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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주님을 맞이하는 삶
조회수 | 2,202
작성일 | 05.12.09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주님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고, 세리와 같은 죄인뿐만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도, 또한 군인이나 정치 지도자에게도 즉,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회개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 것을 가르쳤다. 요한의 삶과 가르침이 숭고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도 대단히 많았다.

때문에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던 많은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곧 메시아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도 그에게 사람들을 파견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러한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응해 그리스도인 척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적어도 침묵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사람들로부터 추앙 받고자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할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도록 준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고, 자신의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ꡒ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ꡓ라고 물을 정도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자신은 오시는ꡐ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며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ꡑ고 말할 정도로 겸손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았다.

따라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삶의 자세는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 자신의 신원이 무엇이고, 자신의 임무와 책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가정과 사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잘 알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맡은 바 임무와 책임을 완수하고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나아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겸손해야 한다. 주어진 책임과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결코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제자가 되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에 넘치게 될 것이다.  

경규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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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늘 그 자리에서 제 때에 꽃피우고 열매 맺으며,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도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묵묵히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는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세례자 요한을 닮았습니다. 기쁨의 주일이라 불리는 대림 3주일은 겨울나무와 같은 세례자 요한이 누리고 살았던 기쁨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얼마 전부터 주일 저녁 미사를 ‘묵상미사’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많이 참석하는 주일저녁미사를 그들의 영적감각에 맞추어 봉헌해보려고 몇 명 안 되는 청년들과 함께 준비한 미사였습니다. 젊은이들의 미사에 흔히 등장하는 드럼이나 전자악기 하나 없이 고요함과 촛불만으로 이루어진 어둠 속에서 단순한 성가로 이루어지는 미사입니다.

첫 묵상미사를 봉헌하고 나서 청년들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한 결 같이 새로운 기쁨을 느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소박하고 단순한 미사를 통해서 소란스럽고, 복잡하고, 현란한 세상에서 찾아 헤매던 기쁨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차오르는 새로운 기쁨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화려한 조명에 익숙한 그들에게 어둠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비트박스의 울림과 소음 속에 살아가는 그들에게 고요함은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빠르고 복잡한 세상살이에 적응해야하는 그들에게 단순함은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찾게 하는 힘이 된 것입니다.

두 달 째 계속되는 이 미사에 청년들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차츰 늘어나고 있고, 청년들도 그 전 보다 훨씬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우리 안에 내재하는 기쁨의 샘은 겉으로 보이는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임을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기쁨은 방금 빛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는 혜성과 같은 흥겨움이 아니라 변함없이 반짝이는 별과 같은 것입니다. 그 기쁨은 소란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타들어 가는 가시덤불과 같은 쾌락이 아니라 조용히 오래 지속되는 모닥불과 같은 것입니다. 훨씬 오래 지속되기에 기쁨은 힘든 인생도 기쁘게 만들고 상처로 아픈 영혼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보속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권유하십니다. 언제나 기뻐하라는 말씀은 충만한 삶에서 오는 내적 기쁨을 잃지 말아야한다는 신앙적 요청입니다. 기쁨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동물은 외부조건이 충족되면 만족감을 느끼며 그 것을 밖으로 표현합니다. 동물은 오직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반응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자기 안의 에너지만으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철학자들은 기쁨이란 좋은 정신적 상태이며, 노고를 동반하는 좋은 열정이라고 말합니다. 기쁨은 파괴적인 열정이 아니라, 건설하고 치유하는 열정이고, 생명으로 가득 찬 열정이며, 그 안에서 삶에 대한 의미와 희열, 그리고 에너지가 솟아나는 열정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고 대답합니다. 그의 대답은 ‘깨어 있는’ 사람의 대답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으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기쁨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지음 받았으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다는 영적 진실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요한은 겸손한 사람이었기에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요”라는 고백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우리들 가운데 서계신’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으며 그 분이 베풀어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않은 사람만이 참된 기쁨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영혼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기쁨은 ‘억눌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리고, 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게 하는 힘입니다.

김영수 신부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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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겸손

오늘 복음에서,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 빛이신 주님을 맞이하라고 하는 요한 세례자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그리고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그 예언자도 아니며,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임을 증언한다.
 
대림 제3주 복음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요한 세례자의 겸손에 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너 자신을 알라' 등 속담들과 격언들에서 우리는 이미 겸손에 관해 너무 많이 듣고 배워왔다. 좁게는 가족과, 더 나아가 타인과의 공동체 생활에서 남을 존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미덕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겸손은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에 한하지 않는다. 겸손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 말은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어떤 학문을 연구하든, 또는 신앙을 탐구할 때에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자신을 올바로 아는 것에서 온유함과 관대함과 이타심이 겸손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곧 사랑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결핍은 무지나 아집, 더 심할 경우 겸손을 가장한 교만으로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 2, 6-7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라고 하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다.' 이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출이며 사랑 즉 하느님 정체성을 정확하게 밝힌 것이다. 사랑이 개념적으로는 영구불변하며 절대적 보편 가치일지 모르나 사랑의 현실적 구현은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즉 하느님의 더 크신 사랑이 미소한 인간에게로 내려오신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겸손이다.
 
요한 세례자는 그리스도, 엘리야 그리고 그 예언자도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자신의 정체임을 밝힌다. 유다인들이 '소리'를 '빛이신 주님'으로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한다. 이러한 요한의 정직함은 겸손과 연결되며 또한 진실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어떠한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란, 우리는 자신이 피조물이며 불완전한 존재임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신앙인이다.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이 타인을 잘 아는 것이 된다. 어느 이유에서든 나의 이성, 신앙의 잣대로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즉 인간은 어떠한 벼랑 끝에 서 있어도 결코 양보할 수없는 가치를 가지며, 그것이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 즉 인격이다. 인간 행위의 성스러움과 위선은 정비례할 수 있고, 교만과 열등의식은 동전의 양면일 뿐 결국은 같은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어지고, 골짜기가 깊어지면 산이 높아진다. 우리는 교만이 숨겨져 있는 겸손에 반감을 갖는다. 반감은 단순히 지각없는 성냄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가 어떤 것을 취할 때 갖는 부당함에 대한 도덕적 표현의 주장이며, 이 부당함은 한 개인의 악덕에 끝나지 않고 미덕과 충돌할 위험이 있다.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적 언어다. 그리고 이 신앙적 언어는 하느님 사랑에 근원을 둔다. '인생은 겸손을 수련하는 수련장'이라하듯 누구나 살면서 세월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겸손해지면서 하느님 사랑을 그리워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성급하지 않는 기다림이다. 사람이 되시어 인간에게 오시는 하느님께서도 구약의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셨다.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그 분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워 할 때까지….
 
우리는 이웃을 우리 마음에 맞게 변화 시킬 수 없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느님 몫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은 또 다른 나의 모습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그 타인과의 사랑의 열매를 기다리는 것뿐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겸손은 사랑이요, 사랑은 기다림이다. 또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광석 신부
  |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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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처럼 구세주를 증언하자

어느새 세 번째 초의 불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금방이라도 구세주께서 오실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의 짧음에 기뻐하면서,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더욱더 기다림의 자세를 잘 추스러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그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자, 요한은 뜸들일 틈도 없이, 서슴치 않고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저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외치면 외치는 대로 발설되어야 하는 소리라고 말입니다. 또한 자기는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도 없다고, 그렇게 주님 앞에서 낮고 낮은 존재라고 말입니다.

이로써 아직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이시라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엘리야나 예언자, 또는 그리스도로 비견되면서까지 여러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당사자인 요한의 증언은 구세주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을 온전히 예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아직도 답답할지 모릅니다. 고개만 두리번거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구세주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면 그 증언으로 이제 대림의 기다림은 불확실에서 확고한 희망으로 건너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세주가 누군지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사는 신앙인의 말과 행동을 통해, 구세주는 더 가깝고도 확실하게 체험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증언과 증거로 그분을 향한 기다림은 허망한 쇼가 아니라 사실이 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구세주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 마음 부서진 이들, 잡힌 이들, 갇힌 이들, 모두가 기다립니다. 우리들이 그들의 기다림을 기쁨으로 채워주는 세례자 요한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한처럼 구세주를 증언하고 증거합시다. 자선주일, 우리의 사랑 나눔이 그리해 줄 것입니다.

정유진 마태오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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