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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서로 사랑하여라
조회수 | 2,597
작성일 | 06.05.19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부제서품을 받기 전 ‘30일 이냐시오 피정’에 임하였었다. 그 피정은 신앙인으로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계기라고나 할까. 모태신앙부터 시작된 나의 신앙은, 유년 시절을 보내고 신학생으로서 8년을 살면서도 하느님을 당연히 믿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피정 속에서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내 짧은 생애 속에서 한 순간도 함께 하시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때에 얼마나 감사의 눈물을 흘렸었는지. ‘아,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이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생각해본다. 만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때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듯이, 하느님께서도 사랑하는 나에게 당신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길 바라실 것이리라. 그런데 그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예복을 갖춰 입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복을 갖춰 입을 수 있는 방법까지 우리들에게 알려주셨다. 그 방법은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시어 그 아드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을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예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글 중 ‘사랑해’라는 말을 풀어놓은 글을 읽었다. 요약하면 죽을 ‘死’자와 너랑 나랑의 ‘랑’자와 함께하자는 ‘해’자를 합쳐서 ‘너랑 나랑 죽을 때까지 같이 해’라는 말이란다. 아마도 그저 의미를 부여한 뜻인 것 같지만, 어찌 보면 맞는 말인 듯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말로써만 이루어지는 가르침은 마음에만 다가올 뿐이지 삶 속에서는 잊혀지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세족례와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몸소 가르쳐주셨다.

지난 주 복음에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나온다. 오늘 복음은 그에 연결된 말씀으로, 그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간직하라고 하신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분만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자. 그러기 위해서는 두렵지만 한 걸음씩 내딛으며 열매를 맺어 간직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여라.”

김동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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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

오랜만에 동기를 만났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난 이후 한결같이 가장 가까이에 머물러 주던 친구였습니다. 사제가 된 이후로도 줄곧 얼굴을 보며 지냈습니다. 그런 친구를 몇 달을 못 만났으니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항상 마음은 있지만 서로 시간을 맞추는 것이 좀 어렵다보니 만나지 못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의 첫마디는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는 것입니다. 왠지 자신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못하고 지낸 것이 꽤나 미안했나 봅니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둘이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구가 있어 행복한 밤이었습니다.

사실 둘이 만나면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는 편은 아닙니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을 한결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할 이야기도 별로 없습니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표정만 봐도 알 만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합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줄 것 같고, 나에게는 숨기는게 없을 것 같은 그런 강한 믿음이 세월 속에서 자라온 것 같습니다.

삶을 살아가며 단 한 명의 믿을 수 있는 친구만 있어도 그 삶은 행복하다는데, 부족한 저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런 친구를 주셨네요. 혹시 여러분도 이런 친구가 있으신지요? 존재 자체로 마음의 편안함을 주는 친구, 내 모든 것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친구, 무언가를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친구, 무언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알려 주었고, 당신께서 가지신 것을 모두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시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주인이 아니라 친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야 할 차례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으로는 친구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서로의 사랑과 믿음을 주고받아야지만 친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께 나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죄송하지 않아야 하며, 예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시간입니다. 서로 함께하는 시간,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고 기도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장성준 안셀모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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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로 사랑하십시오

차별하지 않는 사랑

물이 수증기가 되려면 섭씨 100도가 되어야 합니다. 0도의 물이건 99도의 물이건 끓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가 무려 99도라 하여도 결국 1도가 부족하면 물은 끓지 않습니다. 하나가 더 있어야 물은 수증기를 내뿜으면서 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0마리의 양 중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그토록 애간장 끓이는 관심을 쏟으신 까닭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물을 끓게 하는 1도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어쩌면 우리 가족에게서, 우리 단체에서, 우리 구역에서, 이웃에게서 여러 이유로 따돌림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있어야 우리는 천국으로의 비상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사람을 차별하여 왔습니다.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라가 같지 않아,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믿는 종교가 같지 않기에, 고향이 틀리기 때문에, 출신 학교가 같지 않다는 등등의 이유로 쉽게 남을 배척하였습니다. 공평하지 못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평하지 못하고 차별 대우하여도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십니다. 이를 드디어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방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이같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도 10, 34-35).

진정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당신 품안에 다 받아들이신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설교 도중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농사철에 경운기 등 농기계를 쓰지만 예전에는 논밭을 갈 때 소를 부렸습니다. 대부분 소 한 마리를 부렸으나 험한 밭이나 땅을 깊게 팔 때에는 두 마리의 소를 부렸다고 합니다. 한 마리 소를 부리는 것을 ‘호릿소’, 두 마리의 소를 부리는 것을 ‘겨릿소’라 불렀다고 합니다. 농부가 두 마리 소를 부릴 때에는 오른쪽은 일 잘하는 소인 ‘안소’를, 왼쪽은 일이 서툰 소인 ‘마릿소’를 세워 일 못하는 소가 일을 잘하는 소를 따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소도 하물며 이러할 진데,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진정 부족한 이들, 나와 다른 이들을 틀렸다 할 것이 아니라 배우도록 일깨우며 함께 가야 합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기도는 가끔 폭소를 자아내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 어린이가 강아지를 잃어 버렸는데, 어린이미사 기도 중에 눈물을 흘리며 강아지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보신탕집에 끌려가지 않게 해 달라고 하여 곁에 있는 아이들도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편지를 소개합니다. 동심의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대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여동생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느님, 저번 주에는 비가 3일 동안 계속 내렸어요. 노아 방주처럼 될까봐 걱정했어요. 하느님은 노아의 방주 안에 무슨 동물이든지 두 마리씩만 넣으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우리 집에는 고양이가 세 마리나 있어요.”

어찌 이 같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월 따라 늘어가는 것은 나이만이 아니라 죄와 잔꾀와 거짓으로 얼룩진 흉물스러움입니다. 이 꼴 보기 싫은 죄 많은 어른들까지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죄인인 우리를 친구처럼 생각하시어 당신의 목숨을 다 내어 놓으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이시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 살자고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이어서 예수님께서도 또다시 우리가 잃었던 사랑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만남의 세월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행복을 만들 수도, 사랑할 수도 있는 시간과 기회들을 얼마나 헛되이 흘려보냈는지 모릅니다. 이제와 후회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의 때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화해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 법입니다. 죄 많은 우리에게 사랑의 주님은 오늘 또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배광하 신부
  |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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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 삼아 요즘 바닷가 백사장을 걷곤 합니다. 백사장을 걷고 있으면 파도의 부서지는 소리가 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그런 백사장에 요즘 검은 물체가 많이 있습니다. 그 검은 물체가 신기해서 물체 가까이가 보았습니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미역이 었습니다. 파도와 함께 끊어진 미역이 밀려 올라온 것입니다.

원래 미역은 외해에 가까운 바위나 돌에 착생하여 사는 일 년생 생물입니다. 미역이 번식하는 때에는 결코 미역이 거친 풍랑과 파고 속에서도 잘려 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다 수명을 다하면 파도와 함께 근해로 밀려 올라옵니다.

바다에 앉아 해변으로 밀려온 미역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5)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연이여 오늘 복음 말씀인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10)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지에 붙어 있을 때 그 어떤 거친 시련과 아픔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떨어지면 쉽게 떠밀려 오는 미역과 같고, 불속에 던져지는 가지와 같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라고 아주 명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1요한 4,7)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거룩한 계명이자, 주님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께서 직접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모습을 우리도 배우기 위해 노력하여야 합니다. 사랑 그리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위안 받고 싶은 자에게 위로해 주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울어주는 것,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여러분도 ‘모든 이에게 모든 것’ 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윤장호 신부
  |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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