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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차원 : 기쁨
조회수 | 2,433
작성일 | 05.12.10
오늘 전례의 핵심은 ‘기쁨’이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비록 자기는 무대 뒤로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쏠리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기쁨이 충만해진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요한 1,8)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의 입당송과 독서와 화답송을 보면 모두가 주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본기도에서는 이 기쁨을 성탄축제에 연결하고 있다: “주 하느님, 주님의 백성이 지금 성자의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니, 구원의 큰 기쁨을 맞이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이 대축제를 지내게 하소서”. 즉 이 기쁨의 동기는 ‘구원’에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인 차원은 어둠의 세력에 질식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보다 더 확신에 찬 모습으로 ‘기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구원받은 기쁨에 찬 삶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복음: 요한 1,6-8.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기쁨

오늘 복음의 내용은 요한의 신원과 역할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를 증언해 주었듯이 성탄을 앞둔 우리에게도 그분을 증언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만일 깨어있지 못하고 그분의 신비를 직관할 수 없다면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26절)라는 꾸짖음을 우리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성탄성가를 부르고 끊임없이 말구유를 조배한다고 하더라도 깨어있지 못하여 신선하고도 밝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도 ‘다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서 계신’ 주님을 뵙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신앙과 전례적 선포 안에서 계속된다. 그의 증언은 우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6절)으로서 예언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이며, 또한 그는 ‘빛’ 혹은 ‘메시아’가 아니라, 그 ‘빛’을 증언하는 것이다. ‘증언’이라는 의미는 직접적인 인식과 체험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짐(1요한 1,1 참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역사적 성격을 띤다. 그분은 내면으로부터 파악되지 않으면 결코 인식되지 않는 분이다. 그러기에 ‘증언’이라는 것은 항상 상충과 대립과 판단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즉 진실과 거짓,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옳음을 가리는 심판의 과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요한에게 그의 신원을 묻는 그 자체가 진리를 알고자 하는 탐구의 자세가 아니라, 심문적이다. “당신은 누구란 말이요? 엘리아요?...그 예언자요?...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21-22절). 그러한 자세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진리’, 즉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였으며, 앞으로도 결코 알아 뵙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겸손하다고 하기 전에 진실하고도 진리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는 엘리야도 또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도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예언자로서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23절)라고 한다. 즉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 희망과 구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가리키는 ‘실체’,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게 된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는 거요?”(25절)라는 질문에 요한은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요.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26-27절). 요한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안목으로는 알아 뵙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그분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면서 청중들에게 그분께 대한 갈망과 원의를 일으키고자 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 자리를 마련해드리고자 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때에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의 신비 앞에 요한은 위대한 교육자이다.

제1독서: 이사 61,1-2a.10-11: 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제1독서 역시 성탄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데 대한 가르침이다. 이사야는 한 신비스러운 인물이 올 것과 그의 사명을 예고하는데 특별히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압박받는 이들을 돌보아줄 것이라고 한다(1-2절). 예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 구절을 읽고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바로 그분이 이사야가 말한 신비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려 했다(루가 4,28-30 참조).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단 기준에 따라 해석하여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께 자신을 따르라는 결과를 내고 있다.

예수님은 오직 ‘야훼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일 뿐이고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고,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포로들과 옥에 갇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찢긴 마음을 싸매어 주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얼마나 많은 ‘찢긴 마음들이’ 이 세상에, 보잘것없는 이들과 뛰어난 이들 사이에, 무죄한 이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과 너무 많은 재물로 질식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예수님은 오셨다. 그리고 성탄 때마다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어느 누구든지 필요로 하는 정신과 육체의 해방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 오심을 우리에게 베푸실 이 해방의 은총은 이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참된 기쁨의 소식이었고, 나에게 ‘혁명’적인 것이었다면,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혁명적인 것으로 그 마음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노력하기로 하자.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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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자기 소임에 충실한 삶

누군가 저에게 “당신은 누구요?”하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사제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고, ‘누구네 아들’, ‘무엇하는 사제’, ‘마음이 어떠한 사제’, ‘영혼의 상태가 어떤 사제’ 등으로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 대답은 나에 대해 긍정적이며 호의적인 대답일 것이며, 거기에 약간의 부풀림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누군가 나를 잘난 사람으로 이야기해 주면, 어깨까지 으쓱해질 정도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저와는 많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옛 예언자들이 살던 것처럼 지내며, 거침없이 정의를 외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오?’라고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의롭지 못한 거짓말쟁이였다면, ‘그렇다.’라고 답하고 자기 이익을 챙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 모든 질문에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아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자기에 대해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하는 모습에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것은 ‘말씀’이라고, 자신이 전한 것은 ‘소리’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소리를 통하여 전해지기 때문에 말씀은 의미가 있지만, 그 소리는 그저 소리일 뿐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례자 요한은 말씀을 위해서 자신은 스스로 의미 없는 존재가 됨을 받아들였던 인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음이 드러납니다. ‘광야에서의 외침’은 ‘듣는 이’에 대한 관심보다 ‘외치는 이’에게 초점이 모아집니다. 이 모습 속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과정에 외로움, 성실함, 거침없음, 둔탁함, 광대함 등까지 엿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합니다. 그는 홀로였지만 외롭지 않게, 듣는 이가 없었지만 성실하게, 맞바람에 소리가 묻히기도 하고 메아리 속에 숨어들어가지만 좌절하지 않고 거침없이, 어떠한 기교도 말솜씨도 부리지 않고, 전해야 할 내용을 전달하는 소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그 어떤 장소도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외쳤습니다. 최대한 많이 전하는 소리가 되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지만, 그는 언제나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외침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신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하느님이 주신 예언을 존중하며,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간직하고 악한 것을 멀리하며, 자신의 소임을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지만, 평화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주셨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라고 준비시켰던 그리스도를 찾아 떠나지 않습니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라고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지만, 정작 자신은 그분을 찾아 나서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높일 때, 겸손되이 이를 물리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대답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랑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이 의미 없는 존재로 치부되거나 낙인찍히더라도 하느님은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의식하는 것, 보이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삶 등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에 대한 허점이나 잘못된 습관에 빠져 있었다면, 잘 성찰하고 통회하여 새로운 삶을 다짐하며 고해성사에 임하여, 최종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최인각 신부
  |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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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요?”

우리는 ‘미운오래시끼’ 동화를 알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둥우리에서 어미 오리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품고 있던 알들 중에서 검고 큰 알이 있었습니다. 그 알에서 태어난 오리새끼는 유난히 크고 보기 싫었습니다. 그 오리는 같이 태어난 다른 오리들에게도 구박을 받자, 키워주던 농가를 뛰쳐나오게 됩니다. 숲속의 새들과 물오리들도 못생겼다면서 구박하고 작은 새들도 이 오리를 상대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되는데, 이 집의 고양이와 닭이 못살게 굴어서 그 집에서 나오고 거리를 방황하게 됩니다. 오리는 호수가의 바위틈에서 추운겨울을 나게 되는데..얼음으로 뒤덮인 고생스러운 겨울도 지나고 봄이 왔을 때 오리 새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중을 날 수 있게 됩니다. 오리새끼는 사실은 훌륭한 백조의 새끼였던 것입니다.

황당하죠? 그러나 어쩌면 우리도 이 미운오래시끼처럼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며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향노루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가 내려옵니다.

옛날에 아주 멋진 사향노루가 살았습니다. 그는 어디선가 밀려오는 향긋한 냄새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사향노루는 향기의 진원지를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산을 넘고 들을 지나고 물을 건너 끊임없이 향기가 나는 쪽을 향해 걸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이 세상의 경계선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코끝을 계속 간질이는 향기의 진원지를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향노루가 향기를 찾아 높다란 산꼭대기에 올랐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향기가 풍겨 오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나는 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향노루는 헛수고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여 결국 절벽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말았습니다. 벼랑 밑바닥에 떨어진 사향노루는 사지가 처참하게 부러졌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의 온 몸에서 짙은 사향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향노루의 배에서 나오는 진한 향기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향노루는 그 향기가 어디서 나는지를 끝내 깨닫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몸 안에 그윽한 향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향기의 원천을 알지 못하고 먼 길을 방황하다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참조: 생명의 삶, 2003, 9월호)

인터넷에서 ‘자아 정체성’을 쳐보니, 에릭슨(E.H. Erikson)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실체로 인식하게 하는 개인의 느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날든지 헤엄을 치든지 기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운오리새끼와 사향노루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나의 정체성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고 또 그것을 깨닫고 살아갈 때 온전한 자기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처럼 살아갈 때야만 참으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질문에 대해 요한 세례자가 답하는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곧바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엘리야’도 모세를 통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 된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이 말은 요한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말하는 것이지, 그의 이름이나 성별, 키, 몸무게, 나이, 성격, 학력 등의 우리가 말하는 정체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커다란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완수할 때 비로소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워낭소리란 다큐멘터리식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이나 됩니다.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이 소는 역시 같은 처지인 최노인(79세)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입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릅니다.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입니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 하면서 최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릅니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친구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최노인이 살아있는 것도 기특한 나이 든 소를 너무 부려먹는다는 느낌도 듭니다. 소에 매일 아침마다 멍에를 씌우고 마차를 달고 라디오를 달고 자신은 그 위에 타고 갑니다.

보다 못한 최노인의 할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소 아픈데 또 데리고 나갑니까? 날마다 먹고 날 새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소타고 들에 가서... 소가 말 못하는 짐승이라서 그렇지, 그게, 아이고! 사람 같으면, 욕을 얼마나 하고 안 거려고 그러겠어요.”

물론 할아버지도 소의 심정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 불쌍해요. 이게, 30년 동안을 내가 수레를 타고 다녔으니 뭐... 사람 같았으면, 아이고! 나라면 죽었을 거야. 맞아 죽어도 죽었을 거야. 허허.”

그러던 어느 봄, 최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선고를 듣습니다. 최노인은 너무 오래 산 소가 죽는 모습을 보기가 안타까워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고, 헐값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최노인은 화가 나서 소를 팔지 않고 그냥 돌아와서 죽을 때까지 키웁니다.

죽기 직전 최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코뚜레를 빼내어줍니다. 그리고 소가 남겨놓은 것은 수많은 장작더미, 추우니까 때라고 그렇게나 많이 남겨놓고 떠나간 그의 빈자리는 최노인에게는 너무도 큽니다. 죽은 소를 생각하며 워낭을 흔들며 소리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은 노인의 얼굴에선 그 말 못하는 소가 그 노인에게 얼마나 큰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이 ‘워낭소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잘 묵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영화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힘들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소에게 수레나 쟁기를 달기 위해 소의 목에 걸치는, 어쩌면 소를 힘들게 일 시키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만약 최노인의 소가 멍에를 멜 수 없는 처지였다면 최노인이라 하더라도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밥을 주어가며 생명을 연장시키려 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노인은 그 나이 든 소를 남들이 보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일을 시키며 소를 소로서 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리와 건강 때문에 병약한 자신도 소와 함께 일을 합니다.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과 소의 본질적 삶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나 소나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해야 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멍에를 메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소는 최 노인이 메어주는 멍에를 잘 지고 갔기에 최 노인 덕에 참으로 소로서 살았고, 몸은 고달팠더라도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주인에게 사랑받고, 또 소가 소로서 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은 대림 3주간입니다. 이제 성모님을 제외하고 성탄을 가장 즐겼던 인물을 살펴봅시다. 바로 성모님 곁에서 그 기쁨을 언제나 함께 나누었던 ‘요셉’이십니다.

요셉은 천사로부터 마리아와 혼인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가정의 가장이 되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돌봅니다. 물론 천사의 명령대로 이집트로 피난 갔다가 다시 천사의 명령대로 나자렛으로 돌아옵니다. 그 분은 다만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직무에 충실했을 뿐인데, 가장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사셨던 분이고 그렇기에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분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며 사셨던 분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성모님, 그리고 요셉성인과 세례자 요한 등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구원사업의 멍에를 매어줍니다. 그 멍에를 지고 가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래야만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내려다 놓을 나의 정체성이요, 나의 하늘나라 주민등록증은 그분께서 내 어깨 위에 메어주시고 또 내가 그 때까지 충실히 지고 왔던 그 멍에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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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제는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들까지도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쓰는 추세이지요. 왜 그럴까요?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가치관이 은연중에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외모가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취업 및 직장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습니다. 씁쓸한 현실이지요.

그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한세례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비록 그를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이나 사진이 없지만 성경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모습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강한 햇볕과 열풍으로 낮에는 섭씨 50도 가까이 기온이 올라가고, 해가 지면 0도 가까이 떨어지는 거친 광야에서 마땅한 거처도 없이 낙타털옷만을 입고 지내며 메뚜기와 어쩌다 운이 좋아야 구하는 들꿀로 연명하는 그는 마치 원시시대 사람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세례자하면 산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깊게 패인 눈과 검은 피부, 마르고 왜소한 몸 등이 떠오릅니다. 참 볼품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야인(野人)’의 말을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광야로 찾아갔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청하여 그의 제자가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많은 이들이 그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어떤 것-외모, 재산, 지위, 배경 등-의 영향 없이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만을 증언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것으로 말씀을 가리우지 않고 진정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모습과 삶의 방식은 그가 ‘기인(奇人)’이거나 ‘광인(狂人)’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오시는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 그분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세속적인 가치와 격식, 편리함 등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 거추장스러운 것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세례자의 겸손함과 소박함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리스도냐고 물었을 때 그리스도인척 하려는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적극적으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까지 이야기 하죠. 그는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시켰고, 후에는 자신의 제자들까지 그리스도께 인도합니다. 요한세례자는 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고 작은 존재가 되길 원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존경했고 예수님은 요한세례자를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큰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루카 7,28 참조).

이러한 요한세례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외적으로 화려한 모습이 잠시 세속의 인기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하여도 그 안에 진리가 담겨있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지푸라기만도 못함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소박함과 겸손함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것,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들의 참된 자세가 아닐까합니다.

<수원교구 김종현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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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하게 되는 고민들은 이렇다. 담임의 역할 안에서 어떻게 하면 좀더 쾌적한 교실 분위기에서 학생들이 학습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학생들의 창의적 학습 사고를 함양하기위해 독서 토론 나눔 같은 방과 후 수업을 개설해 볼까? 아침을 먹지 못하고 오는 학생들과 아침을 같이 먹을 방법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학생들 생활기록부에 기록될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잘 기록할 수 있을까? 내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음악적 탈렌트를 학교라는 특수상황 안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학교에서 살아가는 내가 현재하는 고민들이 어쩌면 신부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은 아니다. 학교 안에서 해야 하는 종교 행사들, 예비자 교리, 성사, 미사 등에 관한 부분들이 신부로서, 교목으로 생각해야 할 고민들일 것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 묻게 된다. 내가하는 고민들이 올바른 고민인가? 신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고 그것을 하려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가?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언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가톨릭 신자 학생들의 모임이 더 잘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안에서 살아보고 싶다. 물론 최소한의 것들은 해 나아가고 또 나 스스로는 종교적 형식 안에 잘 머물러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다(기도 생활, 성사생활 등).제사장의 아들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행보는 사람들의 예측을 넘어선 부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요한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이고 누구이기에 이런 일을 하냐고….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어쩌면 나도 모르게 고정된 나 자신의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교장 신부님께서 가톨릭 학교 교장 연수 중 받으셨던 질문을 얘기해 주신 적이 있다. “종교적인 행사를 하지 않고 가톨릭 정신을 학생들에게 전달할 방법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정답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단순히 학교라는 특수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복음을 선포한다는 의미 안에서 모든 신앙인이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는 여정의 의미로써 받아들여하지 않을까 한다.

나의 삶을 밝혀주는 신앙의 빛 안에서 그 힘으로 지금 학교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잘 찾아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단순히 종교적인 형식의 의미는 아니지 싶다. 그 형식을 넘어 그러한 형식을 통해 전해져야 하는 가톨릭 정신이 대상의 처지와 현실을 고려한 방식으로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잘 전달되었을 때 그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단순히 내가 한 무엇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일하시는 그분을 받아들이게 한 나의 삶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이 나로서 빛을 증언할 따름인 삶이고, 광야라는 현실에서 그분을 외치는 소리로써 살아가는 나의 삶이 아닐까?

▥ 수원교구 서영준 라파엘 신부 : 2017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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