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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세례자 요한에 대해
조회수 | 2,130
작성일 | 05.12.10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인물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닙니다. 요한은 다만 이사야 예언서가 말한 대로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라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에 비하면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인물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복음이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활동을 소개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 대해 언급합니다. 마르코복음서와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루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그 사실 조차 적당히 얼버무립니다. 네 복음서가 하나같이 긍정하는 점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이런 실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초기교회 신앙인들에게 부담스러웠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 요한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기 위해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비록 세례는 베풀었지만,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복음서의 이런 말들은 모두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가게 하는 장치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은 그 시대 다른 세례 운동가들과는 달리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으니 회개하라고 말하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례 운동에 공감하고 가담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예수님은 독자적 길을 가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요한을 극찬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11,11)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을 믿는 것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 운동가들이 물에 몸을 씻으면서 세례를 받으면 죄에서 인간이 정화된다고 생각하였지만, 요한은 세례로써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고 그 세례를 받으신 것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세례라는 사실에 공감하셨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은 사람을 엄하게 심판하실 분이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10; 루가 3,9). 요한은 이렇게 위협적으로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엄하게 심판하실 분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실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 ‘함께 계심’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간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청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열어 주실 것입니다...그대들이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알진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루가 11,9. 13).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5-36).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그 생명의 아버지로 살아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서 벌주시는 하느님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요한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느님을 상상하며 삽니다. 무섭게 심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요한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자비하신 하느님, ‘청하시오, 찾으시오, 두드리시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 곧 성령을 베푸셔서 우리도 자비로운 당신의 질서 안에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살게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청해도, 찾아도, 두드려도 하느님은 반응하시지 않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자녀 되어 그분의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녀가 어리고 미숙할 때,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줍니다. 그러나 성장한 자녀는 자기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합니다. 부모는 성장한 자녀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말합니다. 사람은 “부모를 떠나 자기 배우자와 하나가 된다”(2,24). 인간은 부모를 떠나서 비로소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떠나지만,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삽니다. 자녀는 부모와 마음으로 함께 있지만, 자기 일은 자기가 합니다. 성장한 자녀는 모든 일을 부모가 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보채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영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청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그리고 그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회개는 그런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 주라, 원수까지 사랑하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두 사람을 살리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성숙한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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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단호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또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님과 대비하여 세례자 요한을 정의한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이렇게 예수님과 요한을 대비시키는 이유는 그 당시 예수님이 아닌 세례자 요한을 참 빛으로 받아들인 그의 제자들을 염두해 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 1∼7절을 보면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몇몇을 만나는데 그들은 세례자의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다. 요한 복음의 서언에서 예수님(말씀)과 세례자 요한(소리)을 대비시킨 이유는, 스스로가 ‘복음’이시며 아버지를 증거하는 최고의 증인이신 육화된 ‘말씀’을 증언하는 데 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순수한 빛이시며 거룩하신 ‘말씀’이 되시는 분을 증거하고, 그 증거를 통해 모든 이들이 믿도록 하는 성스러운 사명을 위임받은 것이다.

‘말씀’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우리(교회, 나) 또한 ‘소리’로서의 소명을 받았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들이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처럼, 우리는 ‘말씀’(하느님)과 ‘소리’(피조물)를 혼동해선 안 된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이를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분(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 원죄의 출발(창세 3장)은 하느님의 말씀과 피조물의 소리(사탄)를 혼동해서 온 결과이다. 지금도 그 악의 영향(거짓)은 계속되고 있다.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파고드는 원초적인 두려움과 유혹은 무엇인가? 죽으면 끝이라는 절망(두려움)때문에 현세에 매여 계속 살고자 하는 갈망(유혹)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요한 1, 12)을 주셨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요한 1, 11) 우리는 ‘말씀’이 아닌 거짓 ‘소리’에 현혹될 수밖에 없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 1∼3) 우리는 구원(영원한 생명)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부모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를 어찌 자녀라 할 수 있겠는가? 신자들이여! 거짓 소리에 현혹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이세형 유스티노 신부
  |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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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주님을 증거하는 이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대로, 주님이신 예수님보다 앞서서, 주님의 길을 닦아놓았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나타나 죄의 용서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으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 말씀인 마르코 복음은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세례를 우리에게 이미 들려주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은 요한 복음사가를 통해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데, 곧 세례자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입니다.

많은 이들, 특히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의 정체에 대해 알고 싶어 했습니다.‘도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메시아였는가?’그들의 이러한 관심사에 요한은 이렇게 답합니다.“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 23)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늘 복음 말씀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세례자 요한은 소리였지만 주님은 태초부터 말씀이셨습니다. 요한은 지나가는 소리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시는 영원한 말씀이셨습니다.”(대림 제3주일 독서기도) 오늘 복음인 요한 복음의 시작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빛을 증언하러 온 이였으며, 이는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며 단지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빛이시며,‘세상에 오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 9)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러 온 것처럼, 우리 또한 그분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생활은“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 16∼18)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라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자선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림에 있어서 자선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준비하며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삶 속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조성문 마르티노 신부>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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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면서 동시에 자선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기다리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는데, 회개의 표시로“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나누어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루카 3,11∼12 참조) 회개의 진정성은‘자선’으로 나타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선’이란 무엇입니까? 남을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고 도와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사랑스럽고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선은 한자로‘사랑할 慈, 착할 善’이라고 쓰는데 이 글자에는 어머니의 사랑, 도덕적 최고 단위의 가치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선을 베풀되 아까워하지 말며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자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그러한 자선은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주며,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고 말씀하십니다.(토빗 4,7∼16; 12,9 참조)

그런데 자선은 꼭 물질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신앙을 불어넣는 것도 아주 훌륭한 자선입니다.

언젠가 SBS에서 노숙자들에 대해 방영하는 걸 봤습니다. 영등포역과 서울역 주변엔 저녁때가 되자 여기저기서 남녀 노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30대 초반도 있었고, 4∼50대도 수두룩했습니다. 뭘 하든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질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육체가 병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아 일을 할 의지와 살아갈 낙을 스스로 놓아버린 것입니다. 마음의 병이란게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최소한의 신앙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고 주님을 기다리며 힘을 내고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자선 주일이라 해서 돈 몇 푼 보태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희망, 이런 신앙을 전해 주는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 부산교구 김홍태 신부 : 2017년 12월 17일
  |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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