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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요한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회개를....
조회수 | 2,233
작성일 | 05.12.09
교회공동체는 대림 셋째 주일 복음 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그가 오늘날까지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세례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인데, 요한이 벌린 세례운동은 내적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내적 회개와 죄의 삶을 거부하는 선택의 징표로 세례예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세례운동에서 중요한 점은 사람을 물에 담그는 예식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변화를 요청한다는 점입니다.

물은 한편으로는 ‘정화’를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예식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죄에서 ‘정화’되면서, 지금까지 죄의 경향에 따라 살아온 ‘나의 죽음’을 결단하는 강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면 당시에 유대교 규정에는 ‘자신을 정화할 수 있는 항목이 없었는가’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이에 대하여 구약성경의 레위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17장부터 언급된 정결에 관한 여러 규정들입니다. 이 규정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서 다시 정결한 모습 즉 정화된 상태로 설 수 있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 전통은 예수와 요한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유효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성전의 사제들에게 가서 제물을 드리기보다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사막에서 사는 요한을 찾아가서 세례받기를 원했을까요? 이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해답을 얻기는 어렵지만, 성전에서 드리는 제례가 ‘형식적인 것’에 대한 실망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제시한 것을 하고,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치며 사제들과 함께 기도하지만, 하느님께서 진실로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과 예수의 복음운동은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공통적으로 외쳤습니다. 이와 같이 출발의 바탕이 같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에 대해 증언하고 그의 길을 준비하는 중요한 인물로 요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일곱 가지 성사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가 요한이 펼친 세례운동에서 강조하는 ‘회개하는 결단’을 잊는다면, 우리는 세례자 요한시대의 유대 종교전통이 보였던 허상, 그 종교적 틀에 안주하는 잘못을 다시 한 번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의 길을 준비하던 요한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회개, 마음을 돌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청합니다. 교회공동체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 셋째 주일에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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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자의 아름다운 겸손

점점 싸늘해져 가는 날씨가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대림환에 촛불이 한 개 더 켜졌습니다. 그만큼 빛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주여, 주의 은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또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옵소서'하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구세주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아름다운 마음 자세로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자세를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배웁니다.

오늘의 복음(요한 1,6-28)은 먼저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고 빛을 증거하기 위하여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로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그분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임무를 띄고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매혹되어, 그를 그의 위치보다 더 높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 복음의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위치가 침해되는 지위를 세례자 요한에게 주었던 당시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 세자를 혹평하거나 그의 지위를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이지만, 결국 그의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에 예속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이 기록될 당시, 몇몇 지방에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기를 원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저자는 의식적으로 요한이 아니고,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의 이 대목은 오늘날에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점을 말해 줍니다. 어떤 경우에 그리스도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교하는 사람의 설교 또는 강론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행되고 있으나, 청중 중에 어떤 이는 그 설교를 하는 사람의 말솜씨라든가 설교자의 목소리가 어떻고, 제스처가 그럴싸하다든지 등의 관심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상의 내용보다는, 십자가상이 얼마나 값이 있는 것인지 그 외적인 본래의 의미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에 집착을 가지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 사람이 가진 묵주는 5천원짜리인데, 저 사람은 그 묵주를 얼마나 아끼는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만지면 몹시 화를 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의 성물로써의 묵주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귀중품으로 간직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그 재산을 이용하여 인간 생활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고, 인간의 완성을 위해서 사용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나, 그 반대로 재산을 위해서 인간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을 우리는 항상 느끼며 삽니다. 이런 주객이 전도된 의미를 모르는 소유나 삶은, 이번 대림절을 통하여 본 의미를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하여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파견된 세례자 요한을, 본래 그의 위치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들려주는 말씀이며, 또한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무엇도 최고의 지위에서 그리스도를 밀어내서는 안된다는 점을 힘차게 들려주십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엘리아인가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모세가 약속한 위대한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26-30절에 보면, 유태인들이 요한 세자에게 와서 예수가 세례를 주고 사람들을 가르치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예수를 비난하리라고 기대했으나 요한 세자는 “그분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요한 세자는 예수님의 신 끈을 풀기에도 부당한 자라고 자기를 가리켜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노예가 되기도 부당하다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요한 세자의 아름다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아니고 단순히 전령자요, 전달자요, 예비하는 자로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위대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무대에서 주역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임무 이외의 지위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마음의 준비를 모든 사람들이 가질 때, 온 세계는 좀더 아름답고, 진정한 의미의 성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 안에 진정 그리스도는 가까이 임하실 것입니다.

남은 대림절을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그리스도 오시기를 간구합니다. 분명 그리스도는 겸손한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실 것입니다.

함세웅 신부
  |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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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묻히지 않는 달처럼…

“슬픔이 절망 속에서 움켜쥔 썩은 지푸라기라면 행복은 희망 속에서 마주친 향기로운 꽃”이라는 말이 한 해를 보내는 마음에 잔별처럼 내려앉습니다. 지나온 시간은 늘 말 없는 말로 채근하고 오늘은 그 말 없는 말에 죄인 아닌 죄인처럼 움츠러들지만 그래도 내일을 향하는 발걸음 멈출 수 없기에 다소곳이 두 손 모으고 슬픔의 썩은 지푸라기가 아니라 희망 속에 마주친 향기로운 꽃이 되기를 기도하는 대림입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일 수 있는 이유는 지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자기 정체성과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인간일 수 있고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삶은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영역을 어느 정도 확대해 가느냐에 따라 성숙과 미성숙으로 나뉘게 된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생의 출발점에서지만 끝은 같을 수 없고 태어나는 모습은 선택할 수 없지만 마지막은 선택할 수 있기에, 오늘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려는 노력만큼은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찾아와 누군지 묻는 이들에게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 말합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사람’이 아니라 ‘내라고’ 외치는 소리라는 자신에 대한 이해는 어쩌면 모든 신앙인의 정체성을 되묻게 하는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증언할 사명을 받았고 그 사명에 충실해, 종국에는 신앙의 마중물이 되어야 하는 존재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달은 어둠 속에 자리하지만 어둠에 묻히지 않고 태양처럼 어둠을 압도하지 않지만 결코 그 빛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어둠을 바라보며 어루만질 뿐입니다. 세상은 빛과 어둠, 선과 악이라는 극단적 생존방식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선과 악 그리고 그 어둠과 악을 어루만지는 사랑과 자비가 마주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신앙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둠에 묻히지 않는 달처럼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묻히지 않고 세상을 어루만져야 할 삶 말입니다. 연약한 들꽃이 밤새 비바람을 맞으면서 어두운 밤을 이겨내고 흘리는 눈물이 아침이슬이듯이 우리 신앙인이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에 묻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진실한 눈물이 이 세상 구원을 위한 마중물이 되어야 합니다. ‘변명이 많으면 삶은 구차해지고 발전은 느려지는 것’처럼 한 해를 보내는 우리가 구차한 자기변명보다는 진실한 반성과 참된 회개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거룩함이 천상 빛을 타고 마음 착한 이들에게 사랑으로 입맞춤하는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입니다. 어둠에 묻히지 않는 달처럼, 연약한 들꽃이 밤새 비바람을 이겨내고 흘리는 아침이슬처럼 그렇게 모진 삶에도 올 한 해 하늘의 거룩함을 사랑으로 살아내려 애쓰신 형제 자매들에게, 그 옛날 동방박사들을 인도하던 영롱한 별빛이 언제나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권철호 다니엘 신부
  |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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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간경화로 위독한 상태에 빠진 아버지에게 두 딸이 동시에 간을 기증해서 아버지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건강한 사람의 간을 이식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먼저 아들이 간 기증 의사를 밝혔으나 혈액형이 맞지 않아 이식할 수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큰딸은 동생보다 자신이 당연히 간 이식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검사를 받았지만 지방간으로 판정돼간 기증이 어렵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결국마지막으로 둘째 딸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아버지에게 간을 떼어 줄 수 있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딸은 평소 앓던 빈혈이 악화되면서 1개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사이 둘째 딸에게 의사는 “간 크기가 너무 작아 혼자서는 않된다.”고 이식 수술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던 중 큰딸의 지방간 증세가 호전되어 두 자매가 동시에 간 일부를 아버지에게 이식하는 2대1, 간 이식수술을 했습니다. 결국 두 자매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감동적인 기사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 주일의 의미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 소외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구체적으로 나누자는 것입니다. 자선이야말로 인간의 가치를 한껏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요. 자선의 나눔은 쓰고 남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떼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자선을 베푼다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그것을 모두 되돌려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10,42)

우리는 기쁘면 나누게 됩니다.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장애인이 자신이 받는 고통으로 세상에 봉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기도로 승화시켜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자선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구체적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유다인들이 몰려와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다그칩니다. 그때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소리다.”(요한 1,23)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낸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선행위야말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이 바로 회개의 표시가 되며, 또한 주님을 받아들이는 최상의 준비가 됩니다.

자선이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는 참된 연민의 정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이웃은 항상 우리 손이 닿는 그곳에 있다는 것을….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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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풀었을 때,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들어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에 질투를 느꼈던지, 한 무리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을 찾아와 따져 묻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구 길래, 이렇게 세례를 주는 것이오?”

뭔가 설득력 있는 자기변호가 있어야 할 터인데, 세례자요한은 그저 겸손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아닙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소리는, 그 소리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전달해 주는 내용이 없이는, 소리는 그저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풀이하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신 ‘말씀’이며,(요한1,1 참조) 세례자 요한은 그 말씀을 전하는 ‘소리’라고 설명합니다. 곧, 요한은 대중적 인기에 기대어 자신의 인간적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불과한 자신을 통해 진정 말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이 베푼 세례의 근본적인 권위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것임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기꺼이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고자 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자신을 하느님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요한의 이런 자기 비움은,“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난해 시성되신 마더 테레사의 삶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움을 발견합니다.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에 비유하시며 (성녀의 일일 묵상집 『사랑은 철따라 열매를 맺나니』에서 인용) 주님의 도구로 봉헌하셨던 성녀는, 당신의 온 삶을 인도 캘커타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시며, 이런 자선의 삶을 통해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자기 비움의 참된 원형은 바로 지금 우리가 고대하는 예수님의탄생에서볼수있을것입니다.하느님의 육화라는 이 놀라운 신비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으로서의 영광과 권위를 모두 비우시고 겸손 되이 참 인간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성자의 거룩한 자기 비움입니다.

소유와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주님께서 거처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채우고 드높이려는 일체의 욕심을 내려놓고 비워내며, 그 빈자리를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득 채우려는 매일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육화의 신비를 우리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최규하 다니엘 신부 : 2017년 12월 17일
  |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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