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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짝사랑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누가…?
조회수 | 2,333
작성일 | 06.05.19
어느 한 편에서만 혼자 하는 사랑을 짝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짝사랑을 가리켜 온전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 주었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았기 때문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에 대해 “내가 무엇을 받았지?”라고 반문한다면, “정말 살아오면서 받은 것이 없었을까?”라고 다시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말 없었을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늘 우리에게 주시기만 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무엇으로, 어떤 모습으로 보답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네 삶 속에서 받기만 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혼자서만 일방적으로 짝사랑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짝사랑과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상호보완적인 온전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이같은 일방적인 사랑은 부모와 자녀, 부부, 형제, 이웃 등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서로에게 기쁨과 행복보다는 아픔과 상처를 줄 때가 더 많음을 봅니다. 동시에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사랑은 옳은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라는 미명하에 강요하거나 자기 틀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방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진정 서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서로에게 기쁨과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일방적이거나 짝사랑과 같은 불완전한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한 모습으로서 서로 주고받는 관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조건이 붙는 관계는 옳지 않습니다. 주는 것 역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다른 이에게 줄 때 받는 사람 또한 기쁘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이 말씀이 구체적인 모습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 없다면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일방적이고도 공허한 메아리로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삶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네 삶 속에서 실재적이고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은 진정 사랑이시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요한 4,8>

이성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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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사무실 게시판을 본 순간 한숨부터 나왔답니다. 게시판에 도대체 무엇이 적혀 있기에 제가 한숨을 지었을까요? 저희 사무실 게시판에는 성지순례 오시는 공동체와 그 숫자가 적혀 있답니다. 이렇게 미리 성지에 알려주셔야 그 숫자에 맞게 야외에서(순례객 수가 많으면) 또는 경당에서(순례객 수가 적으면) 미사를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오시는 순례객 수가 자그마치 600명 정도가 쓰여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하십니다.

“순례객들이 많아지면 좋지 않아요? 헌금도 많이 걷힐 테고, 성지 물건도 많이 팔릴테니까…….”

그럴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제가 지향하는 성지는 기도하는 성지이지, 돈 버는 성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더욱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성지가 될 수 있도록 성지 설명도 그런 식으로 유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면, 특히 단체로 오면 거의 야유회 수준으로 변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성지에는 직원이 저를 포함해봐야 모두 4명뿐입니다. 그런데 600명이 원하는 것이 모두 같을까요? 그리고 그분들의 바램들을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이것을 해달라고, 또 다른 분들은 저것을 해달라고 하다보면, 성지 직원의 수가 적기 때문에 결국 서로 상처만 입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첫영성체 대상인 어린이들까지 방문을 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 개개인으로 봤을 때에는 너무나 예쁘지요. 하지만 단체로 왔을 때 제일 통제하기 힘든 대상이 바로 이 어린이랍니다. 어른 대상으로 준비한 성지 설명이 아이들에게 맞을 리가 없으니, 그 시간에 아이들은 온갖 장난은 다 칩니다. 따라서 제가 주의집중을 해서 성지 설명을 제대로 할 수도 없겠지요.

이 새벽에 기도하면서 또 다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을 읽으니 바로 이곳 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네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저는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이 우선 걱정부터 했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괜히 걱정하고 한숨만 내쉬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만 사랑을 베푸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오늘 오시는 순례객 600명 중에서 많은 분들이 예수님 안에서 이 사랑을 가지고서 순례를 하실 것이랍니다. 따라서 이 사랑 안에서 서로 배려하며 하루를 보낸다면 분명히 주님을 더욱 더 뜨겁게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로 우리들은 많은 걱정을 뒤집어쓰고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만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기도만 한다면 우리들에게 그 걱정거리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만이 나의 걱정을 없애는 비결입니다.

걱정만 말고, 먼저 사랑의 실천을 생각해봐요. 분명히 해결책이 나옵니다.

조명연 신부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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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에 찬 신앙

당신은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당신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것은 성인 세례식 때 예비신자들에게 맨 먼저 묻는 질문과 답의 내용이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단순히 오랫동안 산다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 지상의 짧은 삶속에서도 어서 죽었으면 하는 이들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 남은 삶을 포기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삶의 의미와 기쁨을 잃어버렸거나 희망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1)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이후로 내 삶에는 언제나 기쁨과 희망이 샘솟게 되었다.

2) 세상의 기쁨은 별로 없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갖게 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인내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게 되었다.

3) 일단 내가 선택한 길이고 안하기에는 무언가 불안하고 찜찜함으로 그저 최소한의 의무만이라도 이행하려 한다.

4) 신앙생활? 그건 해보았지만 별 느낌도 없고 바쁜 세상 살아가기에 거추장스런, 부담만 안겨주는 듯해서 아예 접고 산다.

5) ......

여러분은 과연 어디에 속하십니까? 그리고 진정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은 어느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이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또한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모든 신앙의 자녀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아니 하느님 안에 있는 참 기쁨을 함께 누리고 나누며 살게 되기를 바라고 계실 것이다. 기쁘지 않는 신앙생활은 오래갈 수 없으며 오히려 또 하나의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가톨릭 전례분위기는 어떠한가? 주로 장엄함과 경건함만 채워져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이런 분위기속에서는 하느님을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로, 예수님을 훈훈한 친구나 이웃으로 느낄 수 있기가 힘들 것이다. 과연 하느님,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늘 기쁨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불필요한 벽이나 거리가 있지 않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사랑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저희 연수동 성당에서는 매주 목요일 저녁8시에 찬양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예수님의 은총을 보다 맛보며 느낄 수 있도록 기존미사의 틀 안에서 그날 말씀의 주제에 맞는 다양한 성가와 성체현시, 안수 등을 접목하여 행하고 있다.(사목정보 2009년 5월호 참조) 무엇인가 좀 더 느낌이 있고 활력이 있는 미사를 쉽게 체험해보고 싶거나 함께하고 싶으신 분들 모두를 초대한다.

“한번 와 보십시오.” “서로 사랑하여라.”

김재수 토마스 신부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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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머물러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

성모성월을 맞이하는 첫 주일, 성모님의 신앙은 마치 이 아름다운 계절과 닮아있어 보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5월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가슴 깊이 간직하셨던 성모님의 아름다운 모습은 예수님의 삶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농부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 깨닫고자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셨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그 열매를 아름답게 맺으셨습니다. 그 열매는 하느님의 말씀에“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시는”(필리 2,8)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이신 주님의 열매를 계속 맺을 수 있길 바라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 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의 힘만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주님과 떨어져 맺는 열매는‘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요한 15,8 참조)이 아니라 나의 힘으로 이루었다는 교만함의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순종의 모습이 아니라면, 그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이 사라지고 자신을 하느님처럼 되게 해주겠다는 창세기 뱀의 유혹에 또다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지금 그 뱀을 당신의 발로 짓밟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셨던 성모님의 겸손과 순종에서 흘러나온 성령의 힘으로 힘껏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그분의 계명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1요한 3,24)이라는 제2독서의 말씀을 가슴 깊이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해라’,‘~하지 마라’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 앞에 끊임없이 낮아지게 하는 겸손과 순종으로 이끄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생명의 말씀에는 언제나 성령의 힘이 함께 하시므로, 제1독서의 사울이 주님을 박해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는 모습”(사도 9,27-28)이 되었듯이, 우리를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이신 주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오늘도 빵의 형상으로 미사 전례를 통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자 하십니다. 이제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무슨 열매를 맺으시렵니까?

장세윤 모세 신부
  |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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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서울에서 혼배미사 주례가 있어서 전철을 타고서 다녀왔습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인해 꽤 붐비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복잡한 전철 안에서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아 덥고 짜증이 날 수도 있는 상황 안에서 좋지도 않은 목소리로 크게 통화하는 모습은 눈살을 저절로 찌푸리게 만들더군요. 그러면서 예전에 들었던 ‘대중교통 최악의 승객 베스트 5’가 생각났습니다.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다리를 필요 이상으로 벌리고 앉는 사람, 지나친 애정 행각을 벌이는 사람,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타는 사람, 이어폰 없이 DMB 보는 사람.

솔직히 이런 사람을 어제 하루 동안 다 보았습니다. 그만큼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위와 같은 행동을 하면 과연 기분이 좋을까요? 문제는 나는 괜찮고, 남은 안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더 아름답고 멋있는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열 명이라면 난 그만큼 멋진 사람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만 명이라면 난 그만큼 훨씬 더 멋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수천 년에 걸쳐 존경과 추앙을 받는 이유는 그 분들이 사랑한 사람의 수가 그 누구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 역시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순서를 늘 거꾸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받아야 남에게도 사랑을 베풀겠다고 먼저 주장을 하니, 항상 사랑이 아닌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이 내 마음을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충만한 기쁨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기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심지어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사랑까지도 행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로써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하면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켭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접속하지요. 첫 시작 페이지는 뉴스입니다. 사회, 경제, 스포츠, 심지어 연예 소식까지 접하면서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를 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만 보고 있고, 또 남의 이야기를 사람들과 계속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의 이야기만 보고 남의 이야기만 나누다보니 내가 주연이 되는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내가 주연이 되어 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받을 사랑만 떠올린다면 우리들이 주연될 날은 절대로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주연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의 멋진 주연이 되길 바랍니다.

조명연 신부
  |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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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에 보면 글을 쓰기 어려운 이유 한 가지가 나온다. 그 이유는 잘 쓰려는 욕심 때문이다. 어떻게 쓰느냐와 무엇을 쓰느냐의 차이이다. 어떻게 쓰느냐,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멋있게, 있어 보이게 쓸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이 부질없는 욕심을 만든다. 그러나 무엇을 쓰느냐에 대한 고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글의 중심은 내용이다.

많은 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하면 명문을 쓸까하는 고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이다. 그 무엇은 신앙생활의 내용이며 예수님의 초대인 사랑의 삶이다. 사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2-13)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삶을 사셨다. 착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산다는 것은 늘 걱정하고 끌어주며 목숨을 내 놓을 때까지 돌봐준다는 말이다. 온통 내어주는 삶, 베푸는 삶, 봉사의 삶이다. 결국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셨다. 그 사랑은 새로운 계명이며 반드시 신앙인들이 살아내야 하는 삶이다. 예외 없이 예수님을 닮고자하는 모든 이는 자신을 잊고 오직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위대한 사랑의 덕을 실천하며 예수님의 초대에 충실히 응답해야 한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삶으로 밝혀야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 35)

5월은 소중한 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은총의 시간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자존심을 내세우면 겉치레가 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2코린 4, 5)라고 고백한다. 사도 바오로가 감동을 주는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종까지 되어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존심이 없어야 한다.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자주 자존심을 내세우면 온전히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사랑이 선을 이루고 위로가 되고 화해를 이루며 희망이 되도록 신앙인은 예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완전히 비우고 조건 없이 내주시는 예수님을 그대로 닮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그때부터 남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인천교구 김주현 베드로 신부>
  |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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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가게 되면 답답한 것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터넷입니다. 인터넷 속도가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웹 페이지 한 면을 열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지난번에 유럽으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호텔 로비에서 외국인 한 분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느린 속도였지요. 저 같으면 지루하고 답답하다면서 화를 낼 것 같은데 전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습니다. 여유 있게 차 한 잔을 마시고, 또 옆의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천천히 인터넷을 하고 계셨습니다.

지난 평창 동계 올림픽 때에 외국인들이 인터넷 속도에 깜짝 놀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에 길들여 있어서 일까요? 조금만 인터넷 속도가 느리면 짜증과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느리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빠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할 것 같지만, 그렇게 많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 없는 것까지 보게 되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주변의 작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를 타고 가면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천천히 걸어야 볼 수 있는 경관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느림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한 기쁨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담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빠른 것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빠르게 얻을 수 있을까요? 한 눈에 반한 사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랑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천천히 다가가는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화를 내고, 그 사람의 마음이 좁다면서 상대방에 대한 섣부른 판단까지 합니다. 사랑은 절대로 빠르게 얻을 수 없습니다.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의 일방적인 집착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부터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겠다.’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의 노력을 통해서만이 그분의 큰 사랑 안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그 노력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을 하는 사람만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요한 사도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참조).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은 할 만큼 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사랑하지 않는 이유만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 사도도 오늘 제1독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사도 10,34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하지 않는 모습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빠르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히 사랑은 아주 천천히 다가가야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기쁜 소식과 함께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끔찍한 죽음까지도 선택하면서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배반한 제자들을 혼내기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사랑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요한 15,11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18년 5월 6일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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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   [인천]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6] 2374
681   [서울] 남자의 감격  [6] 4365
680   [대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1] 2220
679   [마산] 기도의 보루(堡壘)로 진을 치자  [4] 2273
678   [안동] 사랑의 공동체 가정  [2] 2068
677   [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4] 2465
676   [광주] 혼인은 새로운 탄생  [1] 2174
675   [전주]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맺어준 사건, 혼인  [2] 90
674   [대전]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2] 2235
673   [군종] 4주간의 탐색기간을 드리겠습니다  1936
672   [춘천] 최고의 기적  [2] 2370
671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3] 107
670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3] 1657
669   [부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단  [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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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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