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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조회수 | 2,252
작성일 | 06.04.21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와 토마스 사도가 신앙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집에 모여 있습니다. 때는 안식일 다음 날 저녁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함께 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성찬 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첫 번의 발현에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와 시간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는 일주일 후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같은 주일 성찬집회 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 양식 중 가장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고, 그분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곳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유다인들의 화법에서 온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2,7)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상에다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을 받아 새롭게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면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수님이 실천하신 것이고, 이제는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사는 제자들이 실천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 제1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 자기 삶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자녀는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유럽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한 야만인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신앙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 로마제국 국경 밖에 살면서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던 민족들이 제국의 군사력이 쇠퇴하자 제국영토 안으로 몰려들어와 유럽 땅에 정착한 것입니다. 중학교 서양사 교과서가 야만인들의 침입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이주 후 로마제국의 문명과 더불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교회는 먼저 각자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각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일에 대해 보상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발생한 개인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여 자기 죄를 인정하고, 신부로부터 보속을 받아 행해서 자기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교회 안에 실천되고 있는 개인 고백 고해성사의 유래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문맹이고,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던 시기에 도입된 관행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자기가 잘못 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를 강요하면,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과거에 필요해서 만들어진 고해성사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복음보다 높이 평가하며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해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다가 목숨까지 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사는 사람은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은폐하면, 예수님의 숨결 따라 새롭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에게 유보된 특권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안에 살라계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 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배워 실천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 후 100년 경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그 시대 교회의 실태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살아 계셔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숨결로 살아 실천되는 교회 공동체라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가 모르던 일이 아닙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용서가 없고 사랑이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님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현재 우리의 실천이지만, 장차 하느님 안에 겨자나무와 같은 큰 결과를 기대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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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랑과 승리를 믿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시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에게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자 토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는데 문이 잠겨 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신 다음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시니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평화란?

인간은 평화를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애타게 바라는 평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며, 또한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 언제나 하느님의 의향과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모름지기 진정한 평화의 탐구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1.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

성서의 역사는 그 서막부터 기드온이 「평화의 야훼께」 제단을 바치는 것을 보여준다(판관 6, 24).

하늘의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하느님(욥 25, 2)께서는 「평화를 창조」(이사 45, 7)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그분에게 매달려 평화라는 선물을 내려주실 것을 기대한다.

『당신의 종을 평안하게 돌보시는 주께서는 크게 드러나셔지이다』(시편 35, 27).
유배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나 야훼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바라』(예레 29, 11).

『보라! 나는 너에게 평화를 강물처럼, 이교 백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개울처럼 들이 밀겠노라』(이사 66, 12). 『의인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나니…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 같아도… 그들은 평화속에 있도다』(지혜 3, 1~3).

2. 그리스도의 평화

예언자들과 현자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화된다. 온갖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죄악이 모든 사람에게 소멸되지 않는한, 그리고 마지막 날이 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 한, 평화는 오직 미래의 선으로서만 남게 된다. 루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평화를 가져다 주는 왕을 묘사한다. 그 왕이 탄생할 때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음을 선포한다(루가 2, 14).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최후의 승리를 따르는 부활의 평화다(루가 24, 26). 『나는 당신들에게 평화를 두고 간다. 내가 평화를 당신들에게 주는 것이다』(요한 14, 27).

신앙이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서 계시를 통해서 알려주신 모든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될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내용들을 조목조목 다 믿는다는 신앙고백 후에 비로소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학자들 중에도 냉담자가 있는가 하면 사도신경 하나도 제대로 못외우는 이들중에도 순교자가 있다.

신앙은 머리의 대상이 아니라 가슴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 때라도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드러난 당신의 사랑과 승리를 나는 믿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십자가를 지워주시겠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갈 힘도 함께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부활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이다.

허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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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미꾸라지'인가?

요한복음은 예수부활 사건과 부활예수 발현사화를 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이 초대교회 안에서 제고되는 베드로의 역할을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기 위하여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학자들의 통설을 따르면, 오늘 복음(20,19-31)이 요한복음의 종결부분이다.

20장은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단락(1-10절): 빈무덤 사화를 통한 예수부활사건. ②단락(1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예수의 발현. ③단락(19-23절): 부활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첫 번째 발현. ④단락(24-29절): 부활예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 토마스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두 번째 발현을 통한 부활확인. ⑤단락(30-31절): 맺음말.

오늘 복음은 ③,④,⑤단락을 한데 묶어 놓았다. 각 단락이 보도하는 내용의 형식을 분석하여 본다면 ①,②,③.④단락은 직접화법을 사용한 상황보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⑤단락은 단순설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승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①과 ②단락이 같은 전승에 속하고, ③과 ④단락은 앞선 부분(빈무덤 사화, 부활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독자적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하는 복음저술의 결론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著者)는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30절)이 복음서 저술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이 목적을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신앙에로 전환되는 사건에 연결시키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결국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 앞에 토로(吐露)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는 신앙고백이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도 복음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모든 참 행복자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의 생각과 말은 2000년 세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토마스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믿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이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이 가지는 불신(不信)의 한 유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신성? 성서가 보도하는 기적들? 동정녀의 잉태? 죽음후의 영생? 육신의 부활? 등등에 대하여 믿음보다는 의심을 가진 신자가 적지 않다는 말이다.

개개의 신자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믿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에 대하여는 말하기를 꺼려하고 심지어는 거절하고 불신한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믿음의 조목(條目)이 문제시된 것이 아니라 믿음 전체가 거꾸로 선 것이다. 즉, 예수 전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가 살아 있느냐, 죽고 없느냐?" 에 토마스 자신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우리 눈에 토마스는 우선 제자들 가운데 한 마리의 '미꾸라지'로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제자단에 미꾸라지는 더 많다.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확인함' 없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졌는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말씀이다. 예수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은 한결같이 부활에 대한 의심을 믿음의 동기로 제시하고 있다. 불신과 포기와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만남 없이는 3년 동안이나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믿는데 어려움을 가진다. 토마스 사도의 생각이 옳았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모두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 바울로 사도의 신앙고백이지 않는가?(1고린 15,17)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이 부활한 자는 불신자의 의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자기의 손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활예수를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기 전에 '만남' 그 자체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고백한다. 사실(事實)을 보는 것이 믿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보았지만 모두 그분을 믿지는 않았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마치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공리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공식이나 공리 따위에는 인간의 자유가 차지할 공간은 없다.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유와 신뢰와 희망으로 살았던 신앙의 증인들 위에 서있다. 그 증인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마태 28,20)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다. 한때 불신의 '미꾸라지'였던 토마스나 다른 사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듯이, 우리도 믿음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류를 위해 바쳐진 몸으로 계신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사(聖事)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박상대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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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프면 병원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병원이란 말만 들어도 왠지 가슴이 시리고,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고통과 근심어린 얼굴이 여기 저기 보이는 곳이 바로 병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 육적 상처(19, 25)를 가지고 있어 도움이 절실한 환자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는 잘 모르다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예수님을 목격하면서 받은 충격, 이제는 그 사람들로부터 살아 계신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니 너무나 혼란스러운 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심정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주님은 제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를 수차례 건네시면서 제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계십니다.

병원이란 환경은 고통과 근심, 절망 등이 교차하는 곳이기에 제자들에게 건네신 주님의 평화의 인사는 영적인 치료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이 점점 약해져가는 이 현실에 주님의 자비로움이 담긴 평화의 인사를 우리도 서로 나눔으로써 교회가 진실로 가야할 길(제1독서)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사람이 고통, 특히 죽음 앞에서 희망을 잃은 무기력한 존재임을 병원에서 많이 느낍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병고에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나?' '우리 가정에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 '주님은 정말 계시는가? 계신다면 왜?' 라는 물음들, 이 물음은 그들에게 있어 우리가 고백하는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 아닐 뿐 더러 부활과는 상관없는 분으로 느껴짐은 당연하리라 여깁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봉사자들의 작은 도움이지만 한 걸음씩 믿음의 희망(제2독서)으로 변화되어 가는 환자들을 보면 오늘 복음에서 변해지지 않을 듯한 토마스의 신앙(25절)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자비로운 주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지 않음을 느끼는 이웃이 많음은 그들에게 내가 주님의 자비로움을 보여 주지 못함은 아닌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자비 주일이기도 합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토마스의 약함마저도 당신 품에 안아 주시면서 평화의 인사를 먼저 건네시는 주님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가 노력해야 할 신앙 자세라 여깁니다.

박성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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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통상적인 인사말의 의미를 넘어,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며 위안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있음을 체험한 제자들은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여기서 ‘평화’와 ‘기쁨’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적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견되었듯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숨을 불어넣으시는데,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은 곧바로 죄의 용서와 연결되는데, ‘용서하다’는 것은 매여 있는 바를 푸는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악이며,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또한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신앙은 사람의 지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성적인 사고의 대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겸허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를 넘어선 그분께로 내 마음을 열 때 은총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부활하셨다는 분을 직접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던 토마스(현실적·계산적·과학적 인간성을 대변)도 나약함과 불신에 대한 회한을 자백하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토마스의 신앙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장차 당신을 직접 보지 않고 믿을 이들, 곧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과 더불어 오늘 제2독서에 나오는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라는 말씀은 부활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만큼 그 믿음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의 신앙고백을 통해 세상을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심원택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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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물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주간 첫날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창조의 날, 즉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새로운 시작에는 설렘도 있지만 두려움도 딸려옵니다. 예수님은 그 두려움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우리 삶의 가운데에 오셔서 평화의 선물을 주십니다. 제자들 가운데에 서신다는 말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부활사건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평화’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의 선물은 더는 갇혀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이 무덤에 갇혀있지 않고 부활하셨듯이, 제자들도 ‘두려움’이라는 속박에서 풀려나 주님을 증거하는 용기를 주는 선물이 되게 합니다.

주님의 부활사건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갇혀 지내게 하는 어떤 굴레에서 벗어나 기쁨의 생활로 바꿔주는 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제 제자들만의 체험이 아니라 모든 이들도 부활사건을 체험할 수 있도록 초대하라는 말이기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이란 성경에 의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주님께서는 ‘평화’ 말고도 중요한 두 번째 선물인 ‘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셔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새로운 창조물로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된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습니다. 토마스라는 뜻은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것만 좋아하는 토마스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보아야 믿겠다고 하다가 결국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보지 않고도 믿는” 완전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소중함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고 주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삽시다.

김두유 세례자 요한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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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를 품어 주세요.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바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두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세상에 “큰 은총”을 누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어 사도 요한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설명하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길 것”임을 천명하는데요. 모두 그분의 자비 덕에 누리는 축복이기에 오늘 교회는 주님의 자비심을 높이 기리고 칭송하며 ‘자비 주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꼼꼼하고 다정한지를 뚜렷이 느낄 수 있는데요. 그날 주님께서 하필이면 토마스 사도가 없는 틈에 나타나신 까닭도 그분의 정겹고 다감한 자비를 ‘한 번 더’ 일깨우려하심이 아닐까 싶을 지경입니다.

그날 토마스는 동료들의 들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홀로 왕따 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퉁명스럽게 답을 했을 것도 같습니다. 이리 짐작하니 매우 극단적인 불신의 표현을 내뱉은 그가 동료들을 떠나지 않고 여드레를 함께 머무른 사실이 신기합니다. 이 때문에 그가 진짜, 주님 상처에 손가락을 들이댈 요량이었거나 동료들의 말을 철저히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는데요. 어쩌면 토마스에게는 그 여드레가 꼬박 자신이 함부로 지껄인 말을 통회했던 자숙의 기간이 아니었을까 짚어봅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을 다듬은 결과,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무려나 토마스 사도의 서운했을 마음을 살피니, 지금 우리 마음을 후비고 있는 갖은 의문과 의심들이 생각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불공평하심에 불만을 품고서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의심하는 ‘전과자’들이니까요. 신앙을 팽개치고 싶은 의구심에 영혼을 앓고 믿음에 한기를 느끼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니까요. 열심히 기도해도 “도무지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갑갑해 하며, 나를 미워하고 차별하는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마침내 이도 저도 성에 차지 않아서 이웃의 행복마저 눈꼴사나워서, 성당은 재미없고 외롭고 속상한 곳이 됩니다. 힘든 마음을 상의해 봤자 고작 “하느님만 보고 사람을 보지 말라”느니 “신앙을 재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뻔한 대답뿐이니, 약이 오릅니다. “나도 그런 거, 충분히 안다”고 토마스처럼 팩 토라져버립니다.
만약에 그날 열 제자가 토마스의 돼먹지 않은 말에 눈총을 쏘며 “뭔 말을 저리 막되게 지껄이냐?”며 ‘몹쓸 인간’ 취급을 했다면 토마스는 결코 그들 곁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통하는 저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생각에 열불이 나서 훌쩍 떠나버렸을지 모르겠다는 얘깁니다. 이 때문에 그날 열 제자가 토마스의 미심쩍은 마음을 다독이며 최선을 다했던 사랑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모자란’ 토마스의 불신을 지적하지 않고 끼리끼리 수군대지도 않고 살갑게 토마스를 대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됩니다.

가톨릭 신자의 50%가 냉담자랍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가족 절반이 교회를 떠나 세상을 서성댄다는 통계이기에 참 아픕니다. 빨리 아물어야할 우리의 상처입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아직 그분을 뵙지 못한’ 까닭일 터입니다. 그럼에도 형제들의 마음과 처지를 살펴 마음을 쓰고 함께 하려 애썼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직 모자란 그들의 신앙을 북돋워주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날 토마스의 모자란 불평을 ‘틀렸다’ 하지 않고 ‘다르다’고 구별하지 않았던 열 제자의 사랑과 헌신이 돋보이는 이유입니다. 그 배려가 토마스의 발길을 꼭 붙잡았던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세상을 두려워하며 희생을 미루고 사랑하기 힘들다고 마음을 꽉 잠가버린 우리에게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자유하라 당부하십니다. 부활인답게 자비를 베풀라 이르십니다. ‘참’을 얘기해도 ‘제멋대로’ 판단하여 함부로 말한 토마스를 품어 준 열 제자의 넉넉한 마음을 닮으라 일깨우십니다. 모든 냉담자들이 “그분의 계명은 결코 힘겹지 않다”는 진리를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살핌과 사랑이 그들의 걸음을 재촉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침내 모두 함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찬미할 그날을 꿈꿉니다.

장재봉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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