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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조회수 | 2,459
작성일 | 06.05.1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인인 우리 안에 흐르는 생명도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관능적인 사랑도 있고, 이기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또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 요한 제1서는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4,10)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흐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이해 타산적입니다. 우리도 사랑할 때 관대하지만, 대단히 제한된 관대함입니다. 걸핏하면 철회되는 관대함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인간 세상에 준해서 상상합니다. 인간은 불안할 때 하느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인류가 세상에 살면서 발견한 대자연은 광활하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운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대자연은 갖가지 천재지변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높고 강한 사람은 고마운 때도 있었지만, 두려운 때가 더 많았습니다. 크고 강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혜택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위협적이고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원시 시대부터 인류는 대자연을 지배하는 위대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천둥과 번개, 지진과 홍수 등은 하느님의 분노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체험은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은 축복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체험으로 하느님에게 의지하며 이스라엘을 이끌고 미움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두려움은 율법과 제사에 대한 노예적 자세, 곧 지켜야 한다, 바쳐야 한다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어기거나 제물 봉헌에 불충실하였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믿으셨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그분을 죽여 제거할 때도 예수님은 그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그 계명을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스도인은 성서가 전하는 말씀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 지를 알아듣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신뢰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신뢰로써 인류역사가 유산으로 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축복하시기에 자기도 그 자비와 축복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비로운 마음, 축복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성서 안에도 하느님에 대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표현들이 없지 않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진다.” “지옥에 던져진다.”(마르 10,43.45) 등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들은 불행하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유대교 안에서 통용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초기 교회가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를 갖다 쓴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강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전능하고 강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제압하고 압도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욕구 충족을 찾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은 말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은 마치 계시지 않는 듯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겸손하게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겸손하게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크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비굴이 아닙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처신하는 종은 겸손하지 않고 비굴합니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서 더 큰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애완동물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입니다. 겸손은 낮추어야 할 이유가 없는 곳에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마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랑은 일방적이고 상대를 지배합니다. 그것은 횡포일 수는 있어도 사랑은 아닙니다. 생명에 숨결이 있듯이, 사랑에 겸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면 예수님이 어떤 겸손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세리, 죄인 등과 예수님은 어울리셨습니다. 상대방에 맞추어서 스스로를 낮추신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겸손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라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듯이, 우리 이웃이 우리 앞에 초라하게 보여도 이웃과 함께 있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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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특강

오늘 복음과 독서가 사랑에 집중된 것을 보며 ‘사랑의 특강’을 준비하신 주님의 심정을 엿봅니다. 매일 주님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배우고 다짐하면서도 하나도 사용하지 않는 우리, 전혀 변화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배짱 탓에, 다시 특강을 마련하신 것이라 생각하니, 많이 죄송스럽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 한계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주님의 이르심임을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니,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을 말씀하시고 보여주고 가르치며 사랑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힘들지 않고 어렵지 않은 비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일입니다. 사랑은 소중합니다. 소중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합니다. 때문에 주님의 말씀은 늘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진실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필수요건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천주교회, 500만 명의 교우가 있습니다. 적어도 100만 가정에서 주님을 모신 것이라 짐작됩니다. 100만 가정의 가족들이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모든 교우의 가정은 천국일 것입니다. 그 이웃들은 천국의 삶을 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하느님의 관점에서 사랑하며 살았다면, 세상은 이미 천국이어야 옳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거듭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을 일깨우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도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될 때에 한결 나아질 수 있는 까닭이 아닐까 짚어 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공부한 오늘, 우리는 결코 세상이 허접하고 시시하다는 막된 표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하느님께 너무나 귀한 곳인 까닭이고 세상의 허다한 문제들은 거의 모두가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된 일이니까요. 세상이 훨씬 끔찍해지고 무시무시해지고 교활해졌다고 흉을 보는 일도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아야 할 우리들이 사랑에 옹색하고 사랑에 소홀한 탓일 뿐이니까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사랑함으로 세상을 살려내는 복덩어리라는 걸 아시는지요? 그리스도인은 그분께 받은 사랑을 살아감으로 세상에 생명을 전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 당신의 목숨을 내어 준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야할 분명한 이유임을 새기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 때문에 세상이 변화되고 그리스도인 덕분에 세상이 달라지기 원하시는 그분의 뜻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 안에 가득한 그분의 사랑을 어서 꺼내어 사용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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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으며, 죽음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인생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즉, 어떻게 죽느냐 하는 질문과도 일맥상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으로서 사는 길입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입니다. 하물며 신앙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는 더욱더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가장 쉬우면서도 어렵고,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운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씀은 하느님에 관한 가장 멋진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도 사랑이며, 그 사랑의 극치는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체와 본질을 꿰뚫어 보아서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체험하고서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우리의 죄로 인해 속죄의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마땅히 사랑의 베풂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베풂’과 ‘사랑’과 ‘용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지만 미움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면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움으로 남을 죽이면 자신도 역시 죽이게 됩니다. 이렇듯이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숨 쉬게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도록 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7)

이강우 클레멘스 신부
  |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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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업그레이드’ 시키세요.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도 보고서’인 듯 싶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일이나 상황을 불문하고 기도했다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가리옷 유다의 자리를 메울 동료를 뽑을 때에도 교회 일을 돌볼 일곱 봉사자를 선출할 때에도, 목숨마저 위태로운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도 그들은 기도했다는 글에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힘은 오직 기도에서 비롯되었음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이탈리아 군대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가 어떻게 하느님을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심으로 온 집안이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하여 함께 기도하며 지낸 사실을 전합니다. 아울러 유다 백성에게도 자선을 베풀었던 선한 사람이라고 증언하여 그분의 뜻을 실천했던 인물임을 짐작하도록 합니다. 이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독특하고 어여쁜 이방인의 신심에 감탄하시어 부랴부랴 천사를 보내신 일이 수긍되고 서둘러 이웃 동네에 머물던 베드로 사도를 특파하여 세례를 베푸신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일은 그날 두 사람이 똑같이 기도를 드리는 중에 환시를 보았으며 그 환시를 통해서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받는 은총이 주어졌듯이 베드로 사도에게도 한층 새로운 시각으로 사명에 임하는 은총이 선물되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수장 베드로 사도였지만 새내기 코르넬리우스와 똑같이, 기도를 통해서 그분 계획을 새로이 깨닫는 ‘믿음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오늘,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교황님께로부터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차별 없이 골고루 미치고 있다는 선포라 헤아립니다. 더더욱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방인들도 전혀 예외일 수 없다는 선언이라 믿습니다.

그날 이방인 코르넬리우스를 선교하는 것은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 생각이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한 주님의 아이디어였고 스스로 당신께서 이루어내신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뽑아” 세우신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그날 베드로 사도가 깜짝 놀란 것처럼 우리가 “깜짝 놀라” 탄성을 지를 그 일을 이루기 전에, 먼저 기도 안에서 만나기 원하십니다.

매사에 열심히 기도할 때에도 그저 버릇처럼 익숙히 기도를 바칠 적에도 숨 쉬듯이 편안히 기도하더라도 모두 그분께서 어서 일하시도록 부추기는 비밀병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하고 진솔한 기도야말로 죄악에 갇혀 신음하는 세상 영혼들에게 옥문을 깨부숴 해방시키는 열쇠로 쓰입니다. 기도는 모든 묶인 것을 풀어주고 단단히 닫힌 것을 열 수 있는 자동열쇠라는 뜻입니다. 이때문에 눈을 부라리며 겹겹이 지키고 선 사탄의 눈을 멀게 합니다. 혼돈의 세상을 사랑과 기쁨이 넘실대는 곳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력 있는 기도는 하늘을 움직이도록 그리스도인의 손에 쥐여 주신 사랑의 리모콘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전혀 일면식이 없던 코르넬리우스와 베드로 사도를 맺어주어 ‘일을 내신’ 그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멀리 떨어져 있는,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기도로 도울 수 있음을 일깨우십니다. 이웃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천사를 불러 내릴 수 있다고 귀띔하십니다. 그날 좁은 예루살렘에만 마음이 묶였던 베드로 사도가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선교의 장을 넓혔던 계기가 바로 기도의 열매였다고 밝히십니다. 기도로써 얄팍한 우리의 소견과 편견을 극복하게 될 것임을 깨달아라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들이 생각에 갇히고 관념에 묶여서 웅대한 그분의 꿈을 알아채지 못했던 허물을 고쳐줍니다. 수많은 이기적인 기도를 회개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마침내 하느님을 가슴에 품는 진정한 복음인으로 승격시킵니다. 기도하면서 짜릿한 사랑을 체험하는 기도의 연인으로 살게 합니다. 기도함으로써 그분의 친구가 되어 그분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는 축복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그분 말씀이 무척 따뜻합니다. 꾸중하지 않고 매 들지 않는 그분 사랑에 두들겨 맞는 느낌이 듭니다. 흠 많고 탈 많은 우리를 감싸주시니, 마음이 웁니다.

변변치 못한 나에게 주신 이 큰 사랑을 잘 챙겨서,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갈 작정을 하는 우리의 기도가 업그레이드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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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제대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를 보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게 닥쳐온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 모습이셨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게 하고 하느님을 쳐다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은‘사랑’을 선포합니다.“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 9)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는‘신앙은 윤리적인 결단이나 거대한 사상이 아님’을 밝힙니다.‘우리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게 하는 만남,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만남’임을 선포합니다. 우리는‘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체험하고 알며 또 믿는’(1요한 4, 16 참조) 사람들인 것입니다.‘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이 세상도 사랑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근원이 돈과 명예, 권력 그리고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임을 믿고 선포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비극과 조우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물질문명이 판을 치는 일상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과 사랑이기보다는 사람이 사람에게 늑대라는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 현실입니다.‘사랑은 믿기’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세상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난 전 칠흑 같은 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증언하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 마지막 순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부활 제6주일을 보내면서,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고백합시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사랑임을 고백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듯이 우리 삶도 그리고 이 세상도 부활의 신앙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친구가 됨은 사랑의 정점’이라고도 합니다. 지위와 신분을 떠나 우리가 정말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부산교구 권순도 라이문도 신부>
  |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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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로 사랑하여라

* 사랑 1

10년 전 본당신부로 있을 때 관면혼배를 하기 위해 한 커플이 찾아 왔습니다. 혼인면담이 나와 첫 대면이었던 총각, 딱 보아도 행복에 가득 차 들떠 있던 그 청년이 대뜸‘와이프가 될 이 아가씨 참 예쁘죠?’저는 얼떨결에‘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참 좋을 때다’라는 느낌과 흐뭇한 미소를 갖게 합니다. 그때 사랑은 전염되는구나! 저 역시 보기가 좋았으니 말입니다.

* 사랑 2

한 청년이 저에게 하소연하였습니다. 2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꿈에서라도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돌아가셨을 당시 자신이 너무 어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다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 청년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혹시 나이가 들면서 주위에서‘너 아버지 닮았다’는 이야기 들은 적 없습니까? 비록 20년 전 돌아가셨지만 이미 당신 안에 계세요. 당신의 외모, 말투, 생각, 버릇까지도 당신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잘 살피세요. 당신이 열심히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곧 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 3

6년 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1년 정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그 1년은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같이 어디 좀 가자’하셨습니다. 남천동에 있는 사제 제의를 만드는 수녀원이었습니다. 빛이 바랜 제의를 보시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끔, 저를 찾아와 손을 꼭 붙잡으며 기도하고 있다고 당부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저와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낯섦에‘어떻게 저를 아세요?’하고 물으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부탁하셨다 하십니다.

그렇구나! 어머니는 저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내어놓으셨던 겁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의 제의를 준비해 주셨고, 만나는 사람마다 아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생에서 챙겨줄 수 없어 미리 입혀주셨고 채워주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십시오.

▦ 부산교구 서강진 신부 -- 2018년 5월 6일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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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   [마산] 주님의 사랑 안에서......  [3] 1905
  [부산]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5] 2459
655   [안동] 벗(친구)이라 부르겠다  [3] 2464
654   [대구]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2] 2409
653   [인천] 짝사랑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누가…?  [6] 2280
652   [서울]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5] 2512
651   [의정부] 주님, 당신을 사랑하러 왔습니다.  [1] 82
650   [춘천] 서로 사랑하여라  [3] 2590
649   [군종]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1] 88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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