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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부활신앙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조회수 | 2,212
작성일 | 06.04.21
현대인들은 실험으로 증명되는 과학적인 것만 믿으려 한다. 그러나 부활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사건은 아니다. 내 눈으로 봐도 믿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서로 공동으로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1. 토마스 사도는 아주 특별한 사람인가?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본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는 사도들의 말을 믿기보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며 자신의 눈과 손으로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고자 한다. 토마스 사도는 체질적으로 의심이 많고 매사를 철저히 확인하지 않고는 잘 믿지 못하는 분인가? 아니면 평소에 예수께 대한 신뢰나 믿음이 부족한 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들자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11,16)하고 말 할 정도로 예수께 대한 강한 열정과 믿음이 있었다.
며칠 전에 죽고 묻혔던 스승이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토마스 사도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제 인간의 양산(量産)을 서두르며, 우주탐험을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과학적인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는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 부활, 천당, 지옥, 천사, 악마 같은 종교적 진리에 대해서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2. 부활은 이미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 테입이 있다면, 사도들에게처럼 나에게도 발현해 준다면 나도 믿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앞에서 죽었던 부모나 가족이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당황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이 날지도 모른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는 상식적으로 또 아무리 눈으로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말하자면 부활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지기인줄로 알았고(요한20,13-14),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본 제자들도 예수를 유령으로 착각했다.(루가24,38)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루가24,16)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차원이지 감각의 차원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의 참뜻을 깊이 새겨야 한다.

3. 부활 신앙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열어준다

오늘 사도행전의 제1독서에는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체험한 원시교회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3) 부활을 믿게된 원시교회 신자들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가진 것을 공동으로 나누는 자발적인 공산주의(공동생활)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을 넘어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활한 예수님의 계속되는 발현을 체험하면서,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게된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재물이나 부귀영화, 쾌락이나 권력 따위는 참으로 하찮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 바오로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3,8) 고 고백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에겐 이 세상의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돈, 쾌락, 권력을 위해 못할 짓이 있겠는가? 보험금 때문에 처자도 부모도 죽이고, 부모 유산 때문에 형제간에 칼부림하고, 실직 당한 남편과 자식들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자기 편하게 살겠다고 훌훌 떠나고, 부정과 비리를 밥먹듯 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왜 이 모양인가? 우리가 세상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 아닌가? 참 신앙인은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우리가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몸소 사신 그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도 그분이 들어가신 참 생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부활은 매일의 삶 속에서 싹트고 자라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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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믿는다’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은 부활 후 맞이하는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이 너무나도, 억씨기도 큰 것이므로 아직도 우리네들 가슴 속 깊이에선 그 기쁨이 고동치고 있는 것 같은데 여러분 모두 그러하십니까? 그러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당신의 부활이 우리 신앙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요한복음 말씀에서는 두려움과 실망에 가득하여 다락방에 모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참 신앙은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주저할게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엇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주저할 게 있겠습니까? 없지요. 없습니다. 부활하신,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토마의 의심과 신앙심에 대해서 한번은 깊이 묵상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은 머리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을 이론이나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우리네 인생에 대해서도 모르는 부분이 많은데 하느님에 관한 일을 면경 알처럼 알려들면 그건 바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인간의 경험과 체험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고,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체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 과학이나 수학에서도 증명을 할 수 없는 부분들은 제일 원리라 하여 전제조건으로 이미 기정사실로 인정하고들 있는 형편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문제와 예수님 부활의 사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의심을 가져서 이익이 될 때도 있을 수 있고, 발전과 성장의 기초가 될 경우도 있습니다만, 병적인 의심이 된다면 현세적인 면에서도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종의 정신적인 병자, 환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의부증, 의처증 뭐 이런 것들도 믿지 못하는데서 오는 심각한 병중의 병이지요. 인간의 근본 욕구는 믿으려고 하는데 믿을 사람이 없고 불신 투성이니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한 일인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주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언제나 계십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비록 침묵 속에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의탁하고, 의지하는 것을 뜻하고 의미합니다. 아멘.

조재영(안드레아)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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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토마스야! 우리를 보고 믿어라!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싶어서 성당과 교회중 어디가 나은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마침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 대답 왈 “자신은 종교를 안가져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교회가 더 나은 것 같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유인 즉 주일날 교회 갔다오는 사람은 마치고 둘씩 짝지어서 기쁜 마음으로 집집마다 방문하며 자기가 믿는 예수님을 전하는데... 성당 사람들은 마치면 혼자서 급하게 뛰어가기 바쁜 것 같아서.. 아마 여유가 있는 교회가 더 좋을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꼭 틀린 말은 아닌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셨습니다.(19절)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습니다.(20절)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23절)

그런데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우리는(복수)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합니다(25절) 하지만 토마는 말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는 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을 뵈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평화를 얻었다면, 부활을 목격했다면 왜 이렇게 골방에 처박혀 있는가? 왜 문을 열고 당당하게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하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면, 또 그것을 믿는다면 뭔가 달라져야하지 않는가? 내가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부활을 체험한 동료들이 달라진 모습이라도 봐야 내가 달라질 것이 아닌가?

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삶으로 증거하지 않는가?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토마스가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애당초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고 다락방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가족, 내 남편, 내 이웃....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이 시대의 토마스는 예수님을 직접 뵙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뵈었다고 하는 우리들의 삶의 태도를 보고자 합니다.

오늘 1독서 말씀을 기억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목숨의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을 위해 무엇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장 16절) 아멘.

임성진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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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하신 첫 인사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의 삶 구석구석에 평화가 가득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고난과 시련 속에 사는 우리에게 평화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요? 그 길은 무엇입니까? 스승이 죽음의 길로 가신 후 무서워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쁨과 평화가 찾아옵니까? 주님의 부활 체험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다.”는 선포, 사도들이 목숨 바쳐 선포한 이 외침은 가는 곳 어디서나 엄청난 피를 뿌리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평화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안고 죽은 뒤 부활하리라는, 이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오늘의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평화의 힘을 얻게 합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감동적인 사실이 있었습니다. 박해 시절, 극심한 흉년에 굶어 죽은 이가 허다했으나 교우촌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전해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 살던 그분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에 따라 신앙 안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적은 것이라도 나누며 사는 공동체 생활이 그 답입니다! 한마디로 평화의 삶이었습니다.

늘 어리석어 서로 죄를 저지르며 미움과 죄책감에 헤매며 사는 우리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용서입니다. 부활하신 평화의 주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너무나 어렵지만 신앙의 힘으로 용서해 주고 용서받음으로 비로소 평화가 가능합니다.

못과 창에 찔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보고 손을 넣어 보아야 믿겠다던 사도 토마스였습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그리스도 부활의 징표를 보아야 믿겠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부활의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으로 생기 있게 사는 모습, 고달프고 부족함에도 사랑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 그리고 용서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누리는 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징표이며 부활의 외침입니다. 아멘.

강윤철 요한 보스코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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