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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조회수 | 2,328
작성일 | 06.04.22
해마다 예수 부활 대축일 다음 주일이 되면 으레 우리는 미사 때 부활하신 주님과 토마스 사도의 만남에 관한 대목을 복음으로 듣습니다. 이 대목이 읽혀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 말씀 가운데 나오는 “(부활하신지) 여드레 뒤에”라는 말 때문일 것입니다.

토마스는 한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들자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께 대하여 열정적 믿음을 갖고 있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복음을 보면 이 토마스가 ‘철저한 냉담자’가 되어 나타납니다. 그는 동료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다고 분명히 증언하는대도,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상흔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그분의 부활을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단언합니다. 그가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이 컸던 만큼, 참혹한 그분의 죽음이 주는 충격도 그에게 그토록 컸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열렬했던 그의 믿음과 희망이 어이없게도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토마스가 이런 상태에 있었을 때, 즉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 좌절과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몸소 그에게 다가오시어 ‘평화’를 주십니다(“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표현이 오늘 복음에 세 번이나 나옴). 예수님의 다가오심 자체가 이미 토마스의 비겁함, 불충실함, 불신을 용서하시고 그를 사랑으로 품어 주신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자 그 동안 얼음같이 차가웠던 토마스의 불신이 봄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토마스가 드디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고백합니다. 사실, 이 고백이 뜻하는 엄청난 내용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해서 파악될 성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을 할 때 토마스는 이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서 “보지 않고도 믿는” 차원으로 넘어서 있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토마스는 보고 만짐으로써 다시 믿게 되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오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믿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죽음도 두려움도 의심도 절망도 넘어서서 토마스에게 다가가 그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토마스처럼 깊은 신앙의 위기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 선포되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하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도 질책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십자가의 충격’ 속에 있는 토마스를 불쌍히 여기시며 하시는 격려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토마스 사도 이야기는 토마스와 같이 믿음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신앙공동체가 관용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도 말해 줍니다.

김영남 다미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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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우리는 배반자 하면 '유다'를, 또 의심 많은 사도 하면 '토마스'를 떠올립니다. 사순시기가 배반과 죽음의 계절이었다면 부활시기는 확신과 구원의 계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지만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 사도는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강하게 불신을 드러냅니다.
 
여드레 뒤에 다시 오신 주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고 이르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하며 바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토마스는 너무나도 죄송하고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예수님께 한없는 믿음을 보냅니다. 이제 토마스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확신이 생겼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됐습니다. 믿음은 축복이고 은총이며 행복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참 부럽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을 꼽으라면 저는 '믿음'을 꼽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보물입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는 바탕에서 사랑도 꽃이 피고 열매도 맺을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처럼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부부 간에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난도 아니고 역경도 아닙니다. 의심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불신이 심해지면 병이 되는데 이것을 의부증, 의처증이라고 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끊임없이 상대방을 의심합니다. 묻고 추궁하고 나중에는 문 밖에도 못 나가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밤낮으로 상대방을 감시하는가 하면 혼자 끊임없이 잘못된 환상을 만들어내어 구타하고 핍박하며 그 사람의 나쁜 점만 찾아내서 학대하고 괴롭힙니다. 말 그대로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의 가족과 이웃의 고통은 또 어떻겠습니까? 이렇듯 믿음이 없는 관계는 불행을 가져옵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내가 그 사람을 얼마만큼 신뢰하는가에 따라서 행복 지수가 함께 올라갑니다.
 
환자는 의사를 신뢰해야 병이 빠르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만약 환자가 의사를 믿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전문의라 해도 치료는 당연히 어렵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역시 믿음이 중요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고 합시다. 그 부모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믿고 따르는 만큼 사랑이 쌓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이든지 주고 싶고 또 자녀는 그 부모를 신뢰하고 따르는데 얼마나 바르게 잘 성장하겠습니까? 학생과 선생님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깊이 신뢰해야 교육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불신한다면 교육 역시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모든 결실의 바탕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좋아하시는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실 때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마르5,34; 루카7,50…)
 
믿음 자체가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믿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셨는데 사람들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2주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를 깊이 간직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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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 사도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무척이나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부러움 때문에, 자존심을 지키려고 부활에 대해 의심을 보인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문제는 생사의 문제였고, 토마스 사도는 남들의 이야기만 듣고 부화뇌동하지 않는, 자기체험 없이는 어느 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고맙게도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손발에 뚫린 못 구멍을 보여주십니다.

그 결과 토마스 사도는 남들에게 얻어들은 주님이 아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그 이후에 아주 열성적인 전교를 하게 됩니다. 그는 의심을 통해 확신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의 신앙은 의심 없는 맹신은 아닙니까? 체험 없는 허구의 연극은 아닙니까? 남들에게 전해 들은 정도의 예수님에 만족해 하면서 공동체에 섞여 그저 흘러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대인들은 과학기술로써 습득한 정보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 특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으려 합니다. 사실 그런 것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바쁩니다. 천억 곱하기 천억 개의 별들을 머리에 이고 살면서, 알 수 없는 그 엄청난 것에 대해 경외심을 갖기보다는, 과학기술을 통해 알게 된 것들에 대한 승리감에 도취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세상에서 유한한 생명을 살다가는 존재일지라도,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지탱하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그 무엇과 그 무한한 생명력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토마스 사도는 하느님의 존재와 그 생명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 손발의 못 구멍을 통해서,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영원무궁한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하느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토마스 사도에게서 배울 수 있겠습니다. 그가 의심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간 것처럼, 우리도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경제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물질주의의 비정함과 허무함을 맛보고 있는 우리가, 이제는 그 물질 위주의 삶을 진지하게 의심해 보아야 할 때를 맞이한 것입니다. 신화처럼 이만 달러 소득시대를 열었다지만 아픔도 많이 따랐습니다. 처절한 경쟁,빈익빈 부익부, 불신 풍조, 전인교육의 상실, 가정의 위기, 환경오염 등등… 우리가 얻어 누리는 편리함의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물질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편리함 보다는 사랑입니다. 지식정보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겸손, 희생, 인내, 용서, 온유, 성실 등등… 이제는 보이는 이익을 위해 보이는 물질에만 집착할 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위해 보이지 않는 사랑을 행하며 살 때가 아닐까요.

고찬근 루카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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