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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벗(친구)이라 부르겠다
조회수 | 2,481
작성일 | 06.05.1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선택한다면 많은 단어 가운데 하나가 “벗”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3-15)하시며 진정한 벗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벗은 같이 웃고 울며, 같이 아파합니다. 그래서 벗은 같음입니다.

저는 공소를 방문하는 길에 수녀님으로부터 환자의 진정한 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병원에 원목신부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병원에 말기 암환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목 신부님은 그 환자를 방문하여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답니다. 그분은 바닷가에서 살다가 오신 분이라 “바다의 파도 소리와 바다 모래를 만지고 싶다” 고 했습니다. 원목 신부님은 바다로 가서 파도 소리를 녹음하고 바다 모래를 박스에 담아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환자에게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려주고 바다의 모래를 만지게 하였다고 합니다. 말기 암 환자는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다 모래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으며 너무나 기뻐하였답니다. 얼마 후 그 환자는 세상과 운명을 달리 했지만 원목 신부님은 이 환자에게 진정한 벗이 되었습니다. 벗은 같음이며 같이 웃고 같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요한15, 12)하신 말씀을 원목 신부님은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이며 사제다운 향기가 나는 이야기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벗이듯이 원목 신부님은 환자의 진정한 벗이었습니다.

진정한 벗에 대한 묵상을 더 깊이 하기 위해서 아시시의 프란치스꼬 성인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어느 날 성인께서 길을 가다가 나병환자를 만났습니다. 마음 한편에서는 가서 기도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전염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마음이 생겨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나병환자를 그냥 지나쳐 온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 주님, 제가 나환자를 지나친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하고 말씀드리니 예수님은 “너는 왜 그냥 지나쳐 버렸느냐?” 하고 묻자 그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그 때 주님은 프란치스꼬에게 “너는 그 나병환자보다 깨끗하냐? 너는 그 나병환자보다 더 더러운 죄인이다. 그런데 나는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프란치스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날 밤 그는 나병환자와 같이 자며 진정한 벗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였습니다. 성인은 평생 “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십시오.”(요한15, 12)하신 말씀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벗 사랑은 함께 있음이며 같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어디에서 만나야 합니까?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벗 사랑 실천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짐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귀를 열리게 하여 부활의 세계를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벗으로서 대하셨고 벗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놓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공한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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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 9)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님의 달’입니다. 특별히 로사리오 기도를 많이 바치면서 성모님의 훌륭한 신앙을 본받도록 합시다. 요즘 농촌에는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바쁘게 움직입니다. 농사일을 너무 많이 해서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조금만 여유를 찾으시고 쉬엄쉬엄 일하시고, 일하시면서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 신비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전에 SBS에서 ‘용서’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아내, 4대 독자를 잃은 고정원(루치아노) 형제가 용서의 과정에서 겪는 인간적 갈등과 분노, 치유를 담은 다큐멘터리였습니다. ‘범인을 잡으면 아무 이유도 없이 단란한 가정을 파탄시킨 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범인도 죽이고 저 또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이런 생각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관용의 마음을 갖게 된 건 세례를 받은 후부터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부터 루치아노 형제는 서서히 ‘용서 해야겠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치아노 형제는 유영철을 용서하고 난 후부터 사형제도 폐지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초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 9-10) 우리가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고르넬리오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내리자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행전 10, 34) 이제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도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방인들도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우리 신앙인의 유일한 삶의 기준은 예수님의 계명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할 것입니다.

루치아노 형제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 루치아노 형제는 비로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용서는 얼어붙은 살인자의 마음도 녹아내리게 하여 회개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제 루치아노 형제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인간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박탈하는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훌륭한 사랑의 잠언(箴言)을 남겨주셨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4, 7-8)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의 실천 현장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한 주간이 되도록 합시다.

최숭근 비오 신부
  |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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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

오늘 복음 말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고 그 표현들도 다양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 말씀을 잘 깨닫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흔히 이웃에 대한 사랑만을 생각합니다만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서로’라는 말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라는 상대가 있다는 말이고, 그 상대 역시 나와 똑같은 의무를 지닌 것입니다. ‘서로’이니까 일방적으로 나만 사랑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내가 사랑받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두 존재 사이에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성격이나 생각, 습관이나 생물학적 요소들이 다르고 차이가 있지만 차별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차별이 있으면 일방적인 것들이 생겨나게 되고 결국에는 돈, 권력, 명예 등 모든 부분에 있어 독점이라는 현상을 낳게 됩니다. 독점의 현상이 벌어지면 서로간의 평등함이 사라지고 참된 사랑도 어렵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는 차별이 있지만 친구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차이를 넘어서 비로소 참 사랑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래서 참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적인 요소를 없애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차별이 없어야 독점의 현상이 사라져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같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같다’고 할 때는 수치상의 의미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의 편의나 이익에 따라 사회에 만연된 다양한 차별적 요소를 외면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요한 15,17)고 말씀하셨기에 이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래서 법이든 무엇이든 이 사회에 차별을 낳고 독점현상을 유발시키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다 제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데 하느님의 정의는 차별을 없애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별없는 참된 사랑을 나누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의 표현대로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요한 15,16) 것입니다. 여기서 ‘언제나’라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니 곧 ‘영원함’이란 의미입니다.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맺은 열매가 영원히 남게 하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입니다. 이 영원히 남아 있을 열매는 곧 하느님과의 일치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과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고 하신 것입니다. 계명이라는 말 때문에 ‘무엇은 하지 마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계명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요 뜻이요 그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인간과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는 우선적으로 하느님과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고 이웃과의 사랑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으며 세상과의 사랑 또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4대강 사업도 반대하고, 제주 강정 마을 해군기지 건설도 반대하고,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으며 지금까지 소외된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어야 친구가 되고, 친구가 되어야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고, 참된 사랑이 이루어져야 영원한 열매를 우리가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명령”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따라서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별적인 요소를 우리가 외면한다면 그것은, 오늘 복음표현을 따라,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혼자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이 문제 때문에 ‘연대성의 원리’를 오래 전부터 가르쳐왔습니다. 차별적인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지속적이어야 하고, 많은 이들과 함께 해야 하며, 자기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손해보지 않고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헛된 것으로 보이는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준으로 볼 때 그 죽음은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는 결정적 제사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 사랑에 머물기 위해서 우리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 희생을 바탕으로 희생하는 많은 이들과 연대해야 하고 세상 끝날까지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이 피곤하다고 손해된다고 내가 마다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과의 일치, 이웃과의 일치, 세상과의 일치를 강하게 희망한다면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을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앞으로의 우리의 삶은 반드시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든 천국에서든 그리고 고통 중에 있든 아니든 언제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충만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생각으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마시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 외에 다른 그 어떤 것이 우리에게 존재합니까? 그러면 예수님 말씀대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우리 공동체와 이 세상에 기쁨이 넘쳐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차별 없는 세상, 누구나 하느님께서 주신 그 권리를 마음껏 누리는 세상, 말 그대로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안동교구 정진훈 타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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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교는 하느님의 일이자 교회의 일

오늘 1독서 말씀이 포함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유다교의 한계를 벗어나 보편성을 가지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유다인들이 주축이었던 초대 교회는 비 유다인들의 그리스도교 입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였다. 중요한 이유 하나는 이방인들의 음식 문화였다. 유다인들은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세세히 규정하고 철저히 지켰다. 예를 들면,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생선만 먹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러한 유다교의 음식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에, 유다인들이 볼 때 그들은 부정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교인들은 부정한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종교와 인종, 문화와 전통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선교를 위해 친히 활동하신다. 여기서 하느님은 선교의 주도권이 당신께 있음을 보여주신다. 먼저 하느님은 베드로에게 한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하신다. 베드로가 허기졌을 때 하늘에서 큰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들어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것을 먹으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망설였다. 그 안에 부정한 동물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모든 동물을 깨끗하게 만드셨다고 한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세 번이나 하느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결국 그 동물들을 먹지 않는다. 오랜 관습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데도 차마 그 명령을 따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 신비 체험은 베드로에게 깊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베드로가 그 체험의 의미를 곱씹고 있을 때 하느님은 다른 쪽에서 활동을 시작하신다.

하느님의 천사가 로마의 유력한 가문 출신의 코르넬리우스에게 나타난다. 이 인물은 우리 교구 내의 우곡에 살던 한국 최초의 수덕자 농은 홍유한 선생과 닮은 면이 있다.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홀로 하느님 말씀을 접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였던 농은 선생처럼, 코르넬리우스도 유다인이 아니었고 할례도 받지 않았지만, 하느님을 알고 경외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을 따르면 하느님께서 선교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말씀의 씨앗을 뿌려 두신 것이다. 하느님의 천사는 코르넬리우스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하고, 이 말씀을 따라 코르넬리우스는 심부름꾼들을 베드로에게 보낸다.

이때 자신의 신비 체험을 통해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깨끗한 민족과 부정한 민족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던 베드로는 성령의 말씀에 따라 그들과 함께 코르넬리우스 집으로 간다. 거기서 복음을 가르칠 때, 그들 안에 있던 말씀의 씨앗은 그 싹을 틔우고, 그런 그들 위에 성령이 내린다. 우리는 흔히 성령은 세례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도행전의 말씀은 성령은 세례를 앞서 선교 과정 안에 이미 현존함을 보여준다. 성령의 강림을 본 베드로는 더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한편 선교사를 가르치며 준비시키고, 다른 한편 선교의 대상 안에 말씀의 씨앗을 뿌려 두신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게 하신다. 선교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 자리에는 성령이 함께하신다. 이처럼 선교의 주도권은 철저히 하느님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만백성을 위한 당신 구원 계획의 실현을 위해 교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신다. 우리 그리스도교인은 세례받을 때부터 근본적으로 그 본질이 선교사다. 선교사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늘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 성령께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 자신을 가득 채워야 한다. 하느님 구원의 도구로 우리 자신을 기꺼이 봉헌해야 한다.

▦ 안동교구 함원식 이사야 신부 -- 2018년 5월 6일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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