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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조회수 | 2,571
작성일 | 06.05.21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기를 원하고, 또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는 거의 드물지요.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문화의 대부분이 사랑을 주제로 하여 여러 가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가요는 그 주제가 ꡐ사랑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사랑과 이별의 세세한 감정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ꡐ누가 사랑을 아름답다했던가ꡑ를 노래한 가수가 있는가 하면 ꡐ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ꡑ를 외치고, ꡐ밤비 내리는 영동교ꡑ에서도, ꡐ제3한강교ꡑ에서도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랑을 하고 또 받기를 원하며,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사랑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름답고 멋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사랑을 원해도 사랑만큼 아름답고 슬프고 보람되고 허탈하고 복잡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종류도 남녀간의 사랑, 부모 자식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등등 다양하지만 사색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리스 사람들은 사랑을 세 부류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Eros)요, 둘째는 필리아(Philia)요, 셋째는 아가페(agape)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로스는 남녀간의 이성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두 번째 필리아는 우정을 바탕으로 한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가페는 헌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에로스와 필리아는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고 나보다 좋아 보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라는 말씀에서 '아가페'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말씀하시는 사랑은 에로스나 필리아기 보다는 아가페적인 사랑에 가까운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최후만찬 석상에서 당신의 몸과 피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전적인 헌신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아프고 병들고 소외되고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대상들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는 구체적인 사랑,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에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실천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내키지 않으니 사랑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늘 잊고 지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내주신 숙제입니다.

한 사람이 시한부 인생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폐혈전증, 신부전증, 간경병증 등 무려 십여 가지도 넘는 병을 앓는 그 사람에게 의사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먼저 거리에 버려져 있는 환자들을 자기 집에 불러모았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그 사람들을 목욕시키고 옷을 빨아 주며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잠도 함께 잤습니다. 그러자 환자들이 자꾸 불어났으며 식량도 부족했고 잠 잘 방도 모자랐습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과로로 인해서 여러 번 쓰러졌으나 그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병 때문에 일을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빚도 많이 졌고 설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생명이 다하는 시간까지 자기보다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는 나이 서른에 죽었습니다.

그가 쓰러졌을 때 한국 가톨릭 평신도 협의회에서는 '가톨릭 대상'이라는 큰상을 그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추기경님이 직접 주례한 장례미사에 신자들은 물론 많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참석해서 고인의 뜻에 추모의 정과 사랑을 드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근영이었고 본명은 안토니오였습니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놀랄만한 사랑을 우리는 봅니다. 이러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 안에 머물 때 가능합니다. 인간의 감정 안에서는 결코 쉽지 않지요. 그래서 밤낮으로 기도하며 말씀 안에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은 자신의 본능을 뛰어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랑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기술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찾았습니다. 한 화가가 왕 앞에 나타나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얼굴 전체가 나오도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화가는 매우 난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오른쪽 뺨에는 칼로 인해 생긴 끔찍한 흉터가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심한 끝에 화가는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왕을 테이블 앞에 앉게 하고 손으로 턱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손가락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 흉터를 감쪽같이 감추고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감싸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감정을 뛰어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역시 기도와 말씀 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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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

제가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돌아가신 다음날 염습을 할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반듯하게 누워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입고 계신 알록달록한 몸빼바지(일본말의 ‘몬베’로, 일할 때 입는 바지)를 보자 목이 멨습니다. 평생 쉼 없이 일을 하시고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는 외출할 때를 제외하곤 늘 몸빼바지를 입으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그런 어머니의 옷차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어머니는 멋지게 차려입는데 저희 어머니는 늘 같은 옷에 같은 머리 스타일로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엄마, 좀 다른 옷 입으면 안 돼?” 하면 어머니는 늘 “ 난 이게 편하다”며 말머리를 자르곤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도 여자인데 왜 멋지고 좋은 옷을 입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 입고 싶은 것, 드시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사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똑같을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으실 분, 그분의 이름은 ‘어머니’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15,9-17)에서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장황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할 때 어머니의 사랑만큼 분명한 비유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했지만(1요한 4,8) 우리는 “어머니는 사랑”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우리의 어머니를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화신은 우리들의 어머니가 아닐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적당히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처럼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정도로 치열하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우리 마음에는 늘 거센 미움과 증오의 바람이 마구 이는데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늘 억울하고 손해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가치를 의심하는 우리에게 사랑만이 승리하고 죽음까지도 이긴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시간은 사랑하는 데도 부족합니다. 우리 곁에는 사랑할 사람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야 말로 은총 속에 사는 셈입니다.

허영업 신부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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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여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기를 원하고, 또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대부분은 사랑을 주제로 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가요는 그 주제가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사랑과 이별의 세세한 감정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노래한 가수가 있는가 하면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외치고, '밤비 내리는 영동교'에서도, '제3한강교'에서도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랑을 하고 또 받기를 원하며,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설렘과 수줍음으로 반응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름답고 멋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대상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일생은 아프고 병들고 소외되고 도저히 사랑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들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봐 주는 구체적인 사랑, 형제 중에 가장 작은이에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실천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나 친척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내키지 않으니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외면하고 지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적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내주신 숙제이며 최후 심판의 기준인 것입니다. 안 되면 의도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찾았습니다. 한 화가가 왕 앞에 나타나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얼굴 전체가 나오도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화가는 매우 난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오른쪽 뺨에는 칼로 인해 생긴 끔찍한 흉터가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심한 끝에 화가는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왕을 테이블 앞에 앉게 하고 손으로 턱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손가락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 흉터를 감쪽같이 감추고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약점을 감싸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감정을 뛰어넘는 헌신적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받은 큰사랑을 생각하며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담고 살 때 우리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뛰어넘는 참사랑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를 칭찬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와는 차원이 다르게 나를 외면하고 반대하며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선택이 아닌 의무이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모든 이웃을 배려하는 이러한 우리 노력이 하늘에서는 열매가 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실천하시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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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은 사랑을 느끼셨고 사랑하셨으며, 우리도 당신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경험하시고 표현하신 사랑은 어떤 차원입니까? 우리는 너무 자주 뜬구름 잡는 옅은 사랑, 관념적인 사랑, 현실에서 유리된 사랑 그리고 모호한 사랑을 떠올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예수님께서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세 가지 방향을 지적하시며 사랑을 설명하십니다. 그 방향은 위로, 밖으로 그리고 내면으로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그리고 온 정신으로 곧,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지성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으로, 조건 없이, 전체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단지 사랑의 느낌에 관해서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며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충만하시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사랑을 받으실 수 있으신 분이시고 둘째는 예수님은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두 측면을 몇 가지 다른 방법으로 행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막연하지도 애매모호하지도 않았습니다. 완벽한 사랑이 내재된 사랑이었습니다. 감동적이고, 육체적으로 행하고, 온 마음으로 표현하는 사랑입니다. 외치고, 영적으로 행하고, 그의 온 혼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이야기하고, 지성적으로 작용하고, 온 정신을 다 쏟는 사랑입니다. 이것들을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상처받기 쉬운 상태라는 뜻은 선택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이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관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배신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상처 주는 행동을 하거나, 떠나가 버리거나, 지나치게 요구하거나, 인색하게 구는 것 등으로 인해 받은 고통입니다.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될 때 우리는 진정 강한 존재가 됩니다.

온 정신, 영혼 그리고 마음을 다해 서로 사랑해야 합시다. 착취하거나, 이용하거나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심을 갖고, 관계를 맺으며 베풀면서 서로 사랑합시다. 경멸하거나, 비웃거나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고, 공감하고 희생하면서 서로 사랑합시다. 무시하거나 냉대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편지를 쓰고, 노래하고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며 서로 사랑합시다. 단죄하거나, 무시하거나 이기적인 마음으로가 아니라 서로 나눔으로써 사랑합시다.

문종원 베드로 신부
  |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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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모의 심정으로

올망졸망한 자식 여럿을 남겨둔 채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모쪼록 어린 자식들이 건강하게 자라나 사람 노릇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제자들과 이별을 앞둔 예수님의 심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부모는 자식을 애지중지하면서 자식이 그런 부모의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보살핌은 인생 여정에서 만나게 될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부모의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장차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난관을 만나게 될 터인데,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승이 베풀어주신 큰 사랑을 자주 되새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누리는 기쁨은 부모의 기쁨이고, 그들이 겪는 고통은 부모의 고통입니다. 부모는 어떻게든 자녀들이 서로화목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기쁘게 살기를 원하셨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고 당부하십니다. 그분은 약하고 허물 많은 제자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친구라고 부르면서 극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이 제자들 마음에 씨로 뿌려져 그들의 삶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들이 스승의 마음을 알고 서로의 부족함을 견뎌주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곁으로 가신 다음에도 그분의 제자 사랑은 계속됩니다. 성령을 보내시어 제자들을 보호해주고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합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유다인들 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견고한 관습의 장벽을 넘어서게 도와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해서 그들 집에 들어가거나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는 관습을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환시를 통해 베드로에게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자녀들임을 가르치셨습니다.(사도 10,9-16 참조) 그 직후에 베드로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의 초청을 받아 그 가족에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에게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 세례를 줍니다. 이렇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충실한 제자로 성장해 나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극진히 사랑하시면서 당신의 제자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외아들마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닮고자 노력할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고 서로 간에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서울대교구 손희송 신부>
  |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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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시기의 정점에 와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6주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할 제1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돌아가신 그분의 몸이라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자매님이 서울에서 적성성당으로 미사참례를 하러 오셨습니다. 새벽에 집을 나와서 버스를 3번 갈아타고 오셨습니다. 저의 강론을 듣고 싶어 하셨지만, 자매님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갈망은 의무감보다 강합니다. 갈망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들을 구원하고자하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2주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습니다. 곧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만남의 중심에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치유의 기적을 보여 주실 때 ‘믿음’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제3주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저는 서품성구로 시편 126장 5절의 말씀을 정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 사제생활 27년을 하면서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려고 합니다. 중용 23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일이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성직자, 수도자들은 착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합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착한목자는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가 활력을 잃어간다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착한목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착한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착한목자인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도의 모범, 신앙의 모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포도나무와 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야만 성장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삶의 장소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없으면 잘려나간 가지처럼 말라버리고,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살기 편한 집은 있지만 따뜻한 정이 흐르는 가정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편리한 시설과 아름다운 성당 건물은 있지만 기도와 사랑이 넘치는 성당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 하느님과의 친교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과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질서와 자유의 조화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부활 제6주일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열정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어쩌면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잠시 인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8년 5월 6일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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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공수래 공수거  [5]
707   [수도회] 자기 해방의 여정  [5] 1969
706   [수원]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  [5] 2212
705   [대구] 내 깡통  [3] 2113
704   [군종] 부자와 하느님 나라  37
703   [서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6] 2137
702   [의정부] 소유와 나눔  [4] 2245
701   [안동] 부족한 것 하나  [2] 1076
700   [마산] 나눔의 훈련을 하자  [4] 1933
699   [인천] 거지는 ‘하느님의 배려’  [5] 2198
698   [전주] 영원한 생명  [2] 2136
697   [광주] 우리의 봉헌은 떳떳한가. 그러면 무엇이 내 것입니까.  [1] 58
696   [춘천] 나눔 + 버림 = 영원한 생명  [4] 2345
695   [원주] 영적법칙  [1] 65
694   [대전] 그 놈의 돈이 뭐길래  [3] 2439
693   [청주] 부족한 한 가지  81
692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4] 1569
691   [수도회] 이혼, 그 뜨거운 감자  [1] 660
690   [원주] 휴가증  69
689   [부산] 창조 사업을 함께 하는 남녀  [5] 2193
688   [인천]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6] 2372
687   [서울] 남자의 감격  [6] 4362
686   [대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1] 2218
685   [마산] 기도의 보루(堡壘)로 진을 치자  [4] 2270
684   [안동] 사랑의 공동체 가정  [2] 2067
683   [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4] 2464
682   [광주] 혼인은 새로운 탄생  [1] 2173
681   [전주]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맺어준 사건, 혼인  [2] 86
680   [대전]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2] 2234
679   [군종] 4주간의 탐색기간을 드리겠습니다  1934
678   [춘천] 최고의 기적  [2] 2369
677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3] 105
676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3] 1656
675   [부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단  [2] 1821
674   [인천] 함께 나누는 하느님 나라  [3] 1672
673   [수원] “언제까지 속 좁은 신앙생활을 하려합니까?”  [4] 1937
672   [원주] 대범함과 포용력  [3] 1880
671   [서울] 사랑의 의무를 지닌 신앙인  [3] 1944
670   [군종] “내 손과 내 발이 되어버린 죄”  77
669   [광주] 법보다 크신 하느님의 사랑  [1] 1699
1 [2][3][4][5][6][7][8][9][10]..[18]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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