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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조회수 | 2,035
작성일 | 05.12.11
저는 요즘에 기도하려 할 때면 성당으로 들어가서 꼭 대림환을 켜고서 기도를 합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않느냐고 질문을 하실지 몰라요. 맞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요. 하지만 새벽의 성당 기온은 너무나 춥답니다. 영상의 기온을 보이는 방을 버리고서, 영하의 기온인 성당에서 기도하기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하느님께서는 장소에 국한되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즉, 제가 성당에서 기도하면 더 많은 은총을 주시고, 방에서 기도하면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성당에 들어가서 대림초를 키고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단지 대림초를 빨리 쓰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초를 켜서 기도를 합니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대림초는 작년에 구입한 것을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에 워낙 커다란 대림초를 구입했기에, 미사 때만 초를 키는 것으로는 절대로 닳지를 않더군요. 그래도 3~4일이 지나면 초를 깎아 줘야 하는데, 워낙 커서 초를 깎기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이 초를 한번 깎으면 온 힘이 쫙 빠질 정도라니까요. 이렇게 초를 깎으면서 저는 결심했던 것이지요. ‘내년에는 대림초를 바꾸자. 작은 것으로…….’

하지만 이렇게 바꾸려면 그래도 많이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기도할 때에도 초를 켜는 등, 아주 열심히 초를 켜고 있습니다.

저는 무조건 큰 것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큰 것이 불편할 때가 의외로 많습니다. 이 대림초도 그렇지만, 작년에 만들었던 구유도 그랬습니다. 워낙 크게 만들었더니만, 나중에 옮기는데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큰 것을 선호합니다. 또한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선호하고 좋아하는 자리가 나에게 꼭 행복을 전해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고, 절망으로 밀어 넣는 것이 바로 그렇게 크고 높은 것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것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함이 아닐까요?

세례자 요한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따르는 등,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한 그리스도요?”

만일 세례자 요한이 이 질문에 대해서, “아니, 이제야 알았소? 맞소. 내가 바로 성서에 오시기로 했던 메시아인 그리스도요.”라고 답했더라면, 한 여자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더 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높고 큰 자리를 세례자 요한은 원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은 무대 뒤편으로 이름 없이 사라지는 한 명의 조연일지라도, 메시아를 사람들에게 만나게 하는 준비를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이 세상의 큰 것으로, 또한 높은 것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정직함과 겸손을 갖추어 나갈 때,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을 깨닫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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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 돈이냐? 예수님 돈이지!”

다른본당 청년들이나 교사들이 인사라도 오면 저는 동인천의 유명한(?) 삼치 골목에서 막걸리를 사줍니다. 그런데 삼치 골목에서 막걸리를 한잔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늘 누추한 차림의 한 할머니가 테이블을 돌아다니시며 껌이나 초콜릿 좀 사달라고 사정하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손님이 이 할머니를 본체만체합니다. 이윽고 제 테이블로 할머니가 오시면 저는 늘 지갑에서 돈을 꺼냅니다. 그러면 같이 동석한 청년들은 “신부님, 저 할머니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가짜니까 자꾸 도와주면 안 돼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놈들아, 저 할머니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어떻게 하느냐? 이 돈이 내 돈이냐? 예수님 돈이지!” 이렇게 대답하고 할머니의 맛있는 초콜릿을 사 드립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십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교회는 자선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의 시선과 나눔의 손길로 예수님께서 손수 보여주신 자선에 참여할 것을 독려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절대적 가난으로 고통 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어려운 이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작은 도움과 관심을 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서로 먹고사는 것이 힘들다 보니 이웃의 어려움과 고통에도 무관심한 모습이 점차 늘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보고도 외면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많아질수록 우리 주위에는 헐벗고 배고프고 가난에 고통 받는 예수님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제가 삼치 골목에서 본 것처럼 천 원짜리 한 장이면 그 어려운 할머니를 도와줄 수 있는데, 그것마저 외면하며 자선을 베푸는데 참으로 인색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나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재물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재물을 내 것, 나만의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섬기는 순간 우리에게는 불행이 찾아옵니다. 소유는 욕심을 낳고 욕심은 걱정을, 걱정은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삶의 불행을 왜 우리는 그렇게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재물을 하느님의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재물의 노예와 걱정에서 해방되게 되고 나눔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구원이 보입니다. 재물에 대한 시선을 바꾸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대림 제2주일입니다. 인간사랑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데, 그분이 누우셔야 할 구유를 우리가 사랑의 실천, 나눔의 실천으로 마련해 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삼치 골목 할머니의 환한 미소에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김종민 요한 세례자 신부
  |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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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만나는 초등학교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중의 한 명은 약속 시간에 맞춰서 온 적이 없습니다. 항상 30분 이상을 늦었고, 그때마다 약속 시간에 늦은 다양한 핑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전철이 오지 않아서 늦었다는 핑계, 회의가 늦게 끝났다는 핑계, 오는 길에 공사 중인 곳을 지나게 되어 늦었다는 핑계 등등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예 만나는 시간을 뒤로 미루어 보았지요. 하지만 미루어도 약속 시간에는 항상 늦었습니다. 한두 번은 눈감아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반복되다보니 이 친구와 약속하는 것이 항상 불안합니다. 이 친구에게 중요한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저 역시도 귀한 시간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함께 한 것이니까요.

이 친구를 떠올리면서 저 역시 자주 약속을 어겼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바로 주님과 하는 약속이지요. 특히 고해성사를 통해 이제까지의 안일하고 부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겠다는 약속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작심삼일도 못 지킬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도 귀한 시간을 쪼개어 우리의 약속을 들어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약속을 계속 어긴다면 어떨까요? 저와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고 친구와 약속을 더 이상 잡지 않으려던 제 모습처럼, 주님께서도 약속을 어기는 우리의 약속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늘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다가오셨으며, 늘 최선을 다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내가 말했던 약속을 주님께 얼마나 지키고 있었을까요? 특히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으며, 주님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이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대림 제3주일로 교회에서는 ‘자선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사랑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바로 우리의 약속이며,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최대한으로 낮추어야 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을 낮춘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며,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가 될 때,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께서 원하셨던 것처럼,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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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석공과 황홀한 독대

무릎을 꿇고 비석을 다듬는 석공이 있었다. 석공은 많은 땀을 흘리며 비석을 깎고 다듬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비석에 명문을 각인했다. 그 과정을 한 정치인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작업을 마무리 짓던 석공에게 다가가 “나도 돌같이 단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당신처럼 유연하게 다듬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소. 그리고 돌에 명문이 새겨지듯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에 나 자신이 새겨졌으면 좋겠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석공이 대답했다. “선생님도 저처럼 무릎 꿇고 일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빛이 아니요, 다만 빛을 증언하는 광야의 소리일 뿐이라 했다 (요한 1, 8).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자신은 오시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 (마르 7, 8)이며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요한 3, 30) 말할 정도로 겸손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마태 11, 11) 말씀하셨다.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은 이제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그 빛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복음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신앙의 기본기라고 할까…….우리는 그 빛을 보고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체험한 것을 고백하고 그 고백을 증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증언을 통하여 모든 이를 믿게 하여야 한다. (요한 1, 7) (빛-체험-고백-증언) 많은 분이 ‘신부님! 신앙생활이라는 게 뭐예요?’ 묻곤 하는데 나는 서슴없이 요한복음 1장 7~8절과 서간들을 인용하여 설명하곤 한다.

‘하느님을 만나시고 만나신 그분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그 고백은 감사의 고백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한 내용을 이웃에게 증언하십시오. 그것이 신앙생활이며 선교입니다. 그 체험은 짜릿하기도 하고 경건하기고 하고 영험하기고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남입니다. 그 체험은 주님과의 은밀하고도 황홀한 독대입니다. 그 기쁨의 한 방울만이라도 맛보십시오. 신앙은 바로 그곳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그 신앙을 조금이라도 맛본다면 우리는 주님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기쁨입니다. 체험할 수 없으면 고백할 수 없고, 진정한 자기 고백이 없으면 증언할 수 없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 삶의 자세는 더 낮은 고요로 돌아가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다. 고요한 호수의 위에는 무엇이든 가장 높은 물체가 가장 낮게 비치는(반영) 것을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것이 저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것이다. 우리의 삶이 낮은 고요로 돌아갈 때 그 자리에 주님이 오실 것이요, 바로 그곳에서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 만남은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될 것이요, 우리는 기뻐 뛰놀며 만방에 그분을 선포할 것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요한 세례자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시선과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겸손한 증거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우리는 세속에서 번영하는 자신인가, 아니면 고요 속에 기도하는 자신인가…….’

<인천교구 임현택 안드레아 신부>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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