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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수님은 우리의 양식
조회수 | 2,192
작성일 | 06.07.29
지난 6월 7일 우리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라는 F-15K 전투기가 동해상에 추락했다. 귀중한 두 명의 목숨을 잃었다. 이들이 조종했던 전투기는 도입한 지 채 1년도 안된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90년 이후 추락한 F-15계열 전투기만 해도 9대가 넘고 대부분 엔진이상에 의한 추락으로 집계됐다. 군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차세대 전투기 선정 당시 제기됐던 노후기종(1974년형)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공군은 F-15K를 우리 군의 주력 전투기로 선정하고 총 42억 2천 800만 달러를 투입해 2008년까지 40대를 도입할 예정이었다. 국방부는 국민 혈세를 들여 도입 중인 첨단 전투기가 조종사의 미숙보다는 기체 결함으로 추락했을 가능성이 높기에 자신들이 F-X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부당외압에 대한 굴복과 기종선정의 불공정성을 지적받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투기 도입과정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국방부에서 F-X 최종선정 기종으로 F-15K를 선정했던 해인 2002년에 국내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F-X시험평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했던 조주형(가브리엘)대령은 미국의 부당외압과 기종선정의 불공정성에 대해 양심선언을 하였다. 그는 F-X시험평가팀을 조직하였고, 32년간의 공군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F-X 사업 추진 과정 전체를 설계했던 인물이다. 조 대령은 모두진술(冒頭陳述)을 통해 가격도 비싸고 조건도 불리한 F-15K를 선택하기 위해 부당한 방법까지 동원했던 국방부의 잘못과 이들을 움직인 원인이 되는 미국의 외압을 지적하였다. 그는 2002년 3월 3일 양심고백 후, 그해 3월 9일 구속되었고, 국방부는 양심선언과 관련된 진위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4월 19일 서둘러 F-15K를 최종선정기종으로 발표하였다. 이를 정부는 승인하였고, 지금 현재 4대가 들어온 상황이다. 앞으로 2008년까지 36대를 도입할 예정이다. 조주형 대령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吐露)하였다. “세상을 둥글게 사는 것이,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며 일신상의 안위를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처세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한 몸을 희생하여 국가와 공군에 도움이 된다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같은 상황에서는,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빵을 많게 하는 표징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 복음 다음부분에 나온다. 예수님은 배불리 먹은 것에 만족하여 당신을 찾아다녔던 사람들(요한6,25-26)에게 썩어 없어질 음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음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당부하셨다(요한6,27). 그리고 당신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6,51). 우리가 성서를 읽고 성체를 영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행적을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사는 신앙인다운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인천교구 박병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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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을 맞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이 넘는 군중을 먹게 하시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데 왜 믿음이 안갈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음이 세상 것에 묶일수록 신앙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서의 똑같은 내용도 세상 욕심이 줄어들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믿음도 깊어지고 커집니다.

예전에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크리스찬 출판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쓴 것인데 문장이 수려하고 세부적인 묘사가 아름다웠습니다. 바로 오병이어 대목에서 감동이 밀려왔고 ‘필’이 꽂혔습니다. 그렇게 벅찬 가슴으로 읽다보니 의심이 사라지고 그냥 믿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갈증이 생겼을 때 좋은 영적 독서 책을 권합니다.

며칠 전에 ‘벼락을 맞았습니다’(아베마리아 출판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1995년 5월 5일 오후 4시 30분 경, 콜롬비아 보고타 국립대학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조카와 이모 둘 다 치과의사인데 함께 우산을 쓰고 가다가 벼락을 맞았습니다. 조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는데 이모, 즉 글로리아 폴로박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폴로박사는 엄청난 벼락으로 온 몸이 숯처럼 타 버렸고 유방과 가슴에 큰 구멍이 생겼고, 간, 신장도 심하게 파괴되었고 허파와 난소도 심하게 타 버렸습니다. 더욱이 심장 활동이 정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온갖 의학적 상식을 넘어 폴로박사는 완전히 치유되었고 그 후 1년 반 뒤에는 임신을 하여 건강한 아기도 낳았습니다. 문제는 폴로박사가 다시 소생하기 전 겪었던 ‘임사체험’의 내용입니다.

그는 연옥, 지옥, 천국을 두루 체험하고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가 증언한 연옥, 지옥, 천국을 보면서 최후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가를 느꼈습니다.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 마땅하나 하느님의 자비로 다시 살아났고 이 체험을 온 세상에 전할 사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폴로박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너는 지상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천 번 뿐 만 아니라 백 만 번이라도 전해야 한다. 네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가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댈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도 다음번에 올 때는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받게 될 것이다. 기름 바른 자들, 즉 봉헌된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 내가 행한 이 세상의 기적들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 받는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듣기를 거부하는 이는 가장 사악한 귀머거리이며, 보기를 거부하는 이는 가장 사악한 장님이기 때문이다.’

죽은 라자로도 살리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려 주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다시 살려주신 예수님! 벼락 맞아 죽은(?) 폴로박사도 다시 살려주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귀호 다니엘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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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고 있는데 급한 전화가 온 것이에요. 얼른 성지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도로 하나만 건너면 저의 목적지인 가게였거든요. 따라서 저는 조금 늦더라도 물건을 사가지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도로를 건너기 위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신호를 바뀌지 않던 지요. 그렇다고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널 수도 없고……. 이 신호등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파란 불이 켜져 있으면 갈 수 있고, 또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면 갈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빨간 불이라고 해서 ‘내가 저기로 건너갈 수 없구나.’하면서 절망에 빠질까요? 그 누구도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빨간 불일 때에는 건너갈 수 없지만, 분명히 어느 순간에는 파란 불로 바뀔 것이고 그래서 내가 저 건너편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자신이 도로를 건너려고 할 때, 항상 파란 불만 켜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서 항상 파란 불만 켜져서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멈춰서 기다려야 하는 빨간 불일 때가 있는 것이지요.

이 빨간 불의 순간이 바로 우리가 맞이하는 시련과 실패, 그리고 고통의 순간이 아닐까요? 그 순간에 여러분들은 과연 어떻게 하셨는지요? 혹시 시련과 실패, 고통이라는 빨간 불 앞에서 그 길 가기를 아예 포기했었던 것은 아니었나요?

빨간 불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파란 불로 바뀌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삶이 계속 파란 불이길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걷다가 잠시 쉬고, 또다시 걷고를 반복하는 파란 불과 빨간 불의 조화가 가장 정상적인 삶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십니다. 이들이 왜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요? 예수님만 있다면 항상 파란 불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분만 임금으로 모시고 산다면 먹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파란 불만 놓인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을 그렇게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이지요.
빨간 불이 내 앞에 켜졌다고 뒤로 돌아선다면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삶 의 빨간 불인 고통과 시련 역시 피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를 참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모습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꾹 참고 이겨냅시다. 빨간 불 후에 반드시 파란 불이 켜집니다.

조명연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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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보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다. 바로 일기예보 사이트입니다. 날씨가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며칠 뒤에 우리 본당 Camp가 있거든요. 500명 가까운 본당 식구들이 이동하는 캠프이기 때문에 날씨가 걱정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캠프가 엉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캠프 가는 기간 동안 날씨가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에 조금 흐리지만,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맑음으로 표시가 되더군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오늘 아침에 보니 수요일에 그 지역은 비가 온다고 되어 있더군요. ‘왜 날씨가 바뀐거야?’하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기는 합니다. 캠프 기간 내내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긴 내 앞 길이 항상 평탄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고속도로를 생각해 보세요. 이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를 갈 수 있도록 만든 도로입니다. 그래서 신호등이 없지요. 또한 횡단보도도 없어서 일부러 멈출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고속도로라고 해서 막히지 않을까요? 이 고속도로도 꽉 막혀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삶이 무조건 잘 되리라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욕심입니다. 고속도로가 막힐 수 있는 것처럼, 내 삶도 갑자기 막힐 수 있습니다. 믿었던 직장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믿었던 자녀와 친구가 나를 슬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뻥 뚫려야 정상인 것 같은 내 삶이 갑자기 막혀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막혀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려니’ 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이때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우 인간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안목으로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서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측면으로 생각하지도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느 아이가 가지고 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지요. 하느님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만 가능한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분명히 꽉 막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라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과 같은 커다란 기적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이가 가져온 아주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같이 우리에게 아주 작은 정성만 있어도 주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커다란 기적은 우리의 삶 안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기적들을 느껴 가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부자인지 알고 싶다면 오늘밤에 가진 돈을 모두 잃는다고 했을 때 내일 무엇이 남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라(보에트커).

조명연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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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성소 주일이면 신학생들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분께서 신학교를 찾아주십니다. 그러시면서 음식을 손수 준비해오시고 가실 때에는 이런저런 먹을거리들을 한 아름 안겨 주시곤 합니다. 사실 신학교 교칙 상 기숙사 내에 음식물을 들여다 놓는 것을 금하기에 그날 들어온 것들은 모두 식당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과일이 한 상자 들어왔다거나 그 양이 많으면 아무런 고민 없이 식당으로 가져갈 텐데 얼마 되지 않는 양이면‘이것을 가져가서 누구 코에 붙일까?’,‘가져갈까 아니면 동기들끼리 나누어 먹을까?’ 망설이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일단 식당에 가져다 놓으면 그것이 괜한 걱정이었음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서로 조금씩 모으고 나누는 것들은 어느덧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사의 시종은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나누어주라는 명을 듣고“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안드레아 사도 역시“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별 볼 일 없고, 이토록 적은 양으로 무엇을 하겠느냐는 시종과 안드레아의 모습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 바로 우리의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물론 아이가 내어 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많은 이를 먹이기에 형편없이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나누었더니 모두가 배불리 나누어 먹고도 남을 만큼 큰 기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누는 곳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고, 나누는 곳에 하느님의 풍요로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많이 가질 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내어놓을 때 비로써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작고 부족해도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그 나머지의 것들은 주님께서 채워주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할 수만 있다면 베풀고, 할 수만 있다면 섬기고, 할 수만 있다면 더불어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인 것입니다.”

인천교구 조영승 빅토리오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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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만 하면 “당신이 뭘 알아?”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이 남편 때문에 아내는 항상 주눅이 들어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교통사고로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입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병실로 들어섰는데, 의사가 흰 천을 덮으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에 아내는 “아이고~ 여보~ 아이고~ 여보~” 외치면서 슬피 울 수밖에 없었지요.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몸을 비틀어 움직이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안 죽었어.”

그러자 아내가 남편을 다시 눕히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당신이 뭘 알아? 의사가 죽었다는데…….”

아내의 이 말은 맞을까요? 틀릴까요? 사실은 아내의 말이 틀렸지요. 아무리 믿음이 가는 의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살고 죽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남편이 보여 주었던 “당신이 뭘 알아?”라는 말이 이 순간에 작용을 하게 된 것이지요. 가까운 사람의 말은 믿지 못하는 행동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우리도 평소에 이런 모습으로 살아간 것은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나의 기준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 특별히 가까운 사람에게 믿음을 갖지 못하고 무시하고 부정했던 모습 등을 너무나 많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쯤 되는 엄청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볼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곁에서 모시고 따랐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자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하고, 안드레아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굳은 믿음을 보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봉헌한 아이였습니다. 부족한 양식을 위해 군중들에게 말했을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양식을 내어 놓은 사람은 이 아이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다른 군중들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아이는 예수님의 전지전능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빵의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내 이웃에 대한 믿음도 또 주님께 대한 믿음도 부족한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직접 그 믿음의 증인이 되지 못하는 삶 안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믿음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주님의 큰 움직임을 만들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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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오병이어 - 사실과 진실

중국의 만리장성을 만들 때 이야기다. 한 여인(맹강녀)이 자기 남편이 부역으로 끌려가 장성을 쌓고 있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몇 년이고 집에 돌아오지 않자, 남편의 겨울옷 한 벌을 지어 공사현장으로 먼 길을 찾아갔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죽어 시신마저 찾을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죽은 이들의 시신을 성채 속에 함께 쌓아 버렸다고 한다. 맹강녀는 성채 앞에서 지어온 옷을 내려놓고 사흘 밤낮으로 통곡을 했고 얼마 후 성벽이 무너지며 성벽들 사이에서 죽은 이들의 뼈가 흘러내렸다.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옷을 입혀 장례를 잘 치르고 노룡두에 올라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신영복의 담론 中).

어디까지가 무엇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실이 담겨져 있다. 만리장성을 쌓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죽고 다쳤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부역자 아내들과 가족들이 고통을 당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들은 확인할 수 없으나 사태의 진실은 담겨져 있다.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빵의 기적에도 사실과 진실이 담겨져 있다. 빵은 예수가 광야에서 유혹을 받을 때 사탄이 그에게 던진 유혹의 하나였다. 빵은 인간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빵 때문에 비교하고 경쟁하고 싸우고 죽이고 온갖 분쟁과 다툼이 일어난다. 비열하고 야비하며 작은 이익에 대의와 신의를 저버리는 일들이 다반사다. 점잖은 척, 아닌 척하며 빵 문제 언급을 회피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빵에 관심 없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빵은 생명의 중요한 축이었다. 없으면 죽는 것. 그런데 광야에서 한 소년이 자기가 먹을 빵을 내려놓는다. 포기와 비움! 중요하지만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 여기에서 기적이 시작되었다. 기적이야기의 진실은 빵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모자라지 않았으며 ‘나눔은 기적을 가능케 한다’는 진실이다. 생명을 위해 적절하게 빵을 나누고,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해준 진실이 중요하다.

예수는 그의 마지막 만찬에서 이 빵을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시며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빵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이지만 예수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간다.” 하시며 빵을 초월하는 삶을 강조한다. 초월한다는 것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본질로 다가선다는 것이다. 빵에 집착하지 않고, 빵에 묶이지 않고, 빵의 핵심과 본질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런데 세상은 온통 빵 이야기가 중심에 있고 사람은 사라져 버렸다. 빵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교회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 교회는 빵의 소중한 가치를 존중하고 빵 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인천교구 지성용 가브리엘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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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지레짐작하지 맙시다

어떤 분께서 부부 간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부부간에 진지하게 대화해보셨느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말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제게 어떻게 말할지 뻔하니까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니 대화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예측이 꼭 맞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 아예 대화하기 싫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대방을 지레짐작으로만 예측하고 있으면 절대로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즉, 상대방의 다양함을 인정해야 그의 말과 행동에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지레짐작을 하면서 뻔한 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을 거야. 저렇게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은 분명히 벌하실 거야. 주님께서는 나만 미워하셔….’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작고 편협한 생각을 뛰어넘어서 다양하고도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으시며, 믿기만 한다면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매 순간 느끼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고 따라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서 따라옵니다.(요한 6,2 참조) 주님께서 따라오라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따라온 것입니다. 이는 곧 주님께서 그들의 의식주를 굳이 해결해줄 필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떤 의도이든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고 필립보에게 물으시지요. 굳이 저들에게 먹을 것을 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더군다나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한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그분께 철저히 맡겨야 한다는 걸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을 갖고 주님을 뻔한 분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기적이 이뤄지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봉헌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잡습니다. 바로 모두가 함께 그리고 한마음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감사기도입니다. 아직 기적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즉, 감사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 주신 것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임금으로 삼으려는 군중을 피해서 주님께서는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어떤 행동에 대해 보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바라고 있으며, 또 많은 것을 실제로 주님께 받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봐야 합니다. 정성이 담긴 봉헌을 하고 있습니까? 아무런 봉헌 없이 얻으려고만 하는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웃과는 한 마음이 되었나요? 혹시 친한 사람들하고만 함께 하는 건 아닌지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감사기도는 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면서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요? 혹시 사람들에게 보답 받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에페 4,4-5 참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주님과 하나를 이루도록 더 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을 통해 보여주신 그 과정을 그대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모습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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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빵의 기적 - 나눔의 신비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다. 사랑이라는 말은 나눔이라는 의미로서 내가 가진 모든 것,즉 어떤 지식이나 재물,권력이나 명예,행복이나 불행까지를 포함해서 나눈다는 의미이다. 궁극적으로 대가 가진 유일한 목숨까지도 나눌 수 있을 때,이 사랑은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은 수난 전날 저녁에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 그리고 너희는 받아 마셔라. 이는 내 피의 잔이다..”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즉 당신 자신을 나누어 줌으로써 사랑의 절 정인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오늘 성경 말씀은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성체성사의 신비를 이야기하고 있다. 성체성사인 사랑을 나눔으로써 넉넉하여지고,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나눌수록 많아진다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또한 굳은 신념과 사랑이 없이는 실현불가능한 신비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후의 것까지 나눌 때 더욱더 풍 요로워 지고 남는 것이다. 보리빵 20 개를 백 명에게 나누어 준 엘리사 예언자의 믿음이 있기까지는 바알 살리시에서 온 ‘어떤 사람이 내놓았기에 가능했고,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 주고도 열 두 광주리를 남긴 예수님의 기적도 ‘어린이’의 나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처님은 아무것도 없어도 베풀 수 있는 것이 많다면서 그 일곱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화안시(和顧施)라 하여 웃는 얼굴을 베푸는 것,둘째는 언시(言施)로,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셋째는 심시(心施)로,마음의 문을 열고 남에게 진실함을 베푸는 것,넷째는 안시(眼施)로,선의 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 다섯째는 신시(身施)로,남을 돕는 행동을 하는 것,여섯째는 좌시(座施)로,남에게 양보하는 것,마지막은 방시(房施)로,다른 사람을 품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배고픈 시절에는 서로 나눌 줄 알았기에 굶어 죽는 이들이 적었는데, 먹을 것이 풍부한 오늘날에는 옆에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성체성사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까?

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면 틀림없이 남는데, 하나씩 집어 가라고 자유롭게 두었더니 모자라는 빵바구니를 만드는 우리가 과연 나눔의 의미를 알 수 있겠는가?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자기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성사다. 그러나 이 죽음은 고통의 죽음이 아니라 황홀한 춤으로서의 죽음이다. 하루살이는 몇 시간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그 춤은 새로운 쟁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추는 짝짓기를 위한 황홀한 춤이다. 한갓 미물인 곤충초차도 영원한 후손의 생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춤을 추면서 죽어가는 데 하 물며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쩌면 예수님은 그 황홀한 춤을 십자가상의 제사로서 추었고, 또 순교자들은 망나니의 칼 아래에서, 사자의 이빨 앞에서 영원한생 명을 위한춤을 추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어떤 춤을 추고 있는가?

▦ 인천교구 백순기 힐라리오 신부 : 2018년 7월 29일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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