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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조회수 | 2,246
작성일 | 06.04.22
형제 자매 여러분, 한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봄비가 촉촉히 내렸고, 앞산·뒷산에는 이제 파아란 새싹과 잎들이 고개를 완전히 내밀었습니다. 자연의 섭리 안에서 새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생태계 안에서도 부활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처음으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왜 모여 있어야만 했고, 또한 제자들은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요?

제자들은 모두가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3년 동안 자신들을 극진히 사랑해 주셨던 스승을 배반했다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을 죄를 졌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자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바로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했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이유에서건 용서 받기 힘든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진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석에 몰릴대로 몰린 제자들은 모두가 ‘유다인들에게 잡히면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을까’를 생각하면서 스승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자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생각으로 반성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서로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제자단의 맏형인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을 3번 씩이나 배반한 사실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서로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는 반성과 함께 책임을 묻는 성토와 대책을 강구하는 이야기들…. 불안과 긴장의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밖에도 못나가고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승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수치심 때문에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따스한 위로의 말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부활한 예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참된 평화의 획득은 예수님께서 죄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생명을 바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시작된 위대한 세상의 화해가 이 평화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는 십자가에 못박힌 당신의 고통을 통해서 얻은 평화이며, 고통과 죽음을 통해 그분이 처음으로 성취해낸 평화입니다.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선택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을 때도 분명히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지만, 욕심은 욕심을 부르듯이 마음의 평화는 더 멀어지기만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김준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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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부님들이 제 방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청소 좀 하고 살아라. 이게 뭐니?”

하긴 제가 봐도 조금 지저분하기는 합니다. 책상 위에는 저도 모르게 먼지가 소복하게 쌓였고, 책장이 없다보니 한쪽 벽 구석에 대충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서 누가 깨끗하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저분하다고 뭐라고 하시는 그 신부님들이 저보다도 더 많이 어지럽혀놓고 또한 정리도 안하시고 그냥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래도 네 방에 오면 그냥 편해. 아무데다 뭘 버려도 티가 나지 않아서 그런가?”

워낙 지저분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방의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려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니 조금 부끄럽기는 하더군요. 그래서 큰 맘 먹고 방 정리를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정리를 해도 일주일을 채 못 넘기고 또 지저분해지겠지만 저는 청소도구를 잡고서 방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방이 이렇게 지저분하고 정신없어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거야.’ 라는 생각 때문에 구석에 쌓아두고 있는 많은 잡동사니들. 그래서 방은 점점 더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정말로 깨끗한 마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나의 마음일까요? 혹시 지저분한 제 방처럼, 세상의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있어서 너무나도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죽음 이후 이렇게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는 두려워 떨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그렇게 정신없고 지저분한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깨끗하게 잘 정리된 마음을 원하시지요. 그래서 나타나시자마자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방을 깨끗이 정리하기 위해서는 내 방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을 치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마음 안에 필요 없는 것들이 치워져야만 했습니다. 즉, 두려움과 의심. 이것들이 있는 한 제자들은 더욱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과 의심을 없앨 수 있는 평화를 가장 먼저 주셨던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들고서 우리들 마음의 청소를 위해서 오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평화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 대한 증거를 세상에 펼쳤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가요? 주님께서 내게 필요한 것을 들고서 옆에 서 계신데 그것은 전혀 잡으려고 하지 않고, 내 마음을 더욱 더 어수선하게 만들 엉뚱한 것만을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몫을 이미 다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선택만 남아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조명연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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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훈훈하심

한50은 넘었을 듯한 농부가 아무도 없는 성당 저 구석에 일주일에 서너 번은 철푸덕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한 30분정도를 머물다 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여러 번 지켜본 교우가 농부의 손에 기도서도 없고 심지어는 묵주도 없는 것을 보고 “뭐하시다 나오세요?”하고 물었더니 “저 어른 얼굴 뵈러 왔시유.” 하신다. 교리교육 중에 ‘저 어른이 우리들 아버지’라고 배우셔서 판단도 없고 독촉도 없고 물어 따지지도 않고 너무 편안해서 아무 생각 없이 아버지 무릎에 머리 기대어 쉬었다 가신단다. 기도는 딱 한 가지 “나, 왔어요.” “나, 가요.” 이시란다. 씨~익 웃으시는 하느님의 따스한 눈길이 농부의 온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듯하다.

예수님은 한분이시지만 그분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이들이 느끼는 예수님의 색깔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어린이들에게 물어보면 ‘엄마 같은 예수님’에서부터 ‘친구처럼 친해지고 싶어요!’하며 ‘친구 예수님’이 되었다가, 무엄하게도 자기 동생이 너무 예쁘다고 예수님이 동생이랬다가, 끝내는 성탄을 떠올리며 ‘응애~’하고 우는 ‘아가 예수님’이라고도 대답한다.

조금 좁혀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린이들이 어떤 대표되는 이미지와 느낌을 갖고 있을까가 궁금하다. 어떤 분은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 혹은 승리자, 죽음을 이겨내신 하느님으로 가슴에 색인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공감대를 어찌 형성해야할지 다소 어렵지만 모두 마땅한 말씀이다. 다만 한 가지 더 보태어 어린이들이 오늘 복음처럼 훈훈하신 예수님도 만났으면 좋겠다.

내가 부활하신 후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어찌했을까? 불 보듯 뻔하다. 속 좁은 나 같았으면 제자들은 최고 사망에서부터 아무리 너그럽게 해도 곤장 오백 대는 족히 맞으라 했을 터이다. 그토록 가르치고 깨닫게 하려해도 못 따라온 제자들의 그릇 작음 때문은 아니다. 적어도 3년은 스승 덕에 이런저런 영광들을 챙기기도 하고, 예루살렘 입성 시에는 대중들 앞에 폼 나게 나귀 끈을 잡았던 이들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십자가에서 도망가고 스승의 죽음 후에는 자기들 살 궁리에 잠수함을 탔던 최소한의 의리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넉넉하신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평화가 그대들에게 있기를!” 하고 인사하신다. 한국말로 하면 “잘들 있었냐?”나 “밥 먹었냐?”하는 정도이다. 스승이시자 주님이신 예수님께 대한 불신과 배신의 부끄러움으로 쥐구멍을 찾던 제자들에게 ‘너희들 그럴 줄 알았어.’하는 째려봄도 없이 며칠 전 인사하실 때와 똑같이 말씀하신다. “얘들아, 잘 있었느냐?”

완전한 용서는 아팠던 상처는 물론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기억조차 잊어 주는 것이라 하는데 예수님이 오늘 제자들에게 그리 행하신다. 불러 앉혀놓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지 않으시고, 믿음의 양이나 질을 책하시지도 않으신다. 앞으로 잘하라는 각서는 물론이고 하셔도 되는 훈계조차도 없으시다. 불신과 배신이라는 말 자체를 모르시는 분처럼 그저 수염 잡은 손자를 대견해하시며 안아주는 할아버지처럼 훈훈하게 안아주신다. 게다가 ‘못 믿겠다!’ 버티는 토마스마저도 “그럼 네 손가락을 여기 넣어” 하시며 아기 다루듯 보듬어주신다. 훈훈하신 분이시다. 이토록 따스한 예수님을 느끼게 되면 마치 김연아가 우승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잠시라도 넉넉해지고 기분 좋아지게 한 것처럼 예수님의 훈훈함이 믿는 이들의 마음을 넉넉하고 포근하게 하여 기쁘게 살아 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돌아가신 추기경님의 삶에 믿는 분, 믿지 않는 분 안 가리고 저런 어른을 뵙게 되어 흐뭇해하고 ‘나도 닮아야지!’ 하며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추스르는 것처럼 말이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하신 분이 당신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쏟아 부으셨겠는가! 그토록 사랑하신 제자들의 못남을 기억조차 안하시는 예수님의 훈훈하심이라면 이런 분에게는 마음 놓고 기대도 된다. 생을 내어 드려도 된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편안해지고 훈훈해져서 “아! 참 좋고 편안타.” 하며 저 농부처럼 예수님 품에서 쉬었다 가시는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참 좋겠다.

이덕진 가브리엘 신부
  |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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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라는 드라마의 조연은 우리

요즘처럼 볼거리가 많은 문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봅니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각종 스포츠의 중계, 케이블 티브이에서 24시간 틀어주는 영화들, 방송 때마다 이슈를 만들어내는 드라마들,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연극과 뮤지컬……. 생각해보면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명작들이 한 두 편쯤은 있을 것입니다.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면 그 극을 이끌어 가는 주연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인공의 연기를 보고 감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연만큼 빛나는 조연 또한 기억합니다. 극 중의 조연들은 주인공을 위해 존재합니다. 주인공과 연극을 이끌면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조연이 하는 역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또 다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조연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토마스의 불신앙 내지는 의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굳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다소 흥분된 듯한 말투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담긴 물음,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싶다는 우리의 소망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 속 토마스 사도의 말과 행동으로 부활이라는 최고의 드라마는 다시금 긴장감을 얻게 됩니다.

‘내 인생’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은‘나’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나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은 각자 삶의 현장에서 조연을 맡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조연이 없으면 극이 풍요롭고 아름답게 또 짜임새 있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맞이한 우리는 지금 최고의 드라마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연출자는 하느님이고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이 극의 조연은 바로 우리입니다. 토마스 사도의 역할로 다시금 조연들이 해야 할 일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풍요롭게 꾸미는 일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조연 혼자 잘났다고 떠들어 대면 이야기는 꾸며지지 않습니다. 주인공과 함께 이야기를 꾸며 나가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그분이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조연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부활 시기를 지내면서 내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그 역할이 무엇인지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양성일 시메온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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