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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랑은 우리 삶의 본질
조회수 | 2,415
작성일 | 06.05.19
하루에 한번이면 될까? 일주일에 한번 아니 한달에 한번이라도 괜찮을까?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웃사랑은 기회가 되면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해야 될 의무이다. 왜냐하면 이는 예수님의 준엄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주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충만히 받아 참으로 행복한 삶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웃을 얼마나 자주 사랑하면 되나? 이러 저러한 이유로 주변을 돌아보면서 살기가 쉽지 않은 현대인의 생활속에서 자칫 일주일에 한번 아니 한달에 한번이라도 이웃을 챙기면서 살 수 있다면 상당한 사랑의 전도자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얼마만큼’ 또는 ‘얼마나 자주’ 이웃사랑 실천이 있으면 될까 하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금방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그런데 우리가 태초에 창조될 때도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태어났고 세례를 통하여서는 더욱 새롭고 완전하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느님 가문 즉 우리 집안의 내력이고, 하느님이 사랑이시듯 우리 또한 사랑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아버지 하느님께서 늘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듯 예수님도 그러하시고 또한 우리들도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즉 사랑은 우리 삶의 본질이며 오로지 여기에 우리 존재의 이유와 기쁨이 있다.

유장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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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랑한다면 계명 지키자”

성당 앞산에 벌써부터 뻐꾸기 울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마도 뻐꾸기란 놈이 어디에선가 남의 새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았겠지요.

뻐꾸기는 특이한 탁란(托卵)의 습성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 속임수의 명수입니다.

남의 둥지에서 태어난 뻐꾸기 새끼는 다른 새 알과 새끼를 바깥으로 떨어뜨리고 둥지를 독차지합니다.

대부분의 새들은 ‘뻐꾸기 아빠’가 되지 않기 위해 뻐꾸기 알을 골라내는 기술을 갖고 있지만 일단 뻐꾸기 알이 자신의 둥지에서 부화한 뒤에는 자기 새끼인 것으로 철석같이 믿게 됩니다.

알에서 부화한 뻐꾸기는 게걸스럽게 먹어대며 부모보다 몇 배나 몸집이 커지는 데도 가짜 부모 새는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운답니다.

그리고 뻐꾸기가 날아갈 때쯤이면 진짜 어미 뻐꾸기가 둥지 주위를 돌며 “뻐꾹, 뻐꾹”하고 울어대며 다 자란 자신의 새끼를 데리고 갈 준비를 합니다.

보리를 벨 무렵 이산 저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는 어미 뻐꾸기가 남의 새 둥지에서 다 자란 새끼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몇 년 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뻐꾸기의 생활에 대해 다룬 내용을 보고나서, 그동안 늦봄의 정취와 추억의 소리로 들리던 뻐꾸기 소리가 ‘얌체들의 합창 소리’로 들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는 일이 힘들기로서니 어떻게 그렇게 얌체 같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열매만 따먹겠다는 속셈 아닌가? 참 얌체 같은 새로다…!”

그러다 문득 내 마음을 휘젓고 지나가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나는 혹시 뻐꾸기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맺어야할 결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수고하고 땀 흘린 결과로 얻어지는 결실보다 편하고 쉽게 내가 바라는 것들을 차지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내 모습이 얌체 같은 뻐꾸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시는 마지막 저녁식사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난 후 분명하고 엄숙하게 당신의 속마음을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목숨마저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 전부를 바쳐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었다면 피하고 싶었던 길,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거부하고 싶었던 희생과 고난의 길을 앞서 걸어가시며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드러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는 것이지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사랑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만이 그분께서 걸어가신 사랑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발을 씻겨 주셨기에 우리도 서로의 발을 씻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기에 우리도 자신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앞장서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아들이셨기에 우리도 그분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인간은 오직 사랑 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갑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똑같이 그 길을 걸어가도록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안에 머문다면 그들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기쁨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 분의 벗이 되는 길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하는 것이며 그분이 가신 길을 우리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시골집에는 오래된 뻐꾸기시계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매시간 창문을 열고 나와 시간을 알려주는 뻐꾸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자신에게 외치곤 합니다. ‘뻐꾸기처럼 살지 마라…’

박용식 신부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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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사랑의 핵심적 요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서로 사랑하여라"하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고 명령이다. 복음의 핵심이 사랑이며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박상선이라는 나이 지긋한 백정이 장터에서 푸줏간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젊은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다. 한 양반은 "상선아, 고기 한 근 다오"하고 말했다. 백정은 "그러지요"하고 답하며 솜씨 좋게 칼로 고기를 베어주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상대가 비록 천한 신분이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박 서방, 여기 고기 한 근 주시게"하고 말했다.
 
그런데 먼저 고기를 산 양반이 보니 나중에 담은 고기가 자기 것보다 갑절은 돼 보였다. 그 양반은 화가 나서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은 크고 내 것은 작으냐?"하고 따졌다. 그러자 백정은 "그야 손님 고기는 '상선'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르신 고기는 '박 서방'이 잘랐으니까요"하고 대답했다.
 
인간의 말과 행위는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가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남의 인격을 표현하는 언행에서 자신의 인품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성품, 즉 인격을 선물로 받고 태어났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가치를 갖는 데 필요한 인격을 소유하고 타인을 인격자로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 대접받을 때 행복하며 사랑을 느낀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자들은 온갖 질병과 고통과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이었다. 버림받은 여인과 세리, 죄인 등 소외되고 인격적으로 멸시받는 자들이었다.
 
인간 내면에는 남을 지배하려는 사자 같은 마음과 남을 속이고 사욕을 채우려는 여우 같은 마음 등 온갖 동물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마음 안에 내재한 하느님 모상을 존중함으로써 사랑으로 성화시켜 그들의 인격을 회복해 주셨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하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행위는 단순한 자선을 뜻하는 게 아니다. 무시 당해서도 짓밟혀서도 안 될 하느님 형상인 신성을 그들 안에서 발견하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 눈에 하찮게 보이는 보잘것없는 자들이 만물의 근원이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빈민층에 속하는 어부들을 당신 제자로 만드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격자로 사랑하듯이, 우리 또한 서로를 인격체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물질이 인간의 존엄한 가치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른바 '사'자 붙은 직업을 가진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 별장 등 수억 또는 수십억 재물이 요구되는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진다. 배우자를 돈으로 사는 것이고, 배우자가 돈에 팔려가는 셈이니 신종 인신매매로 볼 수 있다.
 
혼인은 하느님의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이 가장 이상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중대사다. 스스로 엄청난 금전을 내고 종노릇을 자처하거나 반대로 돈에 현혹돼 종살이를 자처하는 자들이 이런 혼인생활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 자기보다 뛰어난 상대는 사랑해야 할 반려자가 아니라 주종 관계가 되기 쉽다.
 
우리는 때로 명성과 인격을 혼동한다. 명성은 어떤 사람에 대한 외적 소리이지만, 인격은 인간이 자신 안에 갖추고 있는 하느님 모습, 곧 사랑이다. 그러기에 이웃을 외형에 따라 평가하지 말고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하여 인격적으로 대접해야 한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올바르게 실행하는 것이 된다.

서광석 신부
  |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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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1요한 4,7ㄱ)."

세상이 아무리 삭막하다고 해도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수영도 못하면서 물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다른 사람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119 구급대원들, 경찰관들, 군인들, 공무원들도 많고, 이런 저런 감동적인 미담들을 계속 듣게 되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지만, 안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종교와 신앙과 직업 같은 것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 자체로 위대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꼭 그렇게 죽어야만 사랑인가? 그렇게 극한의 상황에서만 사랑이 빛을 내는 것인가? 일상생활에서는 사랑이 위대하지 않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사랑은 다 위대합니다. 꼭 죽어야만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반드시 뭔가를 하는 것만 사랑인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참는 것도 사랑입니다. 신호위반을 하고 싶어도, 과속을 하고 싶어도, 갓길로 달리고 싶어도 참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사랑입니다. 사실 도로교통법 잘 지키는 것은 대단한 사랑 실천입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교통규칙부터 잘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더운 여름날, 에어콘 앞 시원한 자리에 앉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전례가 시작되기 전에 휴대전화기를 끄는 것도 사랑입니다. 일상생활 속의 작은 희생과 사랑이라고 해서 덜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카인의 자손 중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멕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3ㄹ-24)."

카인을 해치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게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사적으로 보복하는 일을 못하게 막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는 것은 라멕 자신이 그렇게 복수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흔히 카인을 나쁜 놈의 대명사처럼 생각하지만, 이런 내용을 생각하면 사실은 라멕이 카인보다 훨씬 더 나쁜 놈입니다.

라멕이라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모습은 사랑의 정반대 쪽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존중, 사랑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오직 지배하고, 독점하려는 욕망뿐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서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라멕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만 하면 모욕죄니 명예훼손죄니 하면서 고소를 남발하는 집권 세력의 모습이 꼭 라멕을 닮았습니다. 독재자들도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데, 사랑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고, 지배하려고만 하는 자들의 '친애'는 거짓말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에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양보하고 희생하기만 할 수는 없다.' 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더라도 일등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부모나 학교가 이 세상을 더욱 삭막하게 만듭니다.

개그맨들이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비판하기 전에 교회가, 신앙인이 먼저 그런 세상을 바로잡아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일등만 사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는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이 없습니다. 서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한 경쟁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 '서로 사랑하여라.'는 '함께 행복해져라.'입니다. 아무도 희생하는 일 없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도 부득이하게 하나가 희생해야 한다면, '네가 아니라 내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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