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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사랑의 실체
조회수 | 2,317
작성일 | 06.05.19
'초보신부' 시절, 소규모 아동복지시설 책임자로 있을 때 일입니다. 당시 제가 주로 담당했던 일은 아이들의 학부형 역할이었습니다. 새로 온 두 아이의 전학수속을 밟으려 가까운 초등학교를 찾았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반 배정 담당 선생님 지시에 따라 서류를 작성하고, 배정된 반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는데, 난감해하는 선생님들 표정에 저 역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저는 당시 선생님들 머릿속에 '특별한 보호자', '기피인물'로 각인돼 있었는데, 몇몇 선생님들은 제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그러시더군요.

"요즘 우리 반에 문제가 많아서요. 죄송하지만 다른 반으로 데리고 가시면 어떨까요? 왜 하필 또 우리 반입니까?"

선생님들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그래도 전학 왔으니 최소한 반 배정은 받아야겠는데, 다들 저희 아이들을 안 받겠다고 하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 난처한 순간 인자하게 생긴 어머니 선생님 한분이 제게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걱정 마세요. 저희 반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한번 노력해보지요."

두 아이에게 다가가신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을 당신 품에 안으시고 등을 토닥거려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왔다! 애들아. 그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앞으로 나랑 같이 한번 잘 지내보자. 파이팅!"

물론 그 뒤로 그 선생님은 저희 아이들 때문에 죽을 고생을 다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어김없이 가출을 시작했고, 반평균 출석률과 반평균 점수를 대폭 깎아내렸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께서는 싫은 기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장기 가출 끝에 집에 돌아온 아이들을 타일러서 학교로 데려갈 때 마다 선생님께서는 따뜻한 얼굴로 아이들을 맞아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잘 해보자고 격려하셨습니다. 그 오랜 진통 끝에 마침내 두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기에 졸업식이 끝난 뒤 아이들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교실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적막하던 다른 반 교실과는 달리 그 교실은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선생님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웠던 아이들은 선생님 주변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학부모들은 몇번이고 감사 인사를 거듭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다시 아이들과 교실을 찾았는데, 이번에는 교실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텅빈 교실에 홀로 남아계셨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교탁 위에 엎드려 울고 계셨습니다. 흐느끼는 선생님 뒷모습을 보면서 저희 아이들도 따라 울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위해 한없이 인내하고 헌신하셨던 선생님, 아이들과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텅 빈 교실에서 홀로 남아 울고 계신 선생님 뒷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랑이군요. 요즘 사랑의 실체, 사랑의 본모습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봅니다.

사랑이란 뭔가 대단한 것, 특별한 그 무엇, 눈길을 확 끄는 그런 것이 아니리라 저는 믿습니다. 한 순간 확 불타올랐다가 유성처럼 즉시 사라지고 마는 그런 것이기 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것, 생활 한가운데서 매일 이뤄지는 그 무엇임을 저는 믿습니다. 1년에 몇번 있는 이벤트성 행사보다는 삶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실천되는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마음 깊숙이 머물러있는 그 무엇, 머릿속에만 박혀있는 그 무엇, 말로써 이뤄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구체적 생활에서 가시화되는 그 무엇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가만히 앉아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움직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구체적 배려를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기쁘게 만들어주기 위해 부지런히 아이디어를 짜냅니다. 상대방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위해 매일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매일 자신을 온전히 바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매일 자신을 소멸시켜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조금 더' '한발자국 더' 나아가기를 요구합니다. 남들이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조금 더 진한 사랑, 조금 더 폭넓은 사랑, 조금 더 깊은 사랑, 조금 더 사심 없는 사랑, 조금 더 큰 사랑을 요구합니다.

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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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편안한 사람

연초에 제 개인적으로 세웠던 일 년 계획의 세부 사항 가운데 하나가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자’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되짚어보니 여전히 형제들에게는 ‘부담스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책상 그러려니 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숙제 중에 하나입니다.

동료 수도자들 가운데 정말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성품, 밝은 분위기, 적정선의 예의, 적당한 유머감각을 겸비한 편안한 그 형제와 함께 있으면 같이 있는 그 시간이 꿀맛 같은 휴식이요, 천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으뜸 계명인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한 사람의 내면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통 충만하다면, 그 결실이 외적으로 드러나야겠지요. 그 결실은 다름 아닌 편안함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상냥함입니다. 기쁨입니다. 다정함입니다. 겸손함입니다.

언젠가 심신이 무척이나 고달팠던 날 밤늦은 시간,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완전히 삭고 쩔었습니다. 제가 봐도 너무나 부담스런 얼굴이 거기 들어있었습니다. 가끔씩 거울 안에 들어있는 나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얼굴이 편안한 얼굴입니까? 아니면 불편한 얼굴입니까? 부드럽고 자상한 얼굴입니까? 아니면 짜증이 왕창 묻어나는 부담 제대로 주는 얼굴입니까? 사랑과 감사로 충만한 천사의 얼굴입니까? 아니면 고집과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얼굴입니까?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다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기뻐 내 주위를 떠날 줄 모릅니까? 아니면 다들 뒤로 슬슬 물러나는 것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세상, 너나할 것 없이 다들 부족한 인간, 너무 아웅다웅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지나치게 작은 것들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이웃의 허물은 물론 나 자신의 부족함 앞에서도 너무 크게 호들갑떨지 않고 편안한 미소를 보내며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천국은 내안에서부터 시작 된다’는 말에 절대 공감합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하루 온종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콧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기쁨 넘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은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봄일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인생은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청춘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그가 맞이하는 매일이 천국입니다. 그가 서있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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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맛

하느님 사랑, 하느님 찬미, 하느님 자랑 저에겐 다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아름다움, 행복과 자유, 기쁨과 평화의 원천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은 영원한 물음만 있을뿐, 결국 방황과 혼란이요 허무의 심연에 함몰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자비롭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기쁘고 평화로운 삶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이렇게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살 권리와 의무가,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이런 삶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이 모두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5월 성모성월, 산하(山河)의 아름다움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온누리에 가득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닮아 갈수록 비로소 자비롭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기쁘고 평화로운 삶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하느님 사랑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일'보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일에 충실할 때 그 어렵다는 '함께 사는 일'도 수월해지고, '소임상 맡은 일'도 잘 하게 됩니다. 세가지 예화를 나눕니다.

-어제 예전 34년전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제자들 셋이 선물을 무겁게 가득 들고 저를 찾았습니다. 13세 때 아이들이 이미 47세의 중년이 되어 어버이날 다음날 사랑하고 존경했던 옛 스승을 찾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시공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영원을 체험했습니다. 34년전 동심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을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다음은 주간경향에서 읽은 '김성근 리더십의 비밀'과 '정신분석학자 정도언 교수와의 대담' 기사입니다.

-"김 감독(73세)의 리더십의 비밀은 첫째, 매경기를 한국시리즈 7차전처럼 올인하는 것입니다. 오직 오늘 이 순간, 볼 하나에 승리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붓습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김 감독의 좌우명 '일구이무(一球二無)'(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그대로입니다. 공 하나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거는 장인의 혼이 느껴집니다.

두 번째는 선수를 쓸 줄 안다는 것입니다. 10을 가진 선수는 많지 않습니다. 5밖에 안되는 선수도 많습니다. 김 감독은 5밖에 안된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김 감독은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능력이 5밖에 안되지만 그 5만이라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김성근의 용병술입니다.

셋째, 동기부여입니다. 김 감독은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게 하는 데 남다른 노하우가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 감독이 한계를 너무도 쉽게 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리더십을 닮은 김 감독입니다. 매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할 때, 모두를 사랑하여 아무도 버리지 않을 때, 늘 하느님의 사랑이 동기가 될 때 저절로 형성되는 참 리더십입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정작 인생에는 단맛이 별로 없습니다. 그게 삶의 실체예요. 맛은 철학의 대상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음식이나 맛에 대한 표현이 많습니다. 단맛은 화려하지만 오래가기 어렵고 금방 질립니다. 쓴맛이 나는 관계는 세월이 흘러야 가치를 알 수 있지만, 쓴맛 나는 음식을 뱉어내면 관계마저 해소됩니다.

짠맛나는 관계는 오래가지만 장아찌처럼 많이 접할 수 없죠. 신맛나는 관계는 잠시 상큼할 수 있지만 시어버린 음식처럼 정리해야 할 관계일 수 있습니다. 매운 맛은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모든 사람마다 각자의 맛이 있고, 모든 관계마다 교훈이 있습니다. 진리는 이처럼 단순하고 평범합니다.“

다 공감이 가는데 결정적인 한 맛이 빠졌습니다. 바로 '하느님 맛'입니다. 진정 수도승처럼 하느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살아갈 때 분별과 이해도 깊어질 것이며 참으로 맛있는 삶도 가능합니다. 하느님 맛들이는 비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세상 최고의 맛이 예수님 맛입니다. 말씀 맛, 성체 맛, 기도 맛입니다. 늘 먹어도 질리지 않는 늘 새로운 맛이 하느님 맛, 예수님 맛입니다. 하느님 맛은 사랑 맛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그 외아드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참으로 맛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둘째,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늘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관상의 행복, 관상의 기쁨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인 부단한 계명 준수와 수행이 있을 때 비로소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이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롤모델은 하느님이요 예수님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것이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준수에 항구함으로 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충만한 기쁨입니다. 주님 맛은 바로 기쁨의 맛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친구가 되십시오.

구약의 하느님의 친구인 모세와 아브라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친구' 최상의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마찬가지 우리 믿는 이들 역시 예수님의 친구요 이보다 자랑스러운 칭호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준수에 충실할 때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됩니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갈 때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삶의 맛과 향기도 날로 깊어져 갑니다.

넷째, 예수님을 가리지 마십시오.

늘 예수님 뒤에서 배경으로 사십시오. 오직 예수님 사랑만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비우고 버리는 사랑 있을 때 주님 배경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배경이 되어 살 때 주님 또한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십니다. 하늘과 산을 가린 괴물 같은 무수한 고층 건물들은 바로 하느님을 가린 에고의 상징입니다.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성 요셉상 배경의 꽃과 나무, 산과 하늘을 보며 써놓은 글입니다.

-꽃들처럼
나무들처럼
산처럼
하늘처럼
늘 당신의 배경이 되고 싶다-

다섯째,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구별, 분별은 좋고 필요합니다만 차별은 하지 마십시오. 차별과 편애보다 고약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감동입니다.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차별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닮아 차별도 편애도 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사랑은 편애라기보다는 분별의 사랑에 속합니다. 어제 방문했던 초등학교 한 제자로부터 들은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학창시절, 늘 위축되어 지냈는데 선생님 밑에 있을 때만 가슴 활짝 펴고 마음 편히 지낼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도 차별하지도, 편애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 모두에게 생일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섯째, 예수님께 뽑힌 자임을 명심하십시오.
좋은 의미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은 건강한 자부심의 원천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바로 이 말씀이 성소의 신비를 말해 줍니다. 주님은 세상 기준이 아닌 당신 고유의 기준에 따라 우리를 뽑으셨습니다. 목적은 둘입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뽑아 주셨기에 비로소 사랑의 열매 풍성한 삶이요,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원할 수 있습니다. 정말 주님께 뽑힌 우리 수도형제들은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때 마다 하느님 백성을 위해 얼마나 많이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치는지 모릅니다.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위의 예수님 대신 하느님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세상 맛이 아닌 하느님 맛, 예수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하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프란치스코 신부>
  |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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