고 힘을 빼고 주님께 맡기는 삶을 연습해봅시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힘을 빼고 모든 것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분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카톡으로 이런 내용이 저에게 와서 소개합니다. 개신교 목사님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이 과정이 우리 모두가 신앙체험을 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글 그대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청주 사도교회를 담임하셨던 차재용 목사님이 초년에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아무리 애를 써도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교인들은 변화도 없고, 목회가 너무 어려워서 좌절감으로 얼마나 갈등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설교를 하는데 안면근육에 마비가 와서 교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얼굴이 틀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설교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내려와서 그 길로 기도원에 올라가셨습니다.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말이 금식기도지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하나님, 저를 목사로 세우시고 이 꼴이 뭡니까? 목회는 안 되고 설교는 저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고….’ 나흘째 되던 목요일 밤에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 들으셨다고 합니다. ‘귀 뚫린 종아! 귀 뚫린 종아! 귀 뚫린 종아!’ 목사님이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출애굽기 21장 2절에서 6절에 귀 뚫린 종에 관한 규정이 나와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돈이 없어서 남의 집 종으로 팔리면 6년 동안은 종으로 살지만 7년째에는 자유인이 되어 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 완전한 종으로 영원히 살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이 계속 종이 되기를 원하면 주인이 그를 재판장에게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에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그 귀를 뚫으면 그가 영원히 그 주인을 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귀 뚫린 종이 되면 세 가지 단점이 있는데 하나는 귀를 뚫을 때 너무 고통스러운 것, 어디를 가도 종이라는 표시가 나는 것, 더 좋은 곳이 있어도 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반면 장점도 있는데 첫째, 노예 상인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이미 주인이 있으니 어디 가서 이 사람을 노예로 팔 수도 없지요.둘째, 주인이 열쇠를 맡깁니다. 귀 뚫린 종은 이제 어디로 떠나지 않으니 주인이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것이지요. 셋째, 주인과 한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주인과 한 가족이 됐기 때문입니다.

차재용 목사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귀 뚫린 종으로 받으셨다는 사실이 정말 마음에 믿어져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새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목회의 스트레스, 개인적인 열등감, 그런 것들이 다 사라져서 정말 주님께 다 맡기며 평생 목회를 잘하실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 나와야만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보통 때는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자신의 목소리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는 하늘을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닥쳐오는 실패 속에서도 평온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 포기해서 나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잔잔한 상태가 되어야만 하늘을 담을 호수가 됩니다.

우리 모두도 귀 뚫린 종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형식적으로만 그렇게 실제로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려고 합니다. 아직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실패는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 겸손하게 합니다. 그때서야 참으로 귀가 뚫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멍에를 즐겁게 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됩니다. 물 위를 걷게 됩니다.

이곳까지 이끌려고 했던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걷고 싶다면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자신을 그만 믿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오로지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 그러면 주님을 보지 못해도 물 위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주님을 의심할 수 없이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찬미하게 됩니다.

광야는 내일을 알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없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실패하면 어떻습니까? 더 좋습니다. 주님과 더 가까운 광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7년 12월 10일
  |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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