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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의심과 평화
조회수 | 2,147
작성일 | 06.04.21
부활 시기를 살아가고 계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믿는 우리들은 ‘부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눈을 가진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일생에 어떻게 함께 하고 계시는지 알아봅니다. 부활의 눈을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의 일을 겪으면서도 그 깊이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보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부활의 눈’은 죽음이 있는 곳에서 생명을 볼 줄 압니다. 어두움 속에서도 빛을 볼 줄 압니다. 미움의 늪 속에서도 사랑의 길을 찾아냅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여유를 가지며, 근심 중에도 기쁨을 지니게 하여줍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힘겹고 고달프다 해도 ‘부활의 눈’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줍니다.

믿는 우리들은 ‘부활의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부활은 증오심을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긴 생명의 승리입니다. 부활은 어두움을 억누른 빛의 승리입니다. ‘부활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증오심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삽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지니고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심하는 토마스’ 의 이야기입니다. 토마스를 의심의 사도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사실 처음에는 모든 사도들이 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였습니다. 의심은 모든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첫 단계였습니다. 의심은 믿음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소식에 이렇게 반응을 보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 반응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보인 첫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그들도 믿기 전에 보고 싶어했습니다. 믿기 전에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의심은 동반자처럼 우리를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세 번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평화로워집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성당에 오면 평화로워진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마음속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평화’ 역시 초대 교회 신자들이나 우리들이 주님을 뵙고 난 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과 ‘평화’는 믿음의 길을 가는 이들의 동반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당신 친히 또한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이러했습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욕이나 비난 앞에서도 얼굴을 가리지 아니 하셨고, 매질과 고통 앞에서도 꽁무니를 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온유함을 당신의 힘으로 삼고 사신 분입니다.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다.”(마태 11,29)

당신을 못 박는 군인을 용서하실 정도로 용서의 달인이셨습니다. 편견 없이 모든 이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그분은 ‘야훼의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삶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사신 길이 부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모욕과 비난을 견디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는 동료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토마스 사도의 의심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심의 노예로 있다면, 이 역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들은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우리 눈은 세상의 눈과 다릅니다. ‘부활의 눈’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세상의 심장과 다릅니다. ‘부활의 심장’을 세례 때 선물로 받았습니다. ‘부활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부활의 심장’으로 세상을 품으며 살아갑시다.
우리들의 의심이 평화로 가득 차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춘우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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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오늘 복음에서(요한 20,19-31) 우리는 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요한 복음사가의 입을 통해 들었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20,31) 즉 세상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서 영원한 새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한 이야기, 빈 무덤 이야기, 제자들과 같이 고기 잡는 이야기,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우리를 참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인간적이지요.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귀로 듣고, 코로 체취를 맡아보고 해야 직성이 풀리고 만족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 아니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어쩌면 토마스는 나 자신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해 오늘 복음말씀은 일침을 가합니다. 즉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은 이점을 이렇게 보충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 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즐거워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불교 경전인 반야심경 앞부분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소중한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색(色)이란 사람의 오관으로 보이는 만물인데, 이 만물은 모두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다. 고로 내가 보는 그 실체는 진짜가 아닌 공(空)이다.” 정호경 신부님은 반야심경을 번역한 책, ‘가자! 가자! 함께 가자!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에서 알아듣기 쉽게 이렇게 풀이합니다. “온갖 ‘보이는 것’들을(색) 우상 숭배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본래 ‘따로 있지도 않은’ 허깨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하기 쉽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 절대적이라는 과오를 참 많이 범합니다. 자신이 보고 생각하여 깨달은 바는 진리 측면에서 볼 때 참으로 작은 부분일진데, 마치 진리 전체를 깨달은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아는 지혜가 참 지혜일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에 도가도(道可道)면 비상도(非常道)라는 귀한 말씀도 있습니다. 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라면 영원한 도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교만하고 거만하게도 책 몇 줄 읽고, 신문 기사나 사설 몇 개 읽고 다 아는 양 마구잡이로 이야기 합니다. 진실과 너무나 먼 얘기를 스스럼없이 서로주고 받습니다. 많은 경우에 부풀려지고 허황된 말로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합니다. 진리와 먼 강론으로 신자들과 하느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나 자신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지름길일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머리 속에, 내 마음 속에 다 들어오는, 파악되는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제자들의 부활 체험과 2000여년의 세월 속에 주님 부활을 믿고 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났소. 그분을 믿고 세례를 받으면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오.’ 이렇게 외친 제자들의 삶이 부활 신앙의 근거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김영필 바오로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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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느 형제가 술과 도박에 빠져 하느님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가진 돈이 바닥나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다 떠났습니다. 혼자 외로이 인생을 비관하며 살다가 암에 걸렸고 살날이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도 사제도 거절하고 자기 인생을 저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해성사를 청합니다. 죽음을 앞둔 이의 고백이 얼마나 솔직하고 겸손했을까요? 그는 이틀 후 사제가 들어서는 순간 임종을 맞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처럼 극적으로 풍요롭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크신 자비를 기억하는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들은 스승을 배반하여 죽게 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벌벌 떨고 있는 그들의 잘못을 질책했다면 그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내가 부활했으니 그렇게 웅크려 있지 말고,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나오는 평화의 인사를 통해 우리가 당신의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부끄러워서 신앙인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우리,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용서받고 용서해 주려 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은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죄를 용서해주는 권한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주님에게 받은 자비를 쉽게 베풀지 못합니다. 내가 받은 만큼 갚겠다거나 그 사람이 다른 나쁜 일을 당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렇게 당하는 모습을 봐야만 속이 시원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동안 우리 영혼은 점점 병들고 죽어갑니다. 주님의 평화로부터 멀어집니다.

용서는 잘못한 사람을 위해서 뿐 아니라 정말 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내 구원을 위해 자비와 용서를 베풀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고, 그때가 바로 부활을 체험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초대교회 신도들은 ‘네 것 내 것’ 없이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주님의 평화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도 그처럼 모든 것을 내어놓고 공유하는 공동체가 여럿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지요. 우리도 그렇게 못하란 법 없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닫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서로 화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성사를 통해 그 화해를 주선해 주셨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또 이 미사를 통해 잘못을 용서 청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평화를 빌어줍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도록 마음모아 기도하며 진심으로 서로의 평화를 빌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손성문 사도 요한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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