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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세례자 요한의 선포
조회수 | 2,107
작성일 | 05.12.03
필리핀에서 생활할 때 일입니다. 그 곳 사람들은 낯선 이가 길을 물으면 누구나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르쳐준 곳을 가보면 엉뚱한 데가 나와서 또다시 길을 물어야 했고 많은 경우에 가고자 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서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필리핀 사람들은 마음이 여려서 다른 사람에게 ‘NO’라는 대답을 잘하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모르는 길을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을 하기가 어려워서 아는 것처럼 알려주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낯선 길을 찾아갈 때는 항상 길을 잘 파악한 다음 스스로 찾아서 가는 편을 선택하곤 했습니다.

인생의 길에서 어떤 길을 가야할 지 헤매며 길을 묻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진리와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이 되도록 하려면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이 되시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없애야 그분이 우리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기심과 욕심의 골짜기를 사랑으로 메우고, 헛된 욕망과 위선의 언덕을 깎아내려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길을 갑니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행로이며 세상과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길은 땅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위에도 있고 하늘 위에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길이 있고 영혼에도 길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은 두 가지입니다. 옳은 길, 참된 길, 좋은 길은 생명의 길이며 축복을 향해가는 길입니다. 그른 길, 헛된 길, 나쁜 길은 우리를 멸망과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이 두 가지 길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유이지만, 각자는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이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적은 반면,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넓고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경고합니다.(마태 7, 13~14)

회개는 ‘길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어긋난 길을 바른 길로 바꾸는 것입니다. 탐해서는 안될 것을 탐하고 사는 삶, 욕심내지 않아도 될 것들을 욕심내고 사는 삶, 조금만 가져도 될 것을 많이 가지려 하고, 많이 사랑해야 할 일들에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헛된 길 위에서 탕진한 삶의 빈껍데기를 버리고 다시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 가는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참된 길을 갑니다. ‘늘 깨어 준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알고 그 길을 따라 갑니다.

대림절은 인생의 여정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그 길 위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때입니다.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지금 나는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앞으로 나는 어떤 길을 가고자 하는가? 이렇게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가야할 길을 더욱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헛된 길이었다면 이제 부터는 참된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길을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옳은 길이 아니었다면 앞으로 가는 길도 그른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는 ‘우리가 그분의 길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의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수많은 반대와 어려움 속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을 여셨던 요한 23세께서 공의회 소집 명령을 내리시며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인데도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비추어 주시는 하느님의 길,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이 내가 가고 싶은 길, 내 마음 내키는 일, 내 뜻과 다르더라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대림절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다시 찾는 때입니다. ‘그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 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2베드 3, 14)이 우리가 받아야할 회개의 세례입니다.

김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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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버스나 기차를 기다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버스나 기차는 아직 오지 아니 했으므로 기다리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동안 그가 이미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 안에 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연보라 초에 불이 환하게 타올라 대림 제2주일을 맞이했음을 알려줍니다. 대림 제2주일은 한국 교회가 정한 인권 주일이기도 합니다. 대림 제2주일 복음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인적 없는 곳만이 광야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함께 사는 이 사회도 외롭고 쓸쓸하고 삭막한 광야입니다. 메워지지 않은 골짜기 같은, 거칠고 험한 산과 언덕 같은, 양극화로 치닫는 세상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곧게 하라고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처럼 인권을 침해받고 유린당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우리 주변에는 옹호 받아야 할 수많은 예수들이 있습니다.

인권옹호는 우리에게 힘없고 가련한 이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인권을 찾아주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인권이 존중받는 날, 이 땅에 인권이 굳건히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인권옹호의 외침은 휴머니즘을 넘어 자기발견을 위한 외침이요, 남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자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인권운동입니다. 이들의 얼굴은 나에게 있어 예수님의 얼굴이고,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얼굴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만이 우리의 마음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메워지지 않은 세상의 골짜기에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기다리면서 인권옹호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은 하나의 코믹 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멘!

이용재 신부
  |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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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회개란?

교회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대림시기가 시작한지도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이제 달력도 마지막 한 장만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 복음 사가는 복음서의 시작을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좀 색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런 행동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주는 메시지가 더욱 강하게 들렸는지도 모릅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 받을 것이다.”

우리들은 회개라는 말을 떠올리면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회개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회개란 바로 하느님께 등 돌렸던 몸과 마음을 다시금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른척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시금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여러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하느님과 어긋났던 관계가 나의 회개로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면, 이 세상의 어떤 문제도 더 이상 어려움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어떤 배경보다 가장 든든한 배경인 하느님을 배경으로 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진정한 회개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회개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인해서 생활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멀어졌던 생활을 다시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 과연 나는 어떤 회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일 때, 다가올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큰 은총의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전주교구 홈페이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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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님 길을 닦고 그분 길을 고르게 하라

대림 제2주일 복음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요한 세례자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 받을 것이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은 오늘 제1독서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이사 40,3-5)고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이것은 우리의 편견적 이성의 골을 메우고 고르게 하라는 것이다.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좌절과 절망을 용기와 희망으로 바꿔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는 것은 자만과 교만을 겸손으로 바꿔 산과 언덕을 깎고, 극단적 흑백논리를 조화와 관용으로 탈바꿈시켜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이다. 이기적인 자신을 벗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의 폭을 넓히는 것이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기울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현대사회 특징은 인간의 존엄한 가치가 물질화로 대체됐다는 것이다. 세상은 사람을 그의 재산, 권력, 그리고 직업 등으로 차별한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함이 망각되고 인간 자체가 경제적 소유의 대상이 된다.
 
그 적나라한 예가 성(性) 상품화다. 인간이 인격적 존재로 대접받지 못하고 금전으로 매매되는 상품으로 전락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골짜기이고, 절벽이며 높은 산길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황야의 길에서 호랑이보다 무서운 '스트레스'라는 것까지 나타났다. 이 스트레스가 온갖 폭력, 살인 등 무질서의 주요 요인이 되고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주고받을까 두려워 입을 열 수조차 없다. 그래서 무관심이 서로에게 미덕이 됐다.
 
모욕을 주는 결과가 오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정직한 사람들이 없어져 가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진실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자는 늘어간다. 재력가와 권력자가 하는 말은 힘을 얻고 진실처럼 변한다. 돈이면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마치 도덕과 윤리의 부재 시대를 만난 것 같다.
 
진정한 인격은 지위 고하에, 지식과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지식이 지혜가 아니듯, 신분이 인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배려하는 이타적 지향을 바탕으로 한다. 인격적 관계에서 존경할 '너'가 없다는 것은 사랑받을 '나' 또한 없다는 것과 같다. 나아가 '너' 와 '나'의 합일인 '우리'라는 진정한 공동체 형성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마음이 큰 사람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유가 가르침은 서로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을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요한 세례자의 외침은 우리의 편견적 이성의 골짜기와 비탈진 길을 고르게 하는지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온갖 아집과 교만에서 벗어나 새로 태어나라는 것이다. 이는 곧 세례 받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은 수많은 경호원에 둘러싸여 세상의 권위를 과시하며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다. 이것은 낮춤 중의 낮춤이며, 겸손 중의 겸손이다.
 
그분은 권위나 명령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당신 안에 우리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시킨다. 세상 사람들 눈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하느님께서 걸어야 할 우리 마음의 길이 오만하고 배타적인 길이어서야 되겠는가.
 
대림 제2주에 교만과 편견으로 높이 쌓인 우리 마음의 길이 이웃 형제와 소통에 방해가 되지 않나 반성하자.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 소외된 것과 친교를 원하시는 주님을 위해 우리 이성의 편견적 판단을 하느님 사랑 안에 유보하자.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세상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느님 왕국을 지향하는 우리 일상적 행위는 삶의 길을 고르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어두운 길에 등불을 들고 걸으면 가는 곳마다 밝아지듯, 현대 물질화에 가려진 도덕과 윤리 가치를 비추는 하느님 손에 잡힌 호롱불이 돼야 한다.
 
깨어남도, 우리가 사는 삶의 방향 전환도 신앙이다. 신앙이 크면 깨어남도 어렵지 않다. 타인을 사랑하며 사는 생활이 곧 주님께 연결되는 고른 길이다.

서광석 신부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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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 예수님 미리 보여 주자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친척인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활동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예언자이기도 하다. 요한 예언자는 사막에서 살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면서 살았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요르단 강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주었으며,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비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앞길을 미리 준비한 분이시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고, 요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요한은 사막에서 은수자로 살면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고 그 시대의 예언자로서 충실히 살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던 것이다. 일반 대중들 뿐만 아니라 헤로데 왕까지도 세례자 요한의 말에 귀를 귀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요한이 죽은 뒤에도 예수님을 보면서 요한이 되살아 난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준 것은 그가 전한 메시지뿐만 아니라 예언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소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전했고, 사회·정치·종교 권력에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예언자로서의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스승으로 모셨고 따랐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결정적인 그분의 앞길을 준비하는 예언자의 일을 수행하는 하느님의 도구일 뿐이라고 하면서 사신 분이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임을 명심하자. 나도 사람들에게 내 삶의 모습을 통해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생각하고, 요한처럼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미리 보여 주었으면 한다. 오시는 그분의 길을 미리 잘 준비하여 부족하지만 이 시대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이상용 야고보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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