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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
조회수 | 2,005
작성일 | 05.12.03
주일미사를 봉헌하러 경당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수도원 경당으로 연결되는 어둡고 긴 복도에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헤매고 있더군요. 이리 저리 방향을 돌려보지만 낯설고 좁은 공간에서 비행이 무척 힘겨워 보였습니다.

자세히 바라보니 아주 작고 어린 참새였습니다. 갓 비행을 시작한 '초보운전자'가 분명했습니다. 미로처럼 연결된 수도원 복도를 빠져 나가기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 '초보'를 잡아 밖으로 내보내주려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사정거리 밖으로 도망가더군요. 더욱 안타까운 마음에 저는 어린 참새를 향해 마음 속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널 해치려는 것이 절대 아니란다. 이 화창한 주일 아침에, 이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무슨 고생이냐? 제발 그 자리에 가만히 있거라. 그리고 안심하거라. 널 안전하게 밖으로 데려다줄게.'

그리고는 다시 한번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거짓말처럼 참새는 가만히 앉아있더군요. 혹시라도 다칠세라 살그머니 손 안에 새를 넣었는데, 얼마나 작던지 제 손 안에 몸 전체가 '쏙' 들어왔습니다. 너무도 궁금했던 저는 손을 조금 벌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부드러운 솜털하며, 가늘게 전해지는 맥박이며, 한 생명의 신비가 생생하게 제게 전달돼 왔습니다. 참으로 귀여웠습니다. 가여웠습니다. 그 어린 녀석은 잔뜩 주눅 들고 겁먹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불쌍한 '초보'를 손에 쥐고 수도원 뒤뜰로 나온 저는 잔디밭에 앉아 가만히 손을 펼쳤습니다. 녀석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되는 듯했습니다. 한참을 제 손에 앉아있더니 '포르르' 소리를 내며 건너편 나무로 날아갔습니다.

그 작고 어린 새를 바라보며 오늘 제 모습, 우리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역시 때로 너무나 작고 어린 존재들입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지는 나약한 우리이지요. 기를 쓰고 안간힘을 다하지만 참담한 실패만을 거듭하는 우리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쳐 보지만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허탈함입니다.

어쩌면 우리 태도는 어린 참새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처지가 너무 가련하고 안쓰러워 자꾸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시려고 지속적으로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그분에게서 멀어지고자 기를 씁니다.

그 작고 어린 새를 바라보며 '회개'란 주제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제대로 된 회개를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시는 분, 너무나도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과분하게도 죄인인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는 거창하고 대단한 그 무엇이기보다 아마 이런 것이겠지요. 지나온 나날, 지나온 발자국, 지나온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였음을 자각하는 일, 언젠가부터 다가왔던 그 시련의 높은 파도가 은총의 시작이었음을 깨닫는 일, 기나긴 병고의 나날이 영적으로 더욱 강건해지라는 하느님 메시지였음을 알아차리는 일, 그 견디기 힘들었던 깊고 아린 상처가 사실은 내 인생의 축복이었음을 헤아리는 일….

회개는 결국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자비의 품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자각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삶의 모든 국면에 깃든 하느님 손길을 찾는 일입니다. 회개는 부족한 나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도 이제 내 위주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위주의 삶을 살아가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중심적 삶을 완전히 탈피한 삶, 온전히 예수님 중심적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순간순간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떠난 겸손한 예언자였습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고 또 버렸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세례자 요한의 생애처럼 그 누군가의 배경이 돼주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이 저리 빛날 수 있는 것은 어두운 밤하늘이 배경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 꽃이 저리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은 대지가 배경이 돼주기 때문입니다"(「연어」, 안도현, 문학동네 참조). 세례자 요한의 삶은 철저하게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위한 배경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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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2베드 3,8)는 성경 말씀이 새록새록 대림의 의미를 깊게 해주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의 고고한 음성이 귓가에 울리면서 시작된 대림 시기도 어느덧 중반에 들어섰다. 그만큼 모든 이의 대망인 성탄이 한층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무릇 대림 시기는 성탄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음이다.

그러나 대림은 성탄을 준비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데에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대림 시기의 나날은 강생의 신비를 기념하는 축제들임을 명심해야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한 번 오셨고 그분의 약속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주 예수께서 아주 가버리지 않으시고 교회 안에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즉 대림 시기는 그분의 오심을 기념할 뿐 아니라 그분이 교회 안에 현존하여 그분의 구원 사업이 완성될 때 다시 오실 것을 기념하는 축제인 것이다. 곧 대림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포용하고 있다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는 천 년도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시간론을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고 현재는 흐르는 것이니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없으나, 과거는 기억함으로써 현재는 목격함으로써 미래는 기다림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하며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현재”라 하였음을 이해할 만한 시기가 바로 이 대림 시기인 것이다.

대림 시기 초입에서 우리는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으로 걸어가자”고 청유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음성을 귀담아 들었다. 한편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하신 주님의 당부도 함께 들었다. 아사야 예언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이사 40,9)라고 우리를 독려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에서 만난 요한 세례자야말로 대림 시기에 만나는 걸출한 신앙의 모델이 된다. 또한, 이 대림 시기에 바울로 사도는 우리에게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리라”(로마 10,17)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대림 시기에 만나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안내할 세 사람(이사야 예언자, 요한 세례자, 성모 마리아) 중에서 이미 오늘로서 두 분을 만났다. 예언자는 매일 크나큰 음성으로 우리를 질책하며 복음의 빛으로 안내해 왔고, 주님을 앞서 증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게 한 요한 세례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만큼 성탄이 가까이 있어 이 땅에 빛의 여명이 트기 시작한 셈이다. 우리가 세태에 억눌리지 않고 세상을 조율해 나가며 크고 작은 일에 비관하지 않아 낙관적이면 “하느님께서…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1고린 1,8)이 틀림없다.

마리아 수도회 안중한(베다) 수사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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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들여다 보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르 1,1­-8)


사막에 들어가는 세례자 요한은 강하고 용기있고 금욕적인 남성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요한이 어떤 형태의 남성상을 보여주는지 볼 수 있다. 남자들은 내면을 들여다보기보다는 일에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내적인 힘을 발전시키는 지혜로운 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문화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는 능력이다. 내향적인 힘이며 사고와 반성에서 나오는 지혜다. 연구나 기술적인 이해도 포함되나 그보다 더 깊은 통찰과 자각하게 하는 힘이다.

영적 지도를 잘하는 메리놀회 신부님이 계셨다. 이분은 한국말은 잘 하지 못했어도 영적 지도를 받는 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영적 성장을 잘 도와주셨다. 그분은 진정 지혜롭고 참다운 영적 동반자였다. 그분은 영적 지도할 때 그곳에는 항상 세 분(하느님과 지도자와 지도를 받는이)이 계시다고 이야기하셨다. 하느님과 지도를 받는 이를 깊이 경청한 분이기에 영적 삶에서 성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힘은 문턱을 넘어가게 해준다. 문턱은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지점이다.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가려면 때로 긴 문턱(통과의례)을 거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춘기·중년기는 인간에게 중요한 문턱이다. 사춘기는 아이도 어른도 아닌 시기다. 중년기 또한 인생의 후반기를 풍요롭게 살기 위해 여러 변화를 겪어야 하는 문턱이다. 이러한 시기를 잘 지나려면 지혜로운 동반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문턱을 넘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극기를 필요로 한다.

근래에 나는 향심기도를 하는데, 안에서 지혜의 힘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혹 이번 대림절에 이러한 노력을 하면 어떨까? 내 안의 지혜의 힘을 길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교회 안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극기인 기도와 단식과 자선 중에서 내가 더 잘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유설 신부(메리놀외방전교회)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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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대림 2주일인 오늘 우리는 마르코복음서 첫머리를 읽게 됩니다.(1,1-8)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절)이라는 말은 이 복음서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이 되는 기쁜 소식에 관한 것임을 알게 합니다. ‘시작’이라는 말은 이 책의 시작뿐 아니라 구원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새로운 시작을 인간에게 선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는 복음서에서 차츰 밝혀지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만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마르코복음서의 핵심 주제인데 끝에 가서 다시 백인대장의 입을 통해 되풀이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 이교도인 백인대장의 고백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15,34)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신 직후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십자가에 비추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아드님의 복음 준비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로 시작되는데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기록된 대로입니다.(제1독서 참조) 요한은 광야를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요한은 집에서 편하게 살다가 어느 날 이제 활동할 때가 되었다고 혼자 결정하고 광야로 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탄생 후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던 ‘광야의 사람’입니다.(루카 1,80)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을 때도 그는 광야에 있었습니다.(3,2) 그 오랜 세월 요한은 광야라는 장소에서 자신을 정화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의 길을 보여 주시기를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사람들에게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마르 1,4) 회개는 외적인 계명을 어긴 것을 헤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세례는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는 것, ‘하느님 앞에서’ 행실의 악함을 치워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이사 1,16) 요한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죄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았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부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소명이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심을 준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르 1,7) 요한은 물세례를 베풀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성령세례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령세례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에게 영이 내리리라고 한 구약의 예언(요엘 3,1-8 참조)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 전에 성령을 받는 것이(사도 2,38; 8,15.17; 9,17; 19,6 참조)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되면서 요한의 물세례와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 백성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어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새로운 현실이 개입됩니다. ‘세례’는 깊이 잠기는 것인데 이제 예수님은 성령 안에 사람들이 푹 잠기게 할 것이고 거기에서 나온 사람들은 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시 죄를 짓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이들한테는 구원의 시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도래하지만 그분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제2독서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움을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표현합니다.

<묵상(Meditatio)>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당신께 마음을 열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 마음을 열어 주시어 저의 ‘본질적인 죄’가 무엇인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가 과연 날마다 ‘하느님 앞에서’ 흠 없이 살며 당신이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도(Oratio)>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는 듣고자 하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시편 85,9)

<임숙희 / 야곱의 우물 2011년 12월호>
  |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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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한국주교회의에서 바오로 6세 교종의 [민족들의 발전] 반포 50주년을 맞이하여, 담화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현안들인 ‘사회의 쇄신’과 ‘평화’,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고자 하였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지금, ‘광야’에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음성을 듣습니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홀로 자신을 마주하는 곳이요,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마저 침묵하는 무서움이 지배하는 곳이기에, 결국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광야에서 들려올 위로의 음성을 전합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이의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느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을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이는 회개하고 가만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증표를 보여라고 합니다. 그 증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결코 요한은 자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곧 그는 ‘용서하는 이’가 아니라 용서를 준비할 뿐이며,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하나 ‘선물로 주어지는 용서’는 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을 증언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여기에는 ‘예수님께 대한 증언’ 세 가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인데 인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종만도 못한 부당한 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진정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자라야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이지만, 시점으로는 “지금” 입니다. 그래서 “오신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는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 집중시킵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의 ‘길을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오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셋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와 함께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그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 2017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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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 굵은 하느님의 사람, 세례자 요한

대림시기 자주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신 세례자 요한은 생각할수록 존경스럽고 멋진 사람입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은 묵상하면 할수록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며 길게 여운을 남깁니다. 이번 대림시기를 보다 의미있게 지내고 싶은 분들, 세례자 요한의 말씀과 삶에 시선을 한번 집중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으면 예수님 조차도 그를 지목하며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 복음 11장 11절)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유다 민족의 깊은 영적 침체기에 예수님에 앞서 등장해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강력한 회개와 쇄신운동을 펼침으로써 유다 땅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선 굵은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언이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살짝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다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큰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추종 세력이 점점 커져 그가 한 마디만 하면 그들은 목숨까지도 바칠 태세였습니다. 지지 기반이 빈약했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당연히 세례자 요한을 여차하면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을 몰아낼 힘과 능력을 지닌 인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찾아 요르단 강으로 찾아온 모든 유다인들에게 종래와는 완전 다른 새로운 세계 질서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가 유다인들에게 선포한 새로운 희망에 대한 호소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엄청난 숫자의 유다인들이 그를 찾아와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 치하의 힘겹고 암울하던 시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약속은 군중들의 엄청난 호응을 얻기에 충분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부자이든 빈자이든, 금수저든 흙수저든 다들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왔습니다. 나중에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마저도 세례자 요한에게 달려와 세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자신이 물러 날 때, 그분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나서실 때가 오자, 손꼽만큼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깔끔하게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초롱총롱한 눈으로, 존경과 흠모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극히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 자신에게 부여된 신원과 사명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외치며 뒤에 오시는 주님께 바톤을 넘겨드립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코 복음 1장 7~8절)

옛 시대(구약)와 새 시대(신약)의 분기점에서 새 시대가 동터 오르자 예수 그리스도를 새 시대의 구원자임을 공포하면서 자신의 죽음으로 옛 시대의 종언(終焉)을 고한 위대한 구약 시대 대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많은 분들이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리더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솔직히 딱 깨놓고 보면, 그들은 봉사자요 종, 신하요 졸병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하는 행실을 보면 왕도 왕도 그런 왕이 다시 또 없습니다. 백성들의 봉사자요 일꾼으로 살겠다고 공언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무소불의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높이 높이 올라갔지만, 스스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한없이 겸손했던 인물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이 주는 교훈을 깊이 되새겨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양승국(스테파노) 신부 - 2017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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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주님의 길을 잘 닦을 것인가?-회개, 위로, 기쁨-

인생은 광야입니다. 광야인생입니다. 광야인생에 길을 내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바로 이 길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길은 어디에?”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주님께 이르는 하늘길입니다.

저는 물론 우리 수사님들이 수도원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은 아마 정문에서 주차장까지 길게 똑바로 난 수도원길일 것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카톡으로 나누는 수도원길입니다. 수도원길은 그대로 주님의 집에 이르는 하늘길을 상징합니다.

우리 마음의 광야에, 공동체의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하늘길을 내야 합니다. 이런면에서 믿는 우리는 모두 주님의 길을 닦는 수도자修道者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대로 대림 제2주일을 맞는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내 마음의 사막에, 공동체 사막의 한가운데 주님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일은 우리의 수행중 가장 중요한 평생 수행입니다. 죽을 때까지 닦아야 하는 주님의 길입니다. 하여 흔히 삶을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합니다. 목표없는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 순종의 여정, 겸손의 여정, 믿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 등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길입니다. 우리가 닦아야 할 하늘길은 바로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신 주님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방금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화답송을 노래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또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소서.”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께서 자비를 보이시고 구원을 주시기에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길을 닦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인가?”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그 구체적 처방을 나눕니다.

첫째, 회개하십시오.

주님의 길을 잘 닦기 위한 첫째 조건이 바로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와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입니다. 길을 잃으면 자기를 잃습니다. 길을 찾아 본래의 하느님 자리로 돌아와 자기를 찾는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회개의 세례의 선포에 이어 많은 이들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회개의 표지가 바로 세례요, 세례야 한번이지만 회개는 평생과정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검소한 모습이 그대로 회개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참으로 자연과 하나된 무공해의 순수한 사람,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런 회개의 표지는 그대로 겸손을 드러냅니다. 회개의 빛나는 열매가 겸손입니다. 회개와 겸손은 한세트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깊어지는 겸손이요 바로 겸손의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마음의 요약입니다. 회개로 겸손해진 영혼보다 아름다운 영혼도 없습니다. 겸손의 아름다움입니다. 오늘 제2독서 베드로2서의 주제 역시 회개입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 년이 하루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참고 기다리십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날이 연장되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마치 죽음이 예고없이 오듯 말입니다. 이에 대한 지혜로운 첩경의 대안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기다리는 은혜로운 대림시기, 회개에 걸맞는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은 바로 끊임없는 회개로 겸손하고 순수해진 사람입니다.

둘째, 위로하십시오.

주님의 길을 잘 닦기 위한 둘째 조건이 바로 위로입니다. 사랑의 위로, 위로의 사랑입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해진 영혼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위로와 치유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기에 이웃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희망의 예언자 이사야는 바빌론 유배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라 명하십니다. 그대로 오늘의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고단한 형제들을 위로하라는 말씀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 다정히 말하여라.”

‘다정히 말하다’는 본디 ‘마음에 와 닿게 말하다’로서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8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2번은 ‘위로하다’와 함께 쓰입니다. 마음에 와닿게 다정한 말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구약성경에서의 ‘마음’은 단순히 감정의 기관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의 주체로서 인간존재의 중심을 뜻합니다. 이런 마음에 가 닿을 정도의 다정한 위로의 말이야말로 그대로 구원체험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유명한 위로의 권고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분 하느님으로서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그와같이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우리는 온갖 환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다.”(2코린1,3-4).

그대로 이웃에 대한 우리의 위로는 바로 하느님의 위로가 됩니다. 위로의 효력은 엄청납니다. 위로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위로를 통한 치유의 구원이요 용기와 희망입니다. 위로의 말로써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서 다음 말씀은 그대로 위로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함께 그것을 보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의 위로에 우리 상처의 골짜기는 메워 치유되고, 교만의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 온유하고 겸손해지며, 불안과 두려움에 거칠고 험했던 마음이나 감정은 평화와 안정을 되찾게 됩니다. 이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는 모두 그 영광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위로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길을 잘 닦기위한 셋째 조건이 바로 기쁨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입니다. 기쁨에 저절로 따라오는 평화입니다. 기쁨과 평화, 이또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지금도 몇 년째 제 집무실 출입구에 붙어있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립4,4-5).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대림 제2주일 두 개의 기쁨의 대림 촛불이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쁨의 빛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영혼은 기쁨의 대림 촛불처럼 기쁨으로 타오르고 있습니까? 문득 어제의 화답송 후렴도 생각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이사30,18참조)

기다림의 기쁨,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이렇게 기다릴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주님이 아닌 누구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아닌 누구를 그리워하겠습니까? 주님이 아닌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주님이 아닌 누구에게 희망을 둘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기다림의 대상, 그리움의 대상, 바라봄의 대상, 희망의 대상은 주님뿐입니다.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는 주님을 기다리기에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참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우리 모두 기뻐하라 명하십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바로 믿는 우리들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바로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마음 높은 산으로 올라가 목소리를 높여 주님 오심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오심의 기쁨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보십시오.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탄에 앞서 오십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오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그대로 대림 제2주일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바로 이런 착한목자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쁨하면 찬미의 기쁨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 찬미가 바로 기쁨의 샘입니다.

요즘 면담고백성사때 마다 보속 하나가 추가됐습니다. 말씀 처방전에 이은 찬미 노래입니다. 성가책을 드리고 보속으로 좋아하는 짧은 성가 1절을 찬미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르도록 하고 자주 찬미성가를 부르기를 권장합니다. 어제는 한 자매에게 찬미성가 보속을 드렸더니 함께 부르자고 하여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대림 제2주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길을 잘 닦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회개하십시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2.위로하십시오. 끊임없이 주님께 위로를 받는 우리들이기에 이웃을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3.기뻐하십시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 대림의 행복입니다. 세상에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만이 참기쁨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며 주님의 길을 잘 닦도록 도와 주십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하느님에게서 너에게 오는 기쁨을 바라보아라."(바룩5,5).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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