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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당신이 기뻐하시니 우리도 기뻐요.
조회수 | 1,992
작성일 | 06.04.21
요즘 제 영혼을 건드리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예수회의 존 포웰 신부님이 쓰신 ‘내 영혼을 울린 이야기’란 책이죠. 저자의 권유대로 한꺼번에 읽어버리지 않고 하루에 한 두 개씩 정독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울리는 이야기라면 한 번에 다 보기가 좀 아깝겠지요. 그 중에 ‘새 외투’라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부활시기에 이 이야기를 읽게 되니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서 말이죠.

한 수녀님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다. 그 어머니는 가족 모임이건 친목 모임이건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은 낡은 외투를 걸치고 나가셨다. 그래서 자식들이 돈을 모아 어머니에게 털 코트를 새로 사드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다음 가족 모임 때에도 여전히 그 낡은 외투를 입고 계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식들은 새 코트에 대해 어머니께 공손하게 여쭈어 보았다.

“아, 그 털 코트 말이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한 극빈자가 동냥하러 왔었는데, 그 여자가 걸친 외투가 보기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더구나. 그래서 그 털 코트를 건네주었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물었다. “지금 입고 계신 낡은 외투를 주시지 그러셨어요?” 어머니는 이 대답 한마디로 자식들의 이어질 질문도 잠재우셨다.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을 나누어야지, 그렇지 않니?”

우리는 사랑은 나누는 것이라고 누누이 들어왔습니다.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으면 고인 물처럼 썩어버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린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만드신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우릴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당신이 가지신 가장 값진 것을 주시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같은 사람인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님에게도 가장 소중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갖고 싶어하는 것, 다른 건 다 줄 수 있어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것,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아니면 절대 줄 수 없는 것이죠.

답은 내 생명! 바로 이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죠. 생명을 주면 죽잖아요!! 예수님 차~~암 우리를 사랑하셨네요. 하느님 아버지의 그 사랑 전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고통스럽게 수치스럽게 사랑을 보여주셨죠.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주인공이 결국 다 죽는 비극의 드라마 밖에 안 되지 않을까요? 태아인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어머니의 사랑을 한평생 간직하며 사는 자식의 심정 같지 않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괜찮아, 나 안 죽었어. 봐! 이렇게 살아있잖아. 숨도 쉬고...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을 거야!” 하지만, 솔직히 제자들이 얼마나 안 믿었습니까?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증언하고 엠마오의 두 제자가 밤길을 달려와 헐떡거리며 고백하고, 베드로는 직접 봐도 못 믿고, 토마는 결정적으로 확인사살을 해버리고 말이죠.

바로 믿음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그분께 대한 믿음이고 당신 자신도 싫어하신 죽음을 깨뜨린 승리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죠. 우리도 그분께 말씀드립시다. “부활 축하드려요. 당신이 기뻐하시니 우리도 기뻐요.”

현우석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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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으면...

부활을 강조해도, 세상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자신의 세계만을 주장합니다. 내가 보는 세계만이 전부이고, 내가 이해하는 것만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신비를 능가할 정도로 위대한가를 돌아볼 줄 안다면 이처럼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내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새롭게 눈뜰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손해가 될 것입니다. 살면서 이런 경우를 참 많이 봤습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도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만져보아야 하고, 자기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토마스도 ‘자기 자신’이 기준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두꺼운 껍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자신의 틀에 포착되어야 하느님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큰 어리석음이며 교만인지요. 그러기에 토마스는 다른 제자들이 느끼는 기쁨과 평화를 공감하지 못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기뻐해도, 다른 제자들이 감격스러워 해도 뻘줌하게 아무런 공감도 없이 자기 자신이라는 틀에 갇혀 고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슬픔과 절망, 의심과 불안의 칙칙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는 그 틀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성이나 합리적인 판단을 주장하지만 이성이나 합리성도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신비는 자기 자신의 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어 보이는 것 속에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오묘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덧셈 뺄셈 같은 수학 계산 쯤으로 여긴다면, 토마스 사도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주님의 평화를 공유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부활이 주는 엄청난 평화를 공유하지 못합니다. 이 평화는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지만,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달으면 가슴 전체로 번져오는 평화를 얻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껍질을 벗어버리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체험합니다. 또한 세상에 흩어져 있던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이 평화를 느끼는 사람들은 왜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고, 왜 우리가 그분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정녕 인생의 또 다른 차원을 체험하고 싶다면 먼저 부활에 눈떠야 합니다. 부활에 눈뜨십시오.

추교윤 시몬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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