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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주님과 제2의 인생을
조회수 | 2,191
작성일 | 06.04.21
이제 막 흙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 같은 '초보 수사님'들, 저와는 달리 피부가 '탱탱한' 형제들, 오직 희망으로 가득 찬 수련자 형제들과 한적한 바닷가로 연피정을 다녀왔습니다.

바닷가 날씨는 때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도 잔잔하던 바다, 그래서 호수 같은 바다였는데, 순식간에 세찬 바람과 함께 높은 파도가 몰려옵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인자한 노인 같던 바다는 어느새 화가 잔뜩 난 난폭한 젊은이로 바뀌고 맙니다.

그런 성난 바다, 갯바위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뺨에 와 닿은 바람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몸에 느껴지는 바람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히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한 감정이 밀물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내 인생에 드리웠던 먹구름들도 언젠가 활짝 걷힐 날이 있을 거야, 하느님 은총으로 내 신앙여정에도 저리 고운 옥색하늘이 반드시 열릴 거야' 하는 충만한 희망이 솟구쳐 올라오더군요. 잠시 동안이었지만 너무나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피정의 결실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도자로 살면서도 삶이 왜 이다지도 허황된가, 왜 이다지도 인생이 허전한가, 생각해봤더니 문제 원인은 한 가지더군요. 하느님 체험의 결핍. 그분과 1대1의 긴밀하고도 인격적 만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그리도 삶이 '팍팍'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그분은 내 인생의 둘도 없는 동반자이기에, 내 앞길을 환히 밝혀주는 등대이기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죽고 못 사는' 연인이기에, 그분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행복에 겨운 날이 되길 다시 한번 꿈꿔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 신앙이 이토록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희망하길 바랍니다. 언젠가 반드시 어두웠던 하늘이 걷히고 활짝 갠 날이 다가오리라 확신합니다.

신앙 부족으로 방황을 거듭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명이며 오랜 기간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토마스 사도 역시 예수님 부활 사건을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예수님 발현을 직접 목격한 다른 사도들 증언에도 그는 끝까지 의심합니다.

"나는 그분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는 우리 내면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의 하소연은 우리들의 부족한 신앙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그는 짧은 과정을 통해 불신과 방황의 신앙여정을 끝맺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을 향해 던진 이 한마디 말은 간단한 말처럼 보이지만 오랜 방황 끝에 이뤄진 장엄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발현을 직접 목격한 그는 이제 예수님을 마치 극진히 사랑하는 연인처럼 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에게 있어서 한 인격체, 주인이자 연인, 삶의 의미요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 판공성사 때, 고해소 앞에 줄지어 선 수많은 형제자매님들 얼굴에서 다시 한번 따뜻한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많은 신자 분들의 내적 방황도 손에 잡힐 듯 다가와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제대로 된 하느님을 체험을 한번 해보고 싶지만, 그게 정말 여의치 않습니다.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굶주림으로,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갈증을 채울 길 없어 아쉬워하십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신앙생활은 대체로 순식간에 위기를 체험하더군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체험하는 나날, 그래서 그분과 은혜로운 인격적 만남이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나날 되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지속적으로 '저의 주님'이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친밀한 인격적 사랑을 나누고 있는 신앙인들 얼굴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거듭되는 시련에서도 그들 모습은 의연합니다. 극심한 고통에서도 담담합니다. 참된 영적 예배,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그들의 순수한 봉사활동은 빛을 발합니다. 주님과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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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과제, 하느님 체험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수도자라면 당연히 신분에 걸맞게 언제나 하느님을 눈 앞에 뵙는 듯이 살아가야 하는데,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조심조심 살아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 앉아서 곰곰이 그 원인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너무도 당연하더군요. '하느님 체험'의 부족이었습니다. 소홀했던 영적 생활의 결과였습니다. 사는 데 바빴던 나머지 하느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너무 많이 줄여버린 결과였습니다.

가끔씩 만나는 신자들이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때마다 저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다는 진리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습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 되는 프리미엄도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육적 삶만 고집한다면, 영성생활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면 누구나 하느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로 전락하게 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역시 3년여 세월을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이었지만 정면으로 예수님 부활을 거부합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의 생생한 가르침을 귀담아 들어왔던 제자였지만 그분의 현존을 의심합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토마스는 예수님 발현 현장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난 후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거의 제 정신들이 아니었습니다. 뒤늦게 만난 토마스를 향해 제자들은 감격에 찬 어조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토마스는 그들이 헛것을 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이것들이 다들 짜고 날 놀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어이! 자네들, 지금 날 놀려먹으려고 작정들 했지? 그게 말이 되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죽어도 난 못 믿겠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손에 장이라도 지지겠네!"

토마스는 예수님 부활을 극구 부인합니다. 목숨 걸고 예수님 부활을 불신하는 토마스 사도 앞에 보란 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토마스의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죽어도 못 믿겠다'는 의혹은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의 의혹입니다. 토마스의 불신은 바로 오늘 우리의 부족한 신앙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 신앙인들에게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현존 체험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을 위한 속성 과정은 따로 없습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 역시 없습니다. 오직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하느님 현존 체험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함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 눈을 밝혀주시길 기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 죽음의 계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구원의 주님이신지를 알게 하는 혜안을 청합니다. 누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부활의 주님이신지를 알게 하는 지혜를 청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인간적 눈을 감고 영적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괴롭다, 괴롭다' 하며 보낸 지난 세월은 지옥 같은 고통의 세월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뒤에서 지켜주셨던 은총의 세월이었음을 인정할 줄 아는 영적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루하루 모든 순간들은 그저 허송세월하면서 흘려보내야 할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금쪽 같이 소중한 순간, 부활의 기쁨을 힘차게 노래해야 하는 구원의 순간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가장 가까이 지내기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는 이웃들은 나를 성장케 하고 죽음을 넘어 부활의 기쁨으로 인도하는 가장 감사해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하여주십시오."

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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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의 노래

함께 죽으러 가자고 큰소리 쳤건만
막상 그분이 붙잡히는 모습 보고
줄행랑을 놓았던 자신이 미워 견딜 수 없었지.

어머니 마리아를 뵈올 면목도 없어
혼자 조용히 베다니아를 다녀왔다네.
마르타, 마리아 자매와 슬픔을 함께 나누었지.

돌아오니 동료들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하였지.
주님을 뵈었다니, 정녕 믿을 수 없었다네.
은근히 바보가 되기를 바라며 강경하게 말했지.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못 박히실 때 튀던 핏방울,
창에 찔리실 때 흐르던 물과 피
그분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본 나는 믿을 수가 없었지.

그분이 홀연 방 한 가운데 오셨네.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 음성 들으며 나는 꿈을 꾸는 듯 했지.

“토마, 그대의 손으로 내 손을 만져 보시오.
그대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분 앞에 부복하여 고백했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질책이 아닌 다정한 음성으로 그분이 말씀하셨네.
“그대는 나를 보고야 믿는가?
복되어라,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

이 달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요한 20, 19-29로 기도하면서 우리도 토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해요.

배경이 되는 장소는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이층 다락방입니다. 성전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잡히실 때 줄행랑을 친 이후에 이층 다락방에 함께 모여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 참으로 약한 존재이지요.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 공포에 떨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촉각을 곧추세우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이때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시지요. 문이 잠겨 있었지만 아무 거침없이 그 방에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인사하십니다.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여러분들도 거기 제자들과 함께 있다고 상상하시면서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평화’라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는 모습을 상상 안에서 그려 보면서 당신이 바로 못 박히시고 창으로 찔렸던 예수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그 자상하심을 느껴보십시오. 주님을 다시 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여러분도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도록 청하십시오.

그런데 토마는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지요. 나중에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듣고는 믿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말하는 토마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이 오는지를 솔직하게 바라보십시오.

어쩌면 토마의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다는 현대의 우리들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토마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성서의 다른 대목을 통해 토마가 용기와 열정을 지닌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까운 친구였던 라자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자, 그에게로 갑시다”라고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머뭇거렸지만 토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지녔던 토마가 처음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유를 잠시 헤아려 보십시오. 그는 막상 정말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처형을 당하시자 슬픔으로 미어지는 가슴을 추수를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큰소리쳤지만 그도 다른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놓았지요. 다른 제자들에게 면목도 없고 하여 슬픔을 혼자 감내하리라고 생각하며 혼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두렵고 외로워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제자들에게 돌아왔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대가 말한 대로 해보시오. 그리고 믿으시오.”

주님을 뵌 토마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 감동 안에 머물면서 토마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느껴지는 느낌들을 바라보십시오.

토마가 회의론자였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적어도 정직한 사람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지니게 된 믿음을 예외로 한다면, 아마도 그런 믿음은 거짓 포장된 믿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회의하면서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그 믿음이 깊어가는 것이지요. 어쩌면 정직하게 의심하는 과정을 거쳐 참으로 믿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음을 생각하며 토마가 지녔던 정직함을 지닐 수 있도록 청하십시오.

또한 우리가 토마에게 감탄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믿게 된 다음에 철저하게 투신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실로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 당신은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이라는 전적인 신뢰로 드린 투신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느껴지는 감동 안에 오래 머물러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토마처럼 그렇게 투신하고자 하는 원의가 생겨나면 그 원의를 고백하십시오.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숱한 의심과 회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은총을 체험할 때 우리도 그분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런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면서 기도를 마치십시오

예수회 류해욱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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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모르는 제자들은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20,19). 요한은 그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며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력들이 언제 어느 때고 자신들도 잡아갈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따라왔던 스승의 맥없는 죽음에 대한 절망감과 그분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에 더하여 자신들의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자괴감과 울분이 만들어 낸 두려움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로와 평화를 얻기에 동료들의 체온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이기에는 너무 지쳐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고 닫혀 있는 이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닫혀 있는 그들의 집과 마음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스승이 돌아오시리라는 기대는 손톱만큼도 하지 못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 쪽에서가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 당신의 뜻에 의해 그 집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고통을 통해 얻으신 평화이며, 죽음을 통해 이루어 낸 평화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부터 온 평화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로마 4,25)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하실 때, 거기에는 당신이 고통을 통해 성취한 화해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요한 20,20). 당신 죽음의 승리 표시인 상흔을 보여주자 비로소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20) 그들은 이제 열린 눈으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시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다시 살게 하신 것처럼, 당신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권한과 사명을 부여하시어 사람들한테 파견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와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22절) 우리를 살게 하시는 주님의 숨결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제자들은 회의와 갈등과 두려움을 떨쳐냅니다. 이제 닫아건 문을 활짝 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할 힘을 얻고, 스승이 걸어가신 것처럼 벗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릴 준비를 합니다. 이들 제자들의 파견은 죄의 용서로 이어집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요한 20,23) ‘죄의 용서’는 삶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출발을 가져오며, ‘나’를 해방시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토마스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24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하자,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하고 말합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을 여러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루카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타난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11) 아레오파고에서 한 바오로의 연설에서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청중의 비판의 초점이 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

요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 토마스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곧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토마스에게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증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일주일 뒤에 다시 모여 있을 때 토마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뒤 처음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와 같은 일이 이번에도 일어납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예수님은 그 곳으로 들어오셔서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요한 20,26). 그리고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예수님은 토마스가 원하는 경험에 의한 증거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시면서도,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은 만지거나 손을 넣어보는 일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으로 표현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그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최고의 호칭인 ‘하느님 그리고 주님’을 사용하여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주님, 경험에 의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저희 모두에게 오늘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구합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믿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 당신께서 주신 평화를 전하고 싶습니다.

<강선남 님>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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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   [안동] 사랑의 공동체 가정  [2] 2067
683   [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4] 2464
682   [광주] 혼인은 새로운 탄생  [1] 2173
681   [전주]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맺어준 사건, 혼인  [2] 86
680   [대전]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2] 2234
679   [군종] 4주간의 탐색기간을 드리겠습니다  1934
678   [춘천] 최고의 기적  [2] 2369
677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3] 105
676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3] 1656
675   [부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단  [2] 1821
674   [인천] 함께 나누는 하느님 나라  [3] 1672
673   [수원] “언제까지 속 좁은 신앙생활을 하려합니까?”  [4] 1937
672   [원주] 대범함과 포용력  [3] 1881
671   [서울] 사랑의 의무를 지닌 신앙인  [3] 1944
670   [군종] “내 손과 내 발이 되어버린 죄”  77
669   [광주] 법보다 크신 하느님의 사랑  [1] 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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