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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성체성사
조회수 | 2,116
작성일 | 06.07.29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다운 배려인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제1독서: 2열왕 4,42-44: 먹고도 남을 것이다

1독서는 복음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 예언자 엘리사는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고 그 음식이 남기까지 하였다(44절 참조). 또 엘리사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자 제자가 놀랐던 것과(43절) 필립보의 경우와 비슷하다(요한 6,7).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여러 가지 기적들의 문학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복음: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예를 들면, 만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모세에 대해 언급하며(요한 6,31-33.49 참조), 장소에 있어서도 따로 떨어진 산에서 기적을 행하시고(3절), 그 때는 “유다인들의 명절인 과월절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4절)고 전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서의 구원적 메시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의 구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빵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신명 18,15) 그 예언자로 생각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이 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14절). 그리고 모세의 경우와 같이 예수께서도 산에서 기적을 행하셨고, 이 빵의 기적은(10절) 그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파스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옛 것의 “완성”이면서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새로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13절).

빵을 나누어 받은 군중이 1독서의 백 명이 아니라 “남자만 오 천명”(10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나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으나(출애 16,20) 예수께서는 “조금도 버리지 말고”(12절) 모으라고 한 것도 이 기적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외에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메시아적 빵’은 이제 오천 명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행동과 ‘감사드린다, eucharisteo’(11절)라는 뜻의 성체성사의 특성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새로움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에는 최후만찬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15절)고 한다.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감동하여 열광은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도 예수님을 찾은 것은 빵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여들었던 것이다(요한 6,26절 참조). 그들이 찾고 있던 메시아는 권능을 가지고 무엇이나 거저 베풀어주시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해결해주는 메시아였다. 즉 편의주의적 메시아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찾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찾을 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는 표지로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 잘못된 이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과 군중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신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5절)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깨닫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인 성체성사에 암시된 표지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현세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하여 이기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며, 하느님을 자칫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기 쉽다.

제2독서: 에페 4,1-6: 주님도 한 분이시고, 몸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

바오로 사도께서는 사랑에 기인한 ‘단일성’을 말한다. 오늘 2독서의 내용이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신앙의 단일성에로 이끄는 요소들은 많다. 하나이시며 같은 성령,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의 성체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몸도 하나이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7).

성체성사는 단일성과 사랑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 그것을 군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즉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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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서의 나눔

지난번에 갓 서품을 받은 신부님께서 본당에 와서 미사를 봉헌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첫 미사라 신자분들께서 많이 오셨습니다. 미사 후에는 새 신부님의 안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신자분들께서 안수 전에 고해성사를 많이 보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그날 속이 좋지 않았는데, 성사를 주는 동안 제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성사를 드리다가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끝났으려니 하고 나가시는 신자분께 몇 분 남았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다섯 분 정도 남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 다섯 분의 신자가 미워졌습니다. 힘들게 다섯 분께 성사를 드리고 나가려는데 그 사이 두 분의 신자가 와 계셨습니다. 그 두 분이 저는 정말 미웠습니다. 성사를 다 드리고 사제관에 와서 “정말 쉽게 미움을 가질 수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게다가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예수님께 봉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오천 명이 먹을 수 있었겠지만, 기적은 쉽게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적은 너무나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아이가 봉헌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먼저 나눌 때, 주님께서는 모두가 부족하지 않게 하여 주십니다. 바로 자기의 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건 너무 부족하고 이건 미약한데…, 이걸 어떻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너무 미약하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주님께는 다르게 보입니다.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꺼이 주님께 봉헌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내가 봉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한 작은 배려 역시 봉헌일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나눔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미움은 쉽게 우리 곁을 찾아오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을 멀리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한 주간이 되도록 합시다.

손용창(베드로)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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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조용히 눈앞에 떠올리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여러 사람이 보입니다. 예수님, 필립보와 안드레아를 비롯한 제자들, 그리고 모인 수많은 사람들, 마지막으로 어떤 한 아이입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지닌 아이. 그저 조용히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고 사라집니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내어놓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의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먹고 남긴 빵조각은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한 아이가 내어놓은 작은 나눔은 이렇게 커다란 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놀라운 일이 되었습니다. 작고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나눔이 너무나 커다란 나눔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커다란 것만을 바라보고 커다란 무엇인가만을 바라면서 지냅니다. 그래서 작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별로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커다란 어떤 일, 커다란 도움, 커다란 성공 같은 것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커다란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큰 것들이 아니라 작은 것들이 우리 삶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커다란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삶의 여백들을 우리 삶의 작은 일들이 채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큰 것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어떤 큰 일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보다,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못했던 아쉬움이 더욱 오래 남습니다. 특히 사람들에 대한 것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에 남는 아쉬움과 미안함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었고 해줄 수 있었던 작은 것들을 하지 못했음에서 더 크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무엇인가를 기꺼이 나누는 것입니다. 작은 시간, 작은 마음, 작은 사랑들 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작고 보잘 것 없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 바라보시기에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믿고 내어놓아야 합니다.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그 놀라운 기적은 어떤 한 아이가 내어놓은 작지만 작지 않은 나눔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가 보여주었던 나눔을 우리 삶 안에서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커다란 나눔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안민석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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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 가운데에는 사람들을 모으는 지도자(봉사자)가 있고 흩어버리는 이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도자가 공동체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때, 비전을 실천하지 않을 때, 구성원들과 협력하기 보다 그들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감시할 대상으로 여길 때, 자신만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구성원들은 활력을 잃고 책임을 회피하며 수동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더구나 공동체의 지도자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일(목적)을 위해서만 구성원을 만나고 자신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지도자와 공동체 구성원 간에 건강한 관계는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1독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공동체의 지도자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보낸 형제자매라고 우리조상님들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명을 다하지 못한 이들 대신 다른 이들을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에 희망을 불러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지도자(봉사자)가 하느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지라도 이것이 끝이 아님을,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일을 계속 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은 지도자에게만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일의 많은 경우가 양쪽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말씀을 토대로 공동체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게 되는 한 가지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던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쉴 수 있도록 사람들로부터 떨어뜨리려 하십니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욕구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지도자 가운데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생각합시다. 오늘날에도 각 본당 공동체에는 휴식이 필요한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돌볼 틈도 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 온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 가운데 드러내려고 헌신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려고 온 힘을 다합니다. 그들은 정말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들을 쉴 수 없게 합니까? 하느님이 쉬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셔도 쉬지 못하는 이유가 본당 신부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쉴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아무리 좋아서 기쁘게 하는 일도 쉬지 않고 하면, 육신과 정신의 건강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기쁨이 원치 않는 십자가를 지는 고통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지도자들이 적당한 휴식과 돌봄을 통해 기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길 빕니다.

▦ 수원교구 서동조 유스티노 신부 : 2018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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