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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더 큰 불행은 보고도 믿지 않는 것
조회수 | 2,062
작성일 | 06.04.21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以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아야만 믿겠다는 토마스의 말처럼 사람은 백번 듣는 것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하느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욥기 19, 27)

인생의 의문과 고통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고,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과 혼돈을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뵙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보는 것이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하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보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뵙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해야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고, 바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안(肉眼)이고, 그것보다 발전된 것이 뇌안(腦眼)이며, 그것보다 깊은 것은 심안(心眼)이고, 가장 심오한 것은 영안(靈眼)입니다.

우리가 지닌 네 개의 눈 중에서 어떤 눈으로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욕망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이고, 뇌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고 따지는데 필요한 내용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심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바라보는 현실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모든 사물 안에 담긴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 뵙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요한 1, 39)고 하신 것은 보아야만 믿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신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그 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토마스와 똑 같은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수 많은 사랑의 기적들을 통해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은 그의 불신을 드러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자체로는 토마스를 탓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일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보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 중 하나는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해서 항상 그보다 덜 중요한 것만을 찾아내기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 앞에 덜 중요한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뵙는 일은 감정이나 이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으며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일, 사랑을 위하여 견디어 내는 십자가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김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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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이기도 한 오늘, 우리는 두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말씀은 사도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과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생활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내 것, 네 것이 없이 공동으로 소유하며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말씀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고, 그 증표로 서로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서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합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 평화와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토마스의 불신앙을 통하여 부활하신 당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야할 예수님의 과업을 보게 됩니다. 정녕 보고 만져야만 직성이 풀렸던 토마스를 통하여 온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보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뵌 사도들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로소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셨음을 알려야 한다는 사실과 그런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도들의 후예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는 삶의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면, 우선 서로 가진 것을 내어놓고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겠다는 마음과 실천, 다음은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목숨바쳐 사랑하겠다는 정신과 행동,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가운데서도 진솔하게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뵈었소!”

장상원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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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대상인 하느님과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예수님 부활을 불신했다. 그는 예수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를 만져보고서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씀하셨다.

어떤 왕이 유다의 한 랍비에게 "너희의 신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랍비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자, 왕은 "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나의 생을 맡길 수 있느냐?"고 했다.

랍비는 "전하께서 왕비에게 지니신 사랑을 넣어두는 옷 주머니를 보여주시고, 저로 하여금 그것의 무게를 달아 그 크고 작음을 알게 하소서"라고 청했다. 그러자 왕은 "그것은 바보짓이야! 아무도 사랑을 옷에 넣어서 다니지는 않네"하고 답했다.

랍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태양은 주께서 온 우주에 만들어 놓으신 여러 가지 중 하나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잘 볼 수 없습니다. 사랑도 그처럼 볼 수 없지만 전하께서는 한 여인을 사랑하고 전하의 온 생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듯이 안 봐도 믿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했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는 토마스나 왕은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 하는 현대 실증주의의 선구자인 듯하다.

실증주의는 과학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만이 참된 것이라는 사조이다. 근대과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각될 수 있는 현실을 인과의 연쇄 속에서 무한히 추급해 올라가며, 이렇게 얻어진 지식을 전체적, 일반적인 것으로 확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통계적 확률과 개연성의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과의 고리로써 모든 것이 규정될 수 있다고 보는 실증주의와 획일주의를 가지고는 역사성과 주체성, 인격성은 설명될 수 없다. 자기의 검증방법이 옳다는 것을 또한 증명하지 못한다.

신앙은 검증된 지식이나 논리적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지식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한 결코 하느님을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없다. 지식은 하느님을 한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본질상 하느님은 한정될 수 없는 분이시다. 모습이 진실이 아니라 모습을 통해 그 너머의 세계를 봐야 하고, 합리화의 길을 차단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노는 "믿기 위해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이해하기 위해 믿어라"고 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성사를 집전하며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듣고 신앙을 가지기 어렵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의 성격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가르침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 가르침을 믿고 지키는 이는 단순히 스스로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십자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믿음은 현실의 윤택이 아니고, 현재의 진실한 삶으로서 내세에 이어지는 행복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실증주의 교육에 익숙한 현대인들 틈에서 신앙생활은 참으로 어려운 여정이기도 하다.

너와 나를 구별하는 마음이 없고, 생기는 것 없이 주어야만 하며, 드러나지 않게 베풀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선행을 하면서도 선행을 했다는 집착의 마음마저 지워버리는 것은 반대급부를 바라는 인간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삶을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참된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주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대부분의 신앙인은 직접 예수님을 뵌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각자 인격적 하느님과 만나며, 그 체험을 통해 믿음을 키워간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예수님 제자들보다 더 행복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예수님을 안 보고도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강한 믿음은 강한 사람을 이기고, 강한 자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든다.

서광석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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